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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동지방의 안동김씨 혼맥(3)의성김씨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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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11-20 17:26 조회2,4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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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종가-윤천근]에서 발췌

 

내앞 의성김씨 청계공 종가    윤천근


* 내앞을 가다


"안동의 대 문벌을 이야기 할 때 안동사람들은 하회와 내앞을 비교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류청청이요, 천김쟁쟁'이라고 하지요."

내앞의 청계공 종가에서 만난 김명균씨의 말이다. 종가에는 종손은 없었다. 우리가 만난 김명균씨는 종손의 동생이다.


"형님은 포항공대 가속기연구실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계시지요."

내앞 청계공 종가의 현 종손은 김창균씨이다.

"자는 회성, 계사년 1953년 생."

≪의성김씨 청계공 종파보≫의 기록이다.


종손 김창균씨는 직장 때문에 집을 비우고 있었고, 집은 창균씨의 아우 명균씨와, 명균씨의 아우 승균씨가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명균씨는 안동대학교 국문학과에 강사로 출강하는 중이고, 승균씨는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 두 사람도 공부와 강의 때문에 여기 혼자 머물고 있을 뿐, 살림을 종가에서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종가에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하여도, 실제로는 종가가 비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듯 싶었다.


깨끗한 용모의 김명균씨는 종가에 대한 넘치는 자부심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종손인 형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혹시라도 가문의 일이 잘못 활자화되면 큰일이라는 듯이, 세세하게 신경을 써서 설명해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류청청, 천김쟁쟁'! 나는 그 말을 비단 김명균씨에게서만 들은 것은 아니다. 전에도 두어 번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말은 다만 하회 유씨와 내앞 김씨가 그만큼 안동을 대표하는명문이고, 피차 경쟁적 관계를 갖추고 오래 살아온 역사를 갖는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김명균씨는 내게 그 말이 두 가문이 갖는 어떤 속성을 의미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불의와 타협 않는 가풍은 청계 선조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김명균씨는 '천김쟁쟁'의 '쟁쟁'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꼿꼿함'을 뜻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하류청청'의 '청청'은 무슨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웬지 그 의미를 김명균 씨에게 듣는 것은 적절치 않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그 점을 굳이 김명균씨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천김쟁쟁'이라는 말의 의미를 내앞 의성 김씨의 일원인 김명균씨에게 들었듯이 '하류청청'이라는 말의 의미도 하회의 풍산 유씨에 속하는 누군가에게 듣는 것이 적절할 것이리라는 생각은 내게는 아주 그럴듯해 보였다.


내앞의 의성 김씨! 처음 안동의 종가를 취재하고자 했을 때의 우리의 계획은 역사가 오랜 종가부터 취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앞의 의성 김씨는 일찌감치 취재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우리가 내앞의 의성김씨를 취재하기로 계획되었던 시기에 내앞의 종손은 타계하였다. 그러므로 취재가 미루어졌던 것인데, 이왕 미루어진 것이라면 종가 취재의 마지막에 다루는 것이 더 의미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이란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다. 그 중요성을 이 가문에 부여하여 주는 것은 순서가 무시되었다는 허물을 어느 정도는 상쇄해 줄 수 있을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앞의 의성 김씨는 그만큼 안동에서는 중요한 가문인 것이다.

"우리집에 처음이예요?"

김명균씨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물어왔을 때, 나는 마지막에 다루고자 했다는 변명거리를 마련하여 두었다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내앞! 임하댐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그 아래쪽의 조정지 댐에 의해 차단되어 수량 풍부하게 모여있고, 물가에 북쪽으로 면하여 펼쳐져 있는 들판의 한쪽 끝, 얕으막한 산의 남쪽 기슭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마을의 터전은 넓고, 마을의 호수는 많다. 마을은 임동 쪽으로 나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어진다. 중심은 서쪽에 있다. 서쪽에는 마을이 산 아래 쪽의 평탄면을 따라 넓게 펼쳐져 있고, 동쪽에는 산기슭을 따라가며 거의 일선으로 늘어서 있다.


종가는 서쪽 부분의 마을 속에 있고, 그 중에서도 서쪽 끝으로 자리잡고 있다. 종가의 동쪽으로 둘째 집의 종가가 위치하고 있고, 그 동쪽으로 여러 대소가가 터를 잡으며 마을을 확장시켜 낸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른바 보는 이의 입장에서 볼 때 좌측을 우선시 하였던 동양적인 방향관념이 마을 구성의 원칙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한다. 물론 종가가 분지의 서쪽 끝쯤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마을이 확장되어 나갈 수 있는 방향은 자연히 동쪽이었을 터이지만, 그러한 지정학적인 요인만이 마을 확장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것이었을까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종가의 입구 쪽에 이르렀을 때, 종가의 바깥마당으로는 막 여러명의 남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노년층에 속한 연배의 사람들이었는데, 종가의 바깥마당에서 잠시 지체하였으므로, 우리는 멀리서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종가의 바깥마당과 그 바깥쪽의 횡으로 뻗는 마을 길 사이에는 10여미터의 간격이 있었는데, 종가의 대문으로부터 일직선으로 상당한 넓이의 길이 뻗어나와 마을 길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종가는 아주 깊숙히 들어앉아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여러 명의 남자 노인들은 흰옷을 입은 사람과 작별하고 그 일직선의 길을 걸어서 마을 길 쪽으로 나왔다. 그들이 나온 다음에야 우리는 종가로 천천히 들어갔다. 우리가 종가에서 만난 것은 바로 그 흰옷을 입은 사람, 김명균씨였다.


* 의성 김씨의 역사…내앞 시대 이전


의성 김씨는 김석을 시조로 한다.

"의성군. 신라 대보공(김알지)의 29세 손. 경순왕의 네 번 째 아들. 경순왕은 고려에 나라를 양도. 고려 태자의 외손으로 의성을 봉지로 받음. 자손들은 이것을 본관으로 삼음."

≪의성김씨 청계공 종파보≫(이하 종파보)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따져 보면 명확하지가 않다. 시조 김석이 의성을 봉지로 받았다는 점은 분명한 시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성을 본관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김석으로부터인지, 아니면 후에 이르러 누군가가 김석 계열을 의성 김씨로 쓰게 된 것인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의성 김씨에게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성씨에게서 다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내가 보기에 의성을 본관으로 하고, 의성 김씨의 확실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5세(1992에 간행된 대동보에는 9세) 용비에 이르러서부터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조로부터 4세까지의 역사는 불분명하고,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다.

김석의 아들인 2세 일은 내사령, 평장사라는 간단한 기록만이 <<종파보>>에 보인다. 3세 홍술의 경우에는 몇 줄의 기록이 나타나나, 확실한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다. 여기 기록은 실제로 3세 홍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조로부터 3대의 역사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세는 공우(경자보 중 하나에는 홍술이 빠지고 국, 경진, 언미, 습광 등 4대가 있다고 하며, 만성보에는 공우 위에 4대를 첨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의성 김씨의 여러 족보들의 상계가 불분명함을 반영한다. 대동보는 아마도 이런 상계를 정리함에 있어서, 이본들에서 언급되는 세계를 다 포함시켜서 계통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종파보≫는 '착오가 두려워 세계 속에 편입시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는 구보인 ≪종파보≫를 바탕으로 하여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신보와는 4대의 차이가 남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이다. 금오위 별장을 지냈다.


5세 용비는 어느만큼 풍부한 기록을 갖추고 있다.

"고려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 의성군. 부인은 영동정 강 후주의 여식. 묘는 의성 오토산에 진 방향으로 있다. 읍인은 백성에게 큰 공덕을 베풀었으므로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지냈으니, 사당을 진민사라고 한다. …부여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고려 명종 시대에 정승이 되시고 추성보절공신으로 의성군을 봉작으로 받았다고 하였다."


≪종파보≫는 5세 용비로부터 제대로의 모습을 갖추어낸다. 부인과 묘지에 대한 기술도 나타나고, 형제와 자식들에 대한 기록, 사위에 대한 기록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때부터 가첩이든 무엇이든, 가문의 역사를 소략하게라도 담아내는 기록이 전해지기 시작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5세 김용비에게서 우리는 시조 김석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봉작, 의성군의 칭호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용비의 두 아우는 용필과 용주인데, 용주 계열은 개성 김씨가 되었다가 고종 시대에 다시 의성으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5세 김용비의 아들은 의이다.


"정헌대부 감문위 상호군이다. 아들 기지가 귀해짐으로 은청광록대부 병부상서 좌복야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진천 송씨이다. …묘는 고령군에 있다."

김의는 인지, 서지, 춘, 기지 등의 네 아들을 둔다. 내앞의 의성 김씨는 서지 계열에 속한다.

김의의 둘째 아들인 서지는 조현대부 내영고 소윤이며, 부인은 장사 유씨이다.


"감악산에 제사지내러 가시다가 장단진에서 파선하여 돌아오지 못하셨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29년 계묘년(1303년)에 흥안도호부사라는 기록이 보인다. 청렴하고 정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배도가 왕의 총희와 짜고 공을 모함하여 파직되었으나, 나중에 발각되어 일당이 주살됨으로써 분을 풀었고, 경상관찰사가되셨다."


《종파보》의 기록이다.

김서지는 인회, 태권 두 아들을 두었다. 내앞의 의성 김씨는 둘째, 태권 계열에 속한다.

"봉익대부 문예부 좌사윤이다. 공민왕 12년 계묘년(1363년) …김용의 변란에 해를 입으셨다. 부인은 안동 김씨로 판관 승고의 따님이고, 상락군 김방경의 증손이다. 후 부인은 죽산 박씨이니… 묘는 용인군에… 있다."


《종파보》의 김태권에 대한 기록이다.

김태권은 거두, 거익 두 아들을 두었다.

김거두는 내앞 계열 의성 김씨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이 사람에 의해서 안동으로의 입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봉익대부 공조전서이다. 고려말에 안동의 풍산현에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부인은 문화 유씨이고, …묘는 안동 남선면 … 에 있다."

김거두가 풍산으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은 외가가 풍산이었던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말에 상대 조상 두 어른이 개성에서 낙남하셨는데, 형님 되시는분은, 휘가 거자 두자인데, 영남으로 오셨고, 아우 되시는 분은, 휘가 거자 익자인데, 호남으로 내려가셨지요. 호남 내려간 분의 일파는 거의 부여 일대에 자리잡고 산다고 하는데, 종가가 유지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김명균씨의 말이다.

김거두의 아들은 천인데, 풍산에서 안동성 밖의 방적동으로 삶터를 옮기는 사람이다.

"공민왕 11년 임인년(1362년) 출생. 정략장군 진예도 도만호. 국운이 다하는 것을 한탄하며 안동성 밖으로 이주하여 마을 이름을 '방적'이라 하시니 '나라가 혁명됨에 내가 어찌 가서 귀의할 것인가(?)'라는 말의 뜻을 취한 것이다. … 묘는 안동 와룡면 … 에 있으며, 부인은 홍주 이씨이다."


《종파보》의 기록이다.

"지금의 안동시 율세동이다. … 방적동인데, 음이 간편화되어 밤자골로 된 것을 뜻을 취해서 (다시 한자로) 율세동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종파보》의 서문에서 타계하신 전 종손 김시우씨가 적어두고 있는 말이다.

김천은 영수, 영명 등 두 아들을 두었다. 내앞의 의성 김씨들은 영명 계열에 속한다.

《종파보》의 기술양식에 있어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김천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의성 김씨 세계 상 11세인 김영명으로부터 자를 기록하고 중국식 연호로 생졸년을 표시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아랫대로부터 호를 적는 문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김영명의 일생이 조선왕조의 창업 이후 시기에 놓여지는 것을 통하여 본다면, 이것은 조선왕조의 출범과 더불어 중국식 삶살기 방식이 보다 철저하게 추구되기 시작한 것과 관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이 때로부터 처를 부인이라고 표기하던 것을 바꾸어 배위로 표기하는 것도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어떤 문화를 반영하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자가 극배인데, 홍무 무인년(1398년)에 출생하여 천순 계미년(1463년)에 타계하였다. …조봉대부 신령현감을 지냈다. 묘는 안동시 운안동(에 있다.)"

김영명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삼취를 하였는데 배위는 광주 이씨, 광산 김씨이고, 안동 권씨이다. 김영명은 4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계, 한철, 한석, 한동이다.


김한계는 자가 형운이고, 호가 휴계이다.

"영락 갑오년(1414년)에 출생하여 천순 신사년(1461년)에 타계하였다. 선덕 을묘년(1435년) 진사이니 하위지와 동방이고, 정통 무오년(1438) 문과 출신이니 성삼문과 동방이다. 3사를 역임하고 통훈대부 집현전 승문원사를 지냈다. 세조가 정란을 일으킴에 병을 칭하고 귀향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김한계의 묘는 와룡에 있으며, 배위는 덕산 송씨이고, 후 배위는 순흥 안씨이다.

김한계의 아들은 만근, 만신, 만흠이다.

김만근은 자가 신경이고, 호가 망계이다. 그는 1446년에서 1500년 사이를 살았으며, 147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증손인 성일이 영달하여 귀하게 됨에 좌통례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해주 오씨이고, 묘는 임하에 있다. 그는 임하의 내앞에 처음 이주해 살기 시작한 사람이다.


김만근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인범, 예범, 지범이다.현재의 내앞 종가를 유지하고 있는 청계공 계열은 둘째, 예범에게 연결된다.

김예범은 자가 국헌이다. 1479년에 나서 1540년에 타계하였으며, 손자 성일이 영달하여 귀하게 되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영해 신씨이고, 묘는 천전, 즉 내앞에 있다.

김예범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청계공 김진이다.


* 의성 김씨의 역사…내앞 시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엄밀하게 말해서 의성 김씨의 내앞 시대는 13세 김만근 때 부터이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는 내앞의 대종가는 비록 김만근의 종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일지라도, 그의 둘째 아들이면서 청계공 김진의 아버지인 14세 김예범의 종가라고 지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인식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내앞의 대종가를 청계공 종가라고 하고, 김예범 계열의 의성 김씨들을 청계공파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종파보》에 적혀있듯이 청계공 김진이 '씨족 중흥의 큰 조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성 김씨의 내앞 시대는 청계공 김진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열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계공 김진은 누구인가?

"자가 형중이고, 호가 청계이다."

《종파보》의 기록이다.

"부친께서는 홍치 13년 경신년(1500년) 2월 초 3일 정해일에 출생하여 만력 8년 경신년(1580년)윤 4월 23일 신유일에 타계하셨고, 이 해 7월 29일 갑신일에 장례를 지냈으니 향년이 81세였다. 좌의정 여흥 민제의 5대 손인 병절교위 세경의 여식을 아내로 맞았는데, 부친보다 34년 앞서서 타계하셨다. …부친은 태어나면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용모가 출중하였다. 나의 증조부이신 진사공(김만근)께서 보시고는 기특하게 여겨 작을 소자를 가지고 문회를 열게 하면서'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중흥시킬 것이고, 그 식견으로 이름을 날릴 것이다'라 하셨다. 16살에 처음으로 큰고모부인 청도 권간 공을 스승으로 섬겨 시와 예를 배웠는데, 권공은 가문의 예법을 깊이 닦아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법도가 있었으며, 그 부추기고 인도하는 것이 효도하고 공경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부친께서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게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복종하여 힘써 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공부가 크게 진보하여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할 정도였다. 외조부께서 그 뜻과 행동을 살피시고 사위로 선택하셨다. 외조부의 아우님은 현량과를 거친 세정공이신데, 기묘년에 해침을 당한 이름높은 유학자셨다. 부군께서는 또 그 분을 따라 배우셨으니, 당세의 여러 군자들의 학문의 단서를 섭력하셨다고 하겠다. 이로써 견문이 날로 넓어졌고, 문예 역시 통달하게 되었다.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성균관에 유학하셨는데, 하서 김인후와 돈독한 우의를 다졌고, 당시의 명사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폐하고 부암(부암은 옛날 중국의 부설이 집을 지었던 땅인데, 임하에 혹 부암이라고 이름붙여진 곳이 있는지 모르겠다)에 집을 짓고 가문을 이끌고 살았으며, 조석으로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가서 문안을 드렸는데, 강을 건너 왕래하면서도 아무리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치더라도 그만두지 않았다. 혹시 타지에 갔다 오는 경우가 있더라도 돌아오면 반드시 먼저 부모가 계신 곳에 들른 연후에 물러나왔다.


항상 가세가 빈한하여 제대로 봉양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으며, 비록 콩물이나 나물죽이 있더라도 먼저 부모님께 보냈으며, 심부름하는 사람이 돌아와 '올렸습니다'라고 말하면 기뻐하셨다. 부암 곁에는 서당 한 칸을 지어서 자제들과 마을의 어둑한 선비들을 모았는데, 학령을 세우고 과정을 엄히 하였다."

학봉 김성일이 지은 김진의 <행장>속의 일절이다.

김성일에 의하면 김진은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중히 여겼으며, 무속을 극히 혐오하였다고 한다.


"일찌기 세상 사람들이 무속을 숭상하는 것을 싫어하여 집안에 모시는 것이 있으면 배척하여 마치 오물을 보듯이 하였다. 당시의 크고 작은 무당들은 부친의 이름을 들으면 두려움에 떨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부친이 사는 곳에는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신당이 현의 남산 높은 곳에 있었는데, 사람들 사이에 고려 염흥방이 그 신이라는 말이 전해져 왔다. 무당들은 그것에 의지하여 요사스러운 짓을 일삼아서 풍속을 해치는 것이 날로 심하여졌다. 하루는 부친이 그 죄를 조목조목 따져 말하였다. '너는 전 왕조의 커다란 간신으로 죽음으로도 죄를 다 씻지 못하여서 하늘과 땅이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신기는 이미 죽고 그 귀신은 이미 신령하지 않은데 어찌 높은 데 자리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리 백성들을 미혹시킨단 말인가?'(부친께서는) 즉시 신당을 파괴하게 하였다."


내앞의 의성 김씨들에게 있어서청계공 김진은 무엇보다도 가문의 살림살이를 번창하게 한 중흥조로 받아들여진다.

"성균관에서 공부하시다가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돌보아야 할 자제분들이 있어서, 급거 돌아오셔서 집안을 돌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김명균씨의 말이다.

"그래서 당시 영남 일대에서 최고수준의 부를 누리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청계공 김진이 경제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행장>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만년에 영해의 청기현에 가셨다가, 그 산골짝이 깊고 넓은 것이 마음에 들고, 밭 갈고 고기 잡는 즐거움이 있어서 집을 옮겨 살면서 항상 가노들에게 농사와 잠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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