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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동지방의 안동김씨 혼맥(1)광산김씨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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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11-19 12:52 조회1,6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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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재

▶16세 김광재(金光載)

16세 김광재(金光載)(문정공파/문간공) (1294~1363(恭愍王 癸卯三月十四日甲寅卒) 70歲)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자여(子與), 호는 송당(松堂),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313년(충선왕 5)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고 충혜왕(忠惠王) 1330년에 원나라에 갈 때 모시어 호종(扈從)한 공으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조적의 난이 평정된 뒤 원나라에 잡혀가는 왕과 함께 갔다 와 군부총랑(軍部摠郎)․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으나 간신들의 모략으로 파직당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 지신사(知申事), 판도판서(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 제조전선(提調銓選) 등을 역임, 지사사(知司事)가 되었다. 1348년(충정왕 2)에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 때에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을 총괄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전리판서(典理判書) 및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겸직했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12년간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여묘(廬墓)에서 상(喪)을 마치니 왕명에 의해 효행으로 정려(旌閭)을 받았고 그가 사는 곳이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로 칭송받고 알려지게 되었다.이경섭, 김광재(金光載)의 후계는 제주(濟州)를 세거의 터로 삼았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見高麗史)

配는 안동김씨(安東金氏) 父 평장사양간공(平章事良簡公) 승택(承澤), 祖 전리판서(典理判書) 선(?), 曾祖 도원수(都元帥)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 外祖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경주 김혼(金琿) (依氏族源流)


문간공(文簡公) 묘지명(墓地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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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신사(辛巳)(1341년) 내 나이 14세로 성균시에 달려가 정중(庭中)에 계신 선생님을 바라보니 도포(道袍)를 입고 홀기(笏記)를 갖추어 단정하게 앉아 계시니 그 엄연한 모습은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아서 뭇 선비들이 기운을 감추고 감히 떠들지 못하였다. 이미 문생이 되어 왕래하면서 가르침을 들은즉 말씀이 온화하고 얼굴빛이 부드러웠으며 국전(國典)을 추명(推明)하여 인재를 권장함에 성실하기 그지없고 개연히 풍속이 날로 퇴폐함을 한탄하면서 집에 계실때도 생산을 돌보지 않고 좌우에 금서(琴書)로 담박하게 지내면서 동쪽 언덕엔 소나무를 심고 남쪽 못에는 연을 가꾸었으며 매년 모란꽃이 피면 주식을 갖추어 문생을 불러서 잔치를 베풀고 곁들여 대부인의 수(壽)를 올릴제 형제와 자질(子姪)들이 기뻐하고 화락하여 효제(孝悌)의 지극함이 신명(神明)에 통함으로 대부인께서 91세의 수(壽)를 누리셨으니 아! 성스럽도다. 병신(丙申)(1356년) 3월에 대부인께서 병으로 졸하시니 황고(皇考)이신 문정공의 무덤 곁에 장례를 치르고 그 곁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선생님께서는 본래 병으로써 행보하기가 어려웠으나 조석으로 전(奠)을 올릴제 물뿌리고 쓸기를 반드시 친히 하시고 조금도 게을리 아니하셨다. 국속(國俗)에 부모의 분묘(墳墓)를 보살피는데 허다히 노비로써 대신하고 그 몸을 회복하였으되 선생님께서는 차마 어버이를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몸소 행하셨으니 대개 근세(近世)에 재상들의 있지 아니한 일이다. 선생님의 성은 김씨이고 휘(諱)는 광재(光載)이시며 자(字)는 자여(子輿)요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니 광산인으로 사공(司空) 김길(金佶)의 후손이시다. 사공이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고 그 예손(裔孫)에 휘(諱) 광세(光世)는 중랑장이요 중랑장의 아들 휘(諱)는 경량(鏡亮)이니 대장군이요 대장군의 아들은 감찰어사 휘(諱) 수(須)이시다. 원나라 초에 삼별초들이 내부(內附)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배반하여 해도(海島)로 들어가니 영광부사이신 휘(諱) 수(須)께서 왕명으로 반적(叛賊)들을 토벌하였다. 공께서 시강학사 고공(高公) 휘(諱) 영중(瑩中)의 손이며 예빈경 정(?)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니 수(壽)는 102세에 이르렀다. 고씨께서 꿈에 밝은 별이 품안으로 들어옴을 본 뒤에 쾌헌(快軒)선생을 낳으시니 휘(諱)는 태현(台鉉)이요 자(字)는 불기(不器)이니 당세의 원로로써 나라의 시구정승(蓍龜政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일찍이 국초 이래의 명문장(名文章)을 모아 이름을 해동문감(海東文鑑)이라 명하여 세상에 전하였으며 성균시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얻은 선비들중에 들어난 사람이 많았는데 이행계, 안근재, 최굴옹들은 더욱 걸출한 인물이었다.


 선취(先娶)는 행수랑장(行首郞將) 김의(金儀)의 따님으로 1남을 낳으니 광식(光軾)인데 벼슬은 총부의랑 대사성에 이르렀고 계실(繼室)은 태조의 아들 이은(李隱)의 후손인 시랑(侍郞) 정단(丁旦)의 따님인데 3남2녀를 낳으니 장(長)에 광철(光轍)은 문과하여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고 차(次)는 선생이요 차(次)에 광로(光輅) 또한 문과하다. 녀(女)에 장(長)은 정당문학 안목(安牧)에게 출가하고 차(次)는 밀양군 박윤문에게 출가하다. 공의 곤계(昆季) 3인이 모두 등과하였으므로 대부인께서 늠록(?祿)을 받아 살으시면서 세상을 마치셨다. 박씨의 아들 4인과 안씨의 손자 3인이 이미 등과하니 시인(時人)들이 부러워하였다. 공이 지원(至元) 갑오(甲午) 정월 갑자일에 태어나니 났을때부터 이미 장신이 2척여가 되어 부모들이 기이하게 여기여 특히 사랑하였다. 성년이 된 뒤에 황경(皇慶) 계축과(癸丑科)에 등제하니 좌주(座主)인 일재(一齋)선생 권(權)정승이 그 지예(知禮)함을 사랑하여 후대하고 성균학관으로 보직하다. 지순(至順) 경오(庚午)에 충혜왕을 따라 경사(京師)에 갔던 공로(功勞)로써 사복사승을 제수하고 도관정랑으로 옮겼다가 그 후 지원(至元) 기묘(己卯)에 충혜왕이 조적에게 거의 패(敗)한바 되었다가 다행히 이기었으나 그 잔당이 아직도 적도(賊徒)의 세(勢)에 많이 따랐으되 장차 반드시 되돌아오리라. 왕이 경사(京師)에 가게 됨에 공이 이르기를 『우리 군왕이 위태로운데 내가 차마 어찌 홀로 면(免)하리요』하고 따라가서 천자(天子)의 성명(聖明)으로 복작(復爵)하고 환국(還國)하였으니 경진(庚辰) 가을 7월이라 군부총랑(軍簿摠郞)과 참전선사(參銓選事)를 지내고 전임(轉任)하여 성균제주, 삼사좌윤, 판전교사사와 관직지제교를 모두 겸임하다가 이듬해 가을에 성균시(成均試)를 맡아 밀직사사인 성사달등 99인을 취하니 당시에 선비들을 잘 얻었다고 칭송하였다.

충혜왕이 본래 공의 엄정함을 꺼리었고 또한 좌우들도 많이 꺼렸으나 돌이켜보건데 자구(藉口)할바가 없어 이르기를 김공은 벼슬이 자꾸 높아짐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왕이 그 말을 듣고 직(職)을 교체(交遞)하니 군소배들이 더욱 설치였다. 계미(癸未)년 겨울에 악양(岳陽)의 화(禍)가 일어나고 갑신(甲申)에 충목왕이 등극하여 공을 좌부대언으로 기용하였다가 지신사로 옮기니 용사(用事)한 대신들이 그들에게 따르지 아니함을 미워하여 판도판서를 제수케 하였는데 상(上)이 뉘우치고 곧 밀직부사(密直副使) 제조전선사(提調銓選事)를 배수(拜受)케 하고 지사(知事)로 승차(陞差)시키다. 기축(己丑)에 충정왕이 등극하여 서정(書?)을 열제 공으로써 스승을 삼으려 하니 공이 굳이 사양하고 들어와 첨의평리 광정대부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고 인하여 제조전선사로써 곧바로 삼사좌사로 옮기니 사람들이 왕에게 고하기를 문선(文選)은 이조(吏曹)에서 맡고 무선(武選)은 병조(兵曹)에서 맡는 것인데 정방(正房)에서 총괄하는 것은 권신(權臣)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영전(令典)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신들의 말을 듣고 옛 그대로 하시면 편리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듣고 공을 명하여 전리판서를 겸하게 하였다. 신묘(辛卯)년 겨울 10월에 현릉(玄陵:공민왕)이 위(位)에 오르니 공이 문을 닫고 나가지 아니하고 대부인을 봉양하면서 예(禮)를 다하니 금상(琴祥) 시중과 홍양파 선생이 당시의 명경(名卿)과 함께 공을 찾아가 노고를 위로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나이 63세에 비로소 여기에 거처하면서 생각하기를 지난날의 영광이 아침이슬과 같이 사라질까를 두려워하였는데 다행히 오늘에 이르는 것은 고비(考?)의 덕이었다 라고 말을 마치면서 눈물을 흘리니 제공(諸公)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탄복하였다. 제공들이 돌아간 뒤에 당(堂)의 북쪽 방에 판위(版位)를 모시고 매양 제향(祭享)때마다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오래된 병으로써 문밖에 나가지 못하니 현릉(玄陵:공민왕)께서 그 풍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이르시기를 공을 만나려고 한지 오래인데 과인(寡人)이 만나자는 뜻을 전해 듣고 공이 황공(惶恐)하여 자질(子姪)들의 부액(扶腋)으로 들어가니 상(上)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이와 얼굴이 심히 쇠하지 아니하였는데 병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탄석(歎惜)한지 오래였음을 말하고 유사(有司)를 명하여 사는 곳에 정표(旌表)하기를 영창방(靈昌坊) 효자리(孝子里)라 하고 그 마을의 약 천호(千戶)에 조세나 부역등을 면제시키고 봉사(奉事)를 돕게 하였다. 신축(辛丑)년 겨울 11월에 홍건적의 난을 피하며 고창현에 머물러 살았고 계축(癸丑)년 봄 3월 어느날 병을 얻어 누웠음에 조금도 안색이 변함이 없었고 14일 늦으막에 아내에게 이르기를 이제 내 나이가 70이니 죽은들 어찌 한이 있으랴. 남자는 부인의 손에 운명(殞命)하지 아니함이 예(禮)이니 중비(衆碑)와 함께 물러가라 하시고 또 경계하기를 큰소리로 소란을 피워 나를 놀라게 하지 말라 하시고 잠시 후에 운명하시니 평일의 소양한 바를 가히 알지로다. 자질(子姪)들이 관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갑자(甲子)일에 덕수(德水:지금의 풍덕) 선영하에 안장하였다. 공께서 문하평장사요 시호 문간(文簡)이신 김공 휘(諱) 승택(承澤)의 여(女)를 취하여 3남1녀를 두었으니 장(長)에 흥조(興祖)는 척당(倜?)하며 관(官)은 중현대부 군자감으로 수원 해주를 다스린 정적(政績)이 많았는데 취성(鷲城:신돈)의 손에 죽었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석(哀惜)하게 여기고 있다. 차(次)에 순조(順祖)는 관(官)이 병사요 계(季)에 윤조(胤祖)는 예부의랑을 지냈다. 여(女)는 봉선대부 내부부령 박문수에게 출가하였으니 신라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요 손남녀(孫男女)는 약간인(若干人)이라. 군기감은 감찰대부 신중전의 여(女)를 취하여 1녀를 생하니 내부랑장 송의번에게 출가하여 2남을 낳다. 장(長)에 산(散)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뜻이 고상하여 전 봉선대부 좌우위보승호군이요 차(次)에 이포(李苞)는 진사로 전의록사이고 외증손 약간인(若干人)은 모두 어리다.

호군(護軍)이 공의 행장(行狀)으로써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명(銘)을 청(請)하면서 이르기를 자내가 마땅히 명(銘)을 찬술(撰述)하여야 한다 하거늘 이에 받아서 편차(編次)하노니 오호라 선생의 덕행과 정사가 이처럼 표표(表表)히 밝으니 마땅히 자손이 많을터인데 군자감이 후(後)가 없으니 이는 하늘이 정(定)하지 아니함인가. 이는 하늘의 호악(好惡)가 사람과 더불어 같지 않음이라. 아! 슬프도다. 다행히 박씨가 살아있고 선비들이 뜻을 모아 사책(史冊)에 그 외대부(外大夫)를 나타내어 명성(名聲)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박씨들은 힘쓸지어다. 명(銘)에 이르노니


 오직 동쪽 언덕에 창연(蒼然)한 소나무가 있으니 군자의 집이요 연못물 가득하고 그 향기 맑으니 군자의 덕이로다. 나와서 임금을 섬김에 정(政)이 밝고 문(文)이 있어 우리 국왕을 바르게 하셨으며 들어서 어버이를 섬김에 더욱 늙도록 더욱 참다워서 우리 민속(民俗)을 감화시켰도다. 선생의 유풍(遺風)이 해동(海東)에 힘입어 영세토록 모범이 되었도다. 내가 이 명(銘)을 지은 것은 사사(私私)가 아니라 선생의 사필(史筆)이 바름이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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