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약재따라 풍류여행(12)삼척 -척주동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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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01-17 10:46 조회2,026회 댓글0건본문
***삼척 척주동해비(三陟 陟州東海碑) 시도유형문화재 38호
1.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도유형문화재 38호
척주동해비 비문은 삼척 부사 허목이 지은 것으로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높이 76cm, 두께 23cm이다. 현종 3년(1662)에 건립한 '척주동해비'는 일명 '퇴조비(退潮碑)'라 불리듯이 조류(潮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당초에는 만리도에 건립되었다. 이후 숙종 34년(1708)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 바다에 잠겼던 것을 동왕 35년 부사 홍만기가 문을 본떠서 다시 새겼으며, 동왕 36년 삼척 부사 박내정이 죽관도 동쪽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에 이건하였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각의 전면에 "척주동해 비각" 제액과 후면에 "동해비각"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평수토찬비 비문역시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 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禹篆閣)"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2. 대한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
평수토찬비 비문 역시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 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禹篆閣)"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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陟州東海碑(表 面)
(裏面)
陟州東海碑
州古悉直氏之墟在穢貊南距京都七百里東臨大海 都護府使孔嵒許穆書
瀛海漭瀁百川朝宗其大無窮東北沙海無潮
無汐號爲大澤積水稽天浡潏汪濊海動有曀
明明陽谷太陽之門義伯司賓析木之次牝牛
之宮日本無東鮫人之珍涵海百産汗汗漫漫
奇物譎詭宛宛之祥興德而章蚌之胎珠與月
盛衰傍氣昇霏天吳九首恠蘷一股颷囘且雨
出日朝暾轇軋炫煌紫赤滄滄三五月盈水鏡
圓靈列宿韜光扶桑沙華黑齒麻羅撮䯻莆家
蜓蠻之蠔瓜蛙之猴佛齊之牛海外雜種絶黨
殊俗同囿咸育古聖遠德百蠻重譯無遠不服
皇哉熈哉大治廣愽遺風邈哉
(碑身高四尺五寸幅二尺九寸五分表面字徑七寸裏面一寸五分竝二篆書)
(追記)
顯宗二年先生來守是邦撰篆東海碑立於汀羅島爲風浪激
沈先生聞而改書今參考兩本大字用舊本小字用新本刻竪于
竹串島時
上之三十五年己丑春三月也
**삼척(三陟)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표면(表面)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이면(裏面)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고을은 옛 실직씨(悉直氏)의 터이고, 희맥(穢貊)의 남쪽에 있는데, 경도(京都)와의 거리가 칠백 리(里)이고,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해있다. - 도호부사(都護府使) 공암(孔嵒) 허목(許穆)은 쓰다.
큰 바다 끝없이 넓어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이 끝이 없도다.
동북쪽은 사해(沙海)여서
밀물 썰물 없으므로
대택(大澤)이라 이름하였네.
바닷물 하늘에 닿아
출렁댐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 동쪽에 구름이 끼었다네.
밝고 밝은 양곡(暘谷)으로
태양의 문이라서
희백(羲伯)이 공손히 해를 맞이하네.
석목(析木)의 위차(位次)요
빈우(牝牛)의 궁(宮)으로
해가 본시 돋는 동쪽의 끝이라네.
교인(鮫人)의 보배와
바다에 잠긴 온갖 산물(産物)은
많기도 많아라.
기이한 만물이 변화하여
너울거리는 상서로움이
덕(德)을 일으켜 보여준다네.
조개 속에 든 진주는
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네.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와
외발 달린 짐승 기(夔)는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
아침에 돋는 햇살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주 빛 붉은 빛이 가득 넘치네.
보름날 둥실 뜬 달
하늘의 수경이 되니
뭇별이 광채를 감추네.
부상(扶桑)과 사화(沙華)
흑치(黑齒)와 마라(麻羅)
상투 튼 보가족(莆家族)
연만(蜓蠻)의 굴과 조개
조와(爪蛙)의 원숭이
불제(佛齊)의 소들
바다 밖 잡종으로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치어
온갖 오랑캐들이 중역(重譯)으로 왔으나
멀다고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그 다스림 넓고 크나니
그 치적(治績) 영원히 빛나리.
비신(碑身)은 높이가 4자 5치요, 넓이가 2자 9치 5푼이며, 표면(表面)의 글자 크기는 7치요, 이면(裏面)의 글자 크기는 1치 5푼인데, 아울러 두 면을 전액(篆額)하고 쓴다.
추기(追記)
현종(顯宗) 2년에 선생이 이 땅에 수령(守令)으로 와서 동해비(東海碑)를 짓고 전액(篆額)하여 정라도(汀羅島)에 세워 사나운 풍랑(風浪)을 다스렸다. 심 선생(沈先生)이 이 일을 듣고서 개서(改書)하였는데, 지금 이 두 가지 본(本)을 참고하여 큰 글자는 구본(舊本)의 것을 사용하고, 작은 글자는 신본(新本)을 사용하여서 비석에 새겨 죽환도(竹串島)에 세운다. 때는 금상(今上) 35년 기축년 봄 3월이라
척주동해비의 전설
강원도 삼척, 한 시멘트 공장의 우람한 저장탱크가 굽어보고 있는 바닷가 작은 동산 위에서 동해척주비(東海陟州碑)는 이렇게 이백 년 후의 어린 후손들을 한탄하며 자신의 예견을 자책하는 냥, 횟가루에 그을린 몇 그루의 소나무 아래, 나무 울로 막힌 당우에 갇힌 듯 서있다.
척주비는 조선시대 숙종조에 우의정을 지낸 미수(眉叟) 허목이라는 분이 삼척부사를 지낼 시절 만든 것이다. 당시 삼척은 해일의 피해가 극심하여 삼척부중이 연일 바닷물에 잠기다시피 했다는데, 선생이 지금은 방파제에 파묻힌 만리도라는 작은 바위섬에 이 비석을 세움으로써 해일의 침범을 막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불가해한 일이나, 이것이 사적(史籍)에 남게 된 것은 미수 선생이 삼척을 떠난 후의 일로 인해서이다.
선생이 부사직을 이임하고 서울로 돌아가자 그곳의 유림들은 유학이 정도인 세상에 무슨 해괴한 일이냐며 그 비를 부숴 버렸고, 때맞춰 다시 해일이 범람하면서 민심의 흉흉함이 극에 달하자 강원도 관찰사까지 순시하기에 이른다. 이때 김 모라 이름이 전하는 한 아전이 관찰사에게 미수 선생의 말을 전하게 되는데, 선생은 이미 일의 전후를 예견하고 비를 처음부터 두 개를 만들어 그 하나를 동헌 마루 밑에 묻어 놓고선 후일 관찰사에게 이를 전해 비를 다시 세우게 하라 하였었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되세워진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동해척주비이다. 척주비는 해일을 물리쳤다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불리고, 물과 불로 인한 재앙을 막는 신이함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 삼척의 여러 기관과 음식점, 가정집에 도자기나 족자 등의 형태로 그 비문의 탁본이 회람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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