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백범 김구선생 기사 (5-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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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6-13 22:51 조회1,930회 댓글0건본문
최근의 백범 김구선생 기사 (5-6월)
최근의 백범 김구선생 관련기사를 모아 보았습니다. 백범 관련 부분만 발췌하여 요약하였습니다.
지난 5월 23일 오후 ㈜서울옥션 주최로 열린 ’제54회문방사우와 문인화 경매’에서 백범 ●김구의 ’애국혈성(愛國血誠)’은 1천400만원에 낙찰됐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조선일보/문화)
▣ 안중근 의사 글씨 서예경매 최고가…2억1870만원 (2002.05.24)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순국 한달 전에 쓴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寧靜致遠)’이 23일 오후 ㈜서울옥션 주최로 열린 ’제54회문방사우와 문인화 경매’에서 2억1천870만원에 낙찰돼 서예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1910년 2월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쓴 이 행서종액은 ’욕심없고 마음이 깨끗해야 뜻을 밝게 가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포부를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유묵의 왼편 하단부에는 안 의사의 장인(掌印ㆍ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백범 ●김구의 ’애국혈성(愛國血誠)’은 1천400만원에 낙찰됐으며 추정가 1천300만원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론통일 총력안보(國論統一總力安保)’는 경매 직전출품이 취소됐다.
이날 경매에서는 또 18세기 도자기 항아리 작품인 ’청화백자파초국화분재문호’가 5억1천만원에 팔려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두번째 고가 기록을 세웠다. 최고가작품은 겸재 정선의 회화 ’노송영지(老松靈芝)’이며 세번째 작품은 박수근의 그림 ’아기 업은 소녀’이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조선일보/문화)
▣[문화] 장철 광복회장 “손자까지 유공자 권리 승계를” (2002.06.03)
신임 장철(張鐵·80) 광복회장은 이웃집 할아버지같은 부드러운 인상이다. 해방 직전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일원으로 주요 시설 파괴, 민심 동태 파악 등의 임무를 띤 첩보원으로 훈련받았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장 회장은 열여덟살 때인 1939년 중국 시안의 임정 산하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했다. 시안의 중앙군관학교를 졸업, 소위로 임관해 OSS 특수훈련을 받고 광복군 산하 국내정진군에 편입돼 출병을 기다리다가 광복을 맞았다.
―해방 전후에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시안(西安)에서 국내 진공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8월7일엔가 송별회도 열렸지요. 충칭(重慶)에서 ●김구 주석이 올라왔고, 지청천 광복군 사령관도 참석했습니다. 죽으러 가는 길이었지만,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8·15 직후 베이징에서 석달간 광복군 제2지대 군경연합대장 직함을 갖고, 교포들을 도왔습니다. 일본에 협력한 혐의로 중국인에게 잡혀간 교포들을 80여명 가까이 석방시켰어요. 악질 친일파도 있지만, 어쩔수 없이 협력한 사람도 많은데, 중국 사람들에게 고초를 치르게 할 순 없었어요. 그해 11월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습니다.”
(월간조선)
▣ [집중 인터뷰] 韓日 막후 怪物 崔書勉의 現代史 秘話 (2002.06.07)
崔書勉 약력
1926년 강원 原州 출생. 연희전문 文科 수료, 충남大 대학원 문학박사, 단국大 명예문학 박사. 大東新聞 기자, 고아원 「聖방지거의 집」 원장, 서울천주교총무원 사무국장, 日本 아세아大 교수, 日本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 安重根 의사 숭모회 이사, 全國아리랑보존연합회 초대회장 역임. 現 국제한국연구원장, 한국몽골친선협회 회장, 韓日포럼 자문위원. 저서:「安重根 사료」, 「7년전쟁(임진, 정유왜란)」, 「몽골기행」, 「새로 쓴 安重根 의사」 등.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gomsi@chosun.com)
카이젤 수염의 怪物
국제한국연구원장 崔書勉(최서면·76) 박사는 安重根 의사와 獨島에 관한 연구를 비롯, 韓日關係史에 관한 많은 자료를 발굴해 연구해 왔다. 崔씨는 1926년 강원도 原州에서 태어나 연희전문 文科를 수료했다. 한동안 言論界에 몸담았으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57년 渡日, 1969년 東京 한국연구원을 설립한 그는 1988년까지 30여년 간 近代 韓日관계 자료를 수집, 연구해 왔다. 그는 1988년 귀국해 서울 江南區 역삼동에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安重根 評傳」과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국제한국연구원은 韓國學 관련 연구기관 중 드물게 희귀자료 20만여 점을 체계 있게 보관하고 있다. 특히 日帝 朝鮮總督府 시대의 문헌이나 安重根 의사 관련 자료, 서양인이 제작한 한국지도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1974년 東京 간다(神田)의 古書店에서 발굴해 낸 安重根 의사의 옥중 수기 「安應七 自敍傳」을 포함한 이 자료들은 崔씨가 日本에서 19년간 한국연구원을 운영하면서 축적한 것이다.
그는 安重根 의사를 日本人들에게 새로이 인식시켜 1969년 현역 대학교수와 언론사 논설위원들을 중심으로 「국제 안중근 연구회」를 결성하게 했다고 한다. 舊韓末 개화파의 주역인 金玉均을 연구하는 「金玉均 연구회」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壬辰倭亂 때 日本에 끌려간 聖女 「오타 줄리아」 자료를 스페인 선교사 문헌에서 발견해 낸 것도 성과 중 하나다. 해마다 5월 두 번째 주일이면 고즈시마(神津島) 섬에서 韓日 가톨릭 신자들이 참여해 「줄리아祭」를 지내고 있다.
명성황후, 閔妃 시해사건에 관한 진상을 日本의 저명 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에게 알려 「閔妃暗殺(민비암살)」이란 책이 나오게 한 것도 그다. 1969년에는 일본 야스쿠니(靖國) 神社에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방의 의병활약상을 기록한 「北關大捷碑(북관대첩비)」를 발견하기도 했다.
탁본된 北關大捷碑는 의병장 崔配天(최배천) 장군의 후손인 崔玉子(최옥자ㆍ83) 세종大 설립자의 주선으로 4월29일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강릉 최씨 사당인 篁山祠(황산사)에 그 模拓(모탁)이 모셔졌다. 한몽친선협회 회장이기도 한 崔씨는 몽골을 20여 차례 다녀오면서 몽골 관련 자료와 수백 점에 달하는 古地圖를 모았다.
지난 4월6일 서울 강남 르네상스호텔에서 만난 카이젤 수염의 崔書勉씨는 청재킷 차림이었다.
日本에서는 그의 이름 앞에 꼭 「韓日외교의 怪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고 한다. 그는 광복 직후의 격동기에 左右를 넘나들며 ●金九(●김구), 張勉(장면) 등 當代의 거물들과 交分을 가졌다. 日本에서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ㆍ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前 日本 수상 등과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前 外相 같은 當代의 내로라 하는 정객들과 사귀었다. 韓日關係에서 그의 역할을 가리켜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前 주한 일본대사는 生前(생전), 「사케테 토오레나이 미치(さけてとおれないみちㆍ돌아서 갈 수 없는 길-日本 측의 입장에서 보면 崔씨를 통하지 않고는 한국과의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했다.
崔書勉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과 「日本」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알아야 한다. 「가톨릭」이 그와 盧基南(노기남) 대주교, 張勉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면 「日本」은 자유당 때 日本으로 亡命하면서 韓國學 전문가가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崔書勉씨의 본명은 崔重夏(최중하). 연희전문 文科 학생이던 그는 ●金九를 중심으로 한 上海 임시정부 출신들이 만든 韓獨黨 산하 대한학생연맹(약칭 대한학련)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李始榮(이시영) 선생의 권유로 18세의 나이에 大東新聞에 입사해 기자로 일한다.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 가운데 新亞日報를 창간한 張基鳳(장기봉)씨와 權五哲(권오철) 前 동아일보 사회부장 등이 있다.
그는 ●金九의 개인 심부름을 주로 했다. 白凡이 庸齋(용재) 白樂濬(백낙준) 연희전문 학장에게 전하는 편지도 그의 손을 통했다. 崔書勉씨는 白凡과 庸齋가 자신을 『학생이 아니라 마치 해방 전부터 독립운동을 한 동지처럼 대우했다』고 회고했다.
―白凡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대한학련의 기본 입장은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해 정부를 유지한 분들이 정치를 해주셔야 올바른 建國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金九 선생을 지지하고 따랐어요. 학생운동은 爲堂 鄭寅普(정인보) 선생이 학생의 본분을 지키면서 하라는 말씀도 있어서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다가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金九 선생을 뵐 기회가 많았고요』
―●金九 선생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한번은 ●金九 선생이 몸이 편찮으셔서 서울 용산 원효로 聖心高女(현 성심여고) 자리에 있는 성모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어요. 가톨릭 신자 전용의 조용한 병원인데 그곳으로 절 부르셔서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주셨어요』
崔書勉씨는 당시 ●金九 선생이 들려준 것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했다.
<내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국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해방 전인 1943년경 미국에 있는 학자와 영국 사람들이 앞으로 전쟁이 끝나면 朝鮮을 신탁통치하자는 사전논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카이로회담 직전, 重慶에서 중국의 蔣介石(장개석) 총통이 날 불러 『카이로에 가면 朝鮮 문제가 나온다. 그때 英國과 美國을 상대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냐』고 물었다.
『만일 蔣介石 총통께서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하면 나는 어디로 또 亡命을 해야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조선의 즉각적인 자주독립이지 妥協(타협)이 아닙니다』라고 나는 蔣총통에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蔣介石 총통이 나를 『간디를 뛰어넘는 지도자』라고 했다. 결국 카이로에서 蔣介石 총통의 제안으로 「朝鮮을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시킨다」는 것으로 결정했다>
崔書勉씨는 당시 어린 자신에게 ●金九 선생이 신탁통치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 준 것에 대해 『당신의 확고한 정치철학을 젊은이들에게 남겨 주시려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면서 『당시 귀국한 ●金九 선생에게 이 나라를 통치해 달라고 맡기지 못하는 이 民族은 얼마나 슬픈 민족인가 하는 게 내 학생운동의 출발이었다』고 말했다.
崔씨는 ●金九 선생이 生前에 언급한 친일파 처리방법을 소개했다.
『어느 신문사 사장이 ●金九 선생에게 「선생님께서 빨리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혼란하다」고 했답니다. ●金九 선생은 「日本이 바로 이웃에 사는데 親日派는 많을수록 좋다. 없다면 만들어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말하는 것은 「反민족적」 親日派를 처단하라고 한 것이지, 언제 단순히 親日派를 처단하라고 했느냐. 내가 中國에서 왔다고 親中派를 무조건 좋아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親中派도 아편장사 등을 하는 反민족적 親中派는 처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崔씨는 『거짓 없는 자서전을 쓸 수 있다면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루소나 오거스틴처럼 그 안에 자기 罪를 고백하고 있는 것은 드물다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 ●金九는 부끄러움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白凡逸志」라는 역사적 참회록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金九 선생이 위대한 분임에는 틀림없지만 李承晩의 단독정부 수립을 대체할 만한 현실적인 代案을 제시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정치는 현실인데 실현 가능한 代案을 제시하지 못했고, 남북협상도 추진하다가 실패했단 말입니다. 국가 지도자로서는 李承晩에 비해 부족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金九 선생을 행정가적인 정치인으로 보면 안 되겠지요. 민족 독립운동 시기의 정치인은 교훈적 독립운동가여야 합니다. ●金九 선생을 평가할 적에는 교훈적 독립운동가 ●金九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간디를 민족 독립운동에 있어서 훌륭한 사람으로 봐야지, 네루 시대의 정치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李承晩 대통령을 보는 視角이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습니까.
10년이 지나니까 강산도 변하더군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아계실 때 함께 李承晩 대통령 墓에 참배도 했어요. 우리는 과거를 규탄할 줄은 알지만 미래를 그리는, 역사적 로맨스를 만드는 데는 부족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서 ●金九 선생 아들 金信(김신)씨, 金性洙 선생 아들 金相万(김상만) 동아일보 前 회장, 李承晩 대통령 아들 李仁秀씨 등 세 사람을 초대, 식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때 金大中 대통령과 사상문제로 토론한 적은 없었습니까.
『보통사람보다는 「참신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까요. 내가 놀란 게 대학엘 다녀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讀書量(독서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말하는 게 논리적이고. 바꿔 말하면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거라. 그가 통일을 ●金九에게 제대로 배우고 민주주의를 張勉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오늘의 실패는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대통령이 된 이후에 金大中 대통령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단독으로 만난 일은 없고, ●金九 선생 출판기념회에서 만났어요.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까 人波(인파)를 헤치고 와서 악수한 게 마지막입니다』
安昌浩 선생은 尹奉吉 의사의 폭탄 투척을 예고한 ●金九 선생의 피신 전갈을 받고도 당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李裕弼(이유필)의 아들과 생일 케이크를 자르기로 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피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김항용 -
▣ 김태서 -
▣ 김윤만 - 새로운 이야기 잘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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