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자리한 장기읍성은 이 고장의 진산인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일제의 잔혹함은 이 읍성에도 밀려 들어와서 성안의 모든 관아등 시설이 파괴되고 단지 향교만이 이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을 뿐, 잡초에 묻힌 성벽은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다. 이 읍성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들과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이 그 특성 이라 하겠다. 동해안의 중요 진성을 들면 울산의 처용암지방, 울주군 강동면 정자리지방 양남의 수념지방, 감포, 이곳 장기.포항.영일지방.흥해.칠포지방들인데 이들 지역은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고 삼국시대에는 서라벌을 침공하는 왜구를 방어한 군사기지였고, 고려, 조선시대 에도 같은 역할을 다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은 이들 지역과 경주사이에는 산성들이 있는데 가령 관문성 속칭 만리성은 울산.울주.양남지역 , 양북면의 팔조리산성은 감포지방. 시령산성은 장기지방, 북형산성은 포항. 흥해지방의 후방방어의 군사거점이였다고 할 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본다. 더우기 시령산성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경주시 양북면의 경계지점인데 경주에서 옛길을 따르면 감포길을 가다가 추령(관해동재)에서 부처재를 거쳐 기림사 계곡을 건너면 감재에 이른다. 이곳에 산성이 있고 장기와의 거리는 불과 5 ~ 6km 밖에 되지 않는 직행길로 80 ~ 90리 정도이다. 이 길은 경주에서 동북방향으로 포항과 감포의 중간지점이된다. 이러한 지리적 형국 은 장기지방이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장기는 역대에 걸쳐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곳 장기의 신라시대 행정구역은 양주 의창군에 속한 지답현이었다.양주는 윈래 삽량으로 지금의 양산이고 그 관할구역은 낙동강 하류지방과 동해 남부지방이다. 의창군은 본래 퇴화군 인데 경덕왕대에 의창이라 개명되고 고려시대에는 흥해군이라 하였다. 의창군은 여섯 현으로 이루어지고 그 관할지역은 지금의 포항시에 안강읍지방이 포함된 것이다. 육현중의 지답현은 경덕왕대에 기립현으로 개명되고 고려조에는 장기현으로 불리웠다. 현종 2년 (1011) 는 동해 안의 청하, 흥해, 영일, 울주 등과 같이 성을 쌓았고 경주부 속현으로 공양왕대에는 감무를 두었다. 이때의 축성은 북방의 계원세력과 왜구에 대비한 것으로 장기읍성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수령의 위계를 사품이상으로 높여 무신으로 고관을 임명하여 지현사라 하였다가 세조 5년(1460)에는 독진으로 되었다가 동왕 12년(1467)에 독진을 파하였다.뒤에 현감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를 두었다. 축성의 기록을 살려보면 단종 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의 둘레가 174보이고 성 안에 우물 두 곳이 있다. 예종1년(1469)에 지은 경상도속선지리지에는 세종 21년(1439)에 둘로 쌓고 둘레가 3,664척이고 높이는 12척이며 샘이 두곳이고 못이 두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창도 있다. 중종 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을 하고 둘레가 2,980척이고 높이는 10척으로 우물이 네곳이고 못이 두 곳이다. 구읍성이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척이고 높이는 12척이고 샘이 두 곳 있다. 이상의 4가지 기록에서 성의 규모를 보면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을 여 러대에 걸쳐 중축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최소한 두 개이상의 성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 특히 4의 구읍성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 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분명히 고려시대 이전의 고성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선조말기 인 고종 23년(1895)에는 장기군 으로 바뀌고 감포, 양남, 양북면을 흡수하고 군수, 좌수와 별감 2인의 관원을 두었다. 이때의 읍성의 군병(병력은 훈련도감포수 74인, 어영정군 26인등 총 2,889인 이었고, 이에 걸맞는 장비도 보인다. 특히 수군 420인이 있는 것을 보아 수륙군을 군수가 지휘 하였다. 이후 일제하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감포읍, 양남면, 양북면이 경주군에 귀속되고 창주면과 서면을 합하여 봉산면으로 개명되고 현내면을 장기면으로 고쳐 영일군에 편입 되었다가 1934년에는 일제에 의해 봉산면과 장기면을 합하여 지행면으로 바뀌어 면으로 격하되고 치소도 성 아래 마을인 하성마을로 옮겨졌으며, 1990년 12월 1일자로 지행면 이 장기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읍성은 쇠퇴하여 잡초가 우거진 고성지로 허물어진 성벽만 잠자고 있다. 한편 이곳은 벽지로 인정되어 귀양지로도 되었으니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과 실학파의 태두인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세워져 이 고장은 글을 읽는 마을이 되었으며, 이 고장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특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 하였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