문영공 묘역 공사 자료 - 성여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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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7-12-30 11:53 조회1,591회 댓글0건본문
성여완(成汝完) 묘 1309 - 1397
소재지 : 포천
지정사항 : 포천시 향토유적 제21호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한생(漢生:일명 匡自), 호는 이헌(怡軒).
창녕 성씨의 시조인 인보(仁輔)의 현손, 전객서부령 공필(公弼)의 손자이고, 판도총랑(版圖摠郎) 군미(君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삼사좌윤 오천(吳蕆)의 딸이다.
1336년(충숙왕 복위 5)에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簽書密直)·정당문학을 역임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민부상서로 있을 때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자 그 당류로 지목되어 장류(杖流)당하였다가 1378년(우왕 4)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에 다시 발탁되었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정변에 아들 석린(石璘)이 참여, 9공신이 되었으나 1392년에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포천 계류촌(溪流村)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고려 구신(舊臣)의 회유책으로 검교문하시중, 창녕부원군에 봉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역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고려시대 묘역과 유사한 묘제를 갖추고 있다. 봉분은 경안택주 금성군 나씨와 단분합장한 사각봉분으로 주위는 호석을 둘렀다. 봉분 주위에 석축을 쌓은 곡담을 둘렀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시대 공릉(강종의 부인 원덕왕후), 석릉(희종, 1181 - 1237)의 묘역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성여완 묘의 묘제형식이 고려시대 묘지형식을 계승한 15세기 초의 중요한 예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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