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15.(논산군 : 부사공댁 세째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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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19 04:40 조회1,972회 댓글0건본문
부사공댁 셋째딸.
--충남 논산군 상월면 산성리는 안동김씨 충민공(김흠=金欽) 자손들의 세거지라
이곳에다 김흠의 단소를 설단하고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며 그 곁에 충민재를 건립
하였다는 본 홈피 제2207호/2002. 6. 3에 의거 논산군지를 통하여 또다른 기록을
살펴 보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또다른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논산군지를 살펴보던중 광산김씨 국광(國光), 겸광(謙光)의 금석문(신도
비)에서 문온공(九容)의 차자 부사공(明理)의 기록이 있어 두눈 동그랗게 뜨고 아
래와 같이 살펴 보았습니다.
1. 논산군지/논산군지편찬위원회/1994.
▣ 금석문(金石文)<신도비(神道碑)>(pp1616~1621)
✪김국광신도비(金國光神道碑)
--(전략)本朝爲大司憲激濁揚淸謇諤有憲臣體官至觀察使若采生諱問登第拜禮文檢閱
早歿問生諱鐵山平生醇謹自守不求名官官止司憲監察人皆曰檢閱父子有大德不大厥施
必委祉於後子孫其興乎監察卽公皇考也以功勳 贈純忠績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
大夫議政府領議政光城府院君皇妣金氏安東大姓成川府使諱明理之女永樂乙未五月
十二日戊申生(후략)
--(전략)본조위대사헌격탁양청건악유헌신체관지관찰사약채생휘문등제배예문검열
조몰문생휘철산평생순근자수불구명관관지사헌감찰인개왈검열부자유대덕불대궐시
필위지어후자손기흥호감찰즉공황고야이공훈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
대부의정부영의정광성부원군황비김씨안동대성성천부사휘명리지녀영락을미오월
십이일무신생(후략)
❋ 옮긴이 註 : 증 영의정 광성부원군(철산)의 부인 안동김씨는 성천부사 명리의
여식이다.
✪김겸광신도비(金謙光神道碑)
--(전략)公諱謙光子撝卿光山人也古祖諱鼎推誠補理功臣重大匡光城君重大匡生資憲
大夫忠淸道觀察使若采觀察使生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 世子貳師問贊成生 贈輸
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兼領觀象監事光城府院君鐵山府
院君娶成川大都護府使金明理之女貞敬大夫人生公於永樂十七年九月丁未其源遠乎
哉(후략)
--(전략)공휘겸광자위경광산인야고조휘정추성보리공신중대광광성군중대광생자헌
대부충청도관찰사약채관찰사생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 세자이사문찬성생 증수
충적덕병의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겸영관상감사광성부원군철산부
원군취성천대도호부사김명리지녀정경대부인생공어영락십칠년구월정미기원원호
재(후략)
❋ 옮긴이 註 : 증 영의정부사겸 관상감사 광성부원군 철산부원군은 성천대도호
부사김명리의 여식에게 장가를 들었다.
2. 안동김씨문온공파세보
✪1992년 임신보 권2.(pp1~8)
--문온공(구용) - 명선(明善). 명리(明理). 명윤(明允)
--명리(明理) - 맹헌(孟獻). 중서(仲舒). 계우(季友). 서(婿) 권훤(權烜). 남경복(南
景福). 김철산(金鐵山, 광산인 직장 자 국광 좌의정 겸광 좌찬성). 최선문(崔善
文)
✪부사공(副使公) 휘명리(諱明理) 묘비문(墓碑文). (1992년 임신보 권1. pp129)
--(전략) 생육(生育) 3남4녀하였으니 장(長)은 예문관직제학 휘맹헌(孟獻)이요, 차
(次)는 호조참의공 휘중서(仲舒)이며, 말(末)은 의정부사인공 휘계우(季友)이다.
--제1서(第1婿)는 직장 안동권공훤(烜)이요, 제2서는 좌군사직 의령남공경복(景
福)이며, 제3서는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광성부원군 광
산김공 철산(純忠績德秉義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 光城府院君 光山金
公 鐵山)이라, 말서(末婿)는 시(諡) 문혜공(文惠公) 화순인 최선문(崔善文)인 바
세종조에 사헌부지평하고 문종조에 공조판서에 승직하였는데 세조가 등극하여 좌
찬성에 소명하나 불사하였다.
✪조선국 봉정대부 성천도호부 부사겸 근농부사 안주 좌익병마단련부사 김공명리
묘지.(朝鮮國 奉正大夫 成川都護府 副使兼 勤農副使 安州左翼兵馬團鍊副使 金公
明理 墓誌)(1992년 임신보 권1. pp135)
--(전략)사첨시직장 광산인 김철산(金鐵山)은 생남4하니 생원 국광(國光, 此出 士
溪 金長生) 겸광(謙光) 우광(迂光) 경광(景光)이오 여2는 어리다. 국광의 부인은
호군 황보신(黃保身 ; 황희정승의 아들)의 딸로서 생남1여1하니 남은 뉴(忸)요, 딸
은 어리다.
3. 광산김씨공안공파보수권(光山金氏恭安公派譜首卷/1994) pp2~3
▣ 증영상 김철산(贈領相 金鐵山)은 신라국김씨왕자흥광(新羅國金氏王子興光)의
21세손이고 아들로 좌의정공 국광(國光), 공안공 겸광(謙光), 첨정공 정광(廷光),
판판공 경광(景光)이 있다.
4. 문온공파(文溫公派) 부사공(府使公) 명리(明理)의 외손(外孫)들.
▣ 김국광(金國光)(논산군지 pp1254)
---이조 예종 때의 명신,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시호는 정정(丁靖),
본관은 광주(光州)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철산(鐵山)의 아들. 성균관생으로
뽑혔을 때 영상 황희(領相 黃喜)가 한번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손녀로 처(妻)
를 삼아 주고 항상 이르기를 김생(金生)은 비범한 사람이라 하며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뒤라야 국광(國光)을 보았다. 1438년(세종 20) 사마시에, 1441년(세종 23)
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와 박사가 되었고 이어 의잉고부사를 거처 황해도 도
사를 지냈으며 1447년(세종 29)에 사헌부감찰로 과장(科場)의 시관(試官)이 되어
이양재(李梁材) 등을 뽑았다. 이듬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왔으며 이어 승문원교
리를 역임했다. 세조가 원종공신의 호를 내렸고 이어 부지승문원사에 승진하였다.
세조의 명으로 경국대전을 만들 때 법을 만들되 털끝만한 일이라도 자상하게 분
석하여 주대(奏對)함이 상감 뜻에 맞게 하니 그 때 상문국(詳文局)을 맡은 사람들
이 모두 훈현대신(勳賢大臣)이로되 상감이 편전(便殿)에서 홀로 국광(國光)만을
불러 일을 의논하고 말하되 “내가 국광에게서 배운 바가 많다.” 하였다. 얼마 후
승정원부승지에 발탁되어 통정대부 좌부승지를 거쳐 1461년(세조 7)에 병조참판
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마음껏 치적을 나타내려 하여 국광(國光)에게
군사일을 맡기니 그는 감축하고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계획이 정밀하니 세조가
칭찬하여 “국광(國光)같은 사람은 참으로 문무를 겸한 대재(大材)로다.”하고 총애
함이 날로 융성하고 일찍이 세조가 친찰(親札)로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글
자를 주어 칭찬하였다. 하루는 세조가 편전에서 수라를 국광(國光)에 나누어 주어
먹게 하고 날이 기울도록 얼굴을 가까이 대하여 일을 의논하면서 늙은 노관(老
官)에게 이르되 선왕조에서 군신(君臣) 사이에 이같이 잘 만난 이가 있었더냐 하
니 노관이 대답하되 “신이 네 조정을 섬겼으되 오늘같은 일은 보지 못하였습니
다.”라고 하였다. 1462년(세조 8)에 식과시(式科試)를 맡아 조번달 등을 뽑았고,
1464년(세조 10)에 호조판서로 승진하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이어 중추부사 정
헌대부를 거쳐 병조판서,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시
애(李施愛)의 란(亂)에 큰 공을 세워 그 훈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
功臣)의 호를 내리고 이어 숭록대부좌찬성(崇祿大夫左贊成)에 승진 했다. 1469년
(예종 1)에 대광보국숭록대부우의정겸영경연사(大匡輔國崇祿大夫右議政兼領經筵
事)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오고 1471년(성종
2)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말년
에 병이 위중하니 성종이 내의를 보내고 좋은 약을 보냈으나 효험이 없었다. 운
명하였다는 소식에 왕이 크게 슬퍼하며 불도지전(不挑之典)을 내렸다.
☞ 김국광(金國光) 사당(祠堂) : 의정공(議政公) 김국광 사당은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성종 13년(1482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사우(祠宇)는 14.8평이고 1합문
(閤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에는 종가 4대조를 포함 5위가 모셔져 있고, 해마
다 음력 11월 10일은 의정공, 10월 9일은 배위의 제향을 올리고 있다.
▣ 김겸광(金謙光)(논산군지 pp1266)
---이조 성종 때의 공신, 자는 위경(撝卿), 호는 서정(西亭), 본관은 광산, 시호는
공안(恭安), 좌의정 국광(左議政 國光)의 아우로 1454년(단종 1)에 문과에 급제하
였으며 성종 때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에 책봉되고 광성부원군(光
城府院君)에 봉하였다. 벼슬은 예조판서.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
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다.
☞ 김겸광(金謙光) 사당(祠堂) : 공안공(恭安公) 김겸광 사당은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본래는 부적면 안천리에 있었으나 탑정저수지 공사로 수몰하게 되어 1944
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사우(祠宇)는 6평, 종가(宗家)는 17평이며, 사
당(祠堂)에는 종가 4대조를 포함 5위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5월과 7월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 김경광(金景光)(논산군지 pp1280)
---이조 세종 때의 문신, 자는 군경(君卿), 본관은 광산으로 좌의정 국광(左議政
國光)의 아우로 1420년(세종 2)에 문과에 급제 통훈대부군기시겸교서판교(通訓大
夫軍器寺兼校書判校)를 역인하엿다.
▣ 김장생(金長生)(논산군지 pp1249)
---이조 중기의 학자,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본관
은 광산, 대사성 계휘(繼輝)의 아들로 처음에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에게 예학
을 배우고 뒤에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게 성리학을 배워 통달하여 문명이 높고
예학과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나라의 전례나 행사에 의문이 있으면 다 사계(沙
溪)에게 상의하였으며 인조가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追尊)할 때에도 역시
사계에게 물었다. 이 때 사계는 이에 반대하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왔
다. 사계의 예학은 다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에 전하여 서인을 중심한 기호
학파(畿湖學派)에서 크게 성했으며, 그 후 모든 의례의 규범이 되었다. 여러번 나
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형조참판에 임명
되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순박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
났다. 글을 일다가 깨닫는 바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적어 책을 지으니 모든 사람
이 덕행군자(德行君子)라 일컬어 추앙했다. 많은 문하생 가운데 김집(金集). 송준
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등 3인이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송시열(宋時烈). 최명
길(崔鳴吉) 등 9인의 재상(宰相)과 신흠(申欽). 장유(張維) 등 5인의 대제학(大提
學), 이시직(李時稷) 등 2인의 순절공신(殉節功臣)을 배출하였다. 저서로 『경서변
의(經書辨疑)』『근사록석의(近思錄釋意)』『의례문해(疑禮問解)』『서소잡록(書
疎雜錄)』『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이 있다. 연산의 둔암
서원(遯岩書院)에 주향(主享)하고 강경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외 여러 곳의 서원
에 배향되고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 김장생(金長生) 사당(祠堂)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사당은 고정리에 있는
데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고종 4년에 중수되었다. 사우(祠宇)는 9평, 종가(宗家)
17평, 염수재(念修齋) 13.5평, 문간채 19평, 아래채 14.4평으로 구성되고, 광산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위패는 종손가 4대를 포함 5위이고 해마다 음력 8월
2일에는 사계선생을, 음력 4월 24일에는 배위의 제향을 올리고 있다.
▣ 김집(金集)(논산군지 pp1249~1250)
---이조 효종 때의 학자,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諡)는 문경(文
敬) 본관은 광산으로 사계(沙溪) 장생(長生)의 아들 18세에 진사에 합격 재랑(齋
郞)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ddkqj지를 모시고 영산 향리로 돌
아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아버지가 다시 벼슬에 나서자 그도 부여현감을
거쳐 임파현령으로 있다가 퇴관.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수차의 임관을 사양하다
가 효종 즉위 후 이조판서 직을 세 번이나 상소로 사양했으나 허락지 않음에 감
격하여 출사하였다. 정사(政事)에 김자점(金自點)과 맞선 관계로 청나라와 대립
하여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상소(上疏)를 받았으나 효종의 총애로 별일 없었다. 의
정부 좌참찬 판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끝내 사퇴하였다. 학문이 깊어 우수한 제자
들을 많이 배출하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유고로 『전서(全書)』 문집 9권이 있다.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효종묘정(孝宗廟庭)에 배향되고 연산의 둔암서원(遯岩書
院)을 비롯 각 지방의 여러 서원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 김집(金集) 사당(祠堂) :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사당은 연산면 임리에 있
다. 인조 7년(1629)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오는데 사우(祠宇), 종가(宗家), 문간
채, 일각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에는 종손가 4대를 포함 5위를 모시고 있
으며, 광산김씨 문경공파 종중에서는 해마다 음력 5월 12일에는 신독재선생을, 12
월 8일에는 배위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5. 안동김씨와 광산김씨.
▣ 광산김씨.(pp1222~1223)
---광산김씨의 시조는 김흥광(金興光)으로 신라말 왕자로 태어났다. 고려가 삼한
을 통일하게 됨으로서 신라의 비운을 예견한 그는 무주(武州)의 서일동(西一洞)에
피난 은거함으로서 광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구보 세록(世錄) 편에는 김흥광이
헌강왕의 셋째 아들이라 하기도 하고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라고도 하였으나, 헌
강왕은 아들이 한분뿐이었고 신무왕의 아들이라 하는 점에도 후일의 확증이 요구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근래에 수보(修譜)된 여러 파보에는 그가 다만 신라의 왕
자라고 적고 있다.
---광산김씨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이다. 지금도 광금(光金) 특히 사
계(沙溪) 자손이라면 알아주는 집안으로 꼽고 있다. 광산김씨는 세도가 당당했던
집안이라기 보다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한 명문이다.
---조선 중기 예학(禮學)의 태두요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광산김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은 유
학의 입문이요 맺음이라 할 예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동국(東國) 18현
(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누렸다. 광김(光金)은 조선
에서만 상신(上臣) 5명, 대제학(大提學) 7명, 왕비 1명을 배출했으며, 문과 급제자
는 무려 200여명에 이른다. 주요 세거지 변천과정을 『계해보』를 통하여 살펴보
면, 시조 김흥광이 라말(羅末). 려초(麗初)의 혼란을 피해 지금의 전남 광주 평장
동으로 가터를 잡고 살았던 사실이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일찍이 광주를 세거의
터로 삼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후 20세 김효종(金孝宗)이 부여에 터를 잡아 세거하였고, 22세 김맹규(金孟
規)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충남 공주지역으로 이주 세거하였다. 또 김천리(金
天利)의 자손들은 19세 김숭지(金崇之)의 대부터 22세 김수항(金秀迒)의 대에 걸
쳐 서천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리하여 1930년 경에 이르러 충남 논산군 일원, 서산군 팔봉면 등지에 집성
촌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1980년에 와서 특히 광산김씨의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으로 손꼽을 수 있는 곳이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高井里)이다. 사계
김장생이 광해군의 혼정(昏政)을 피해 은거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 마을에
광산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것은 19세 김약채(金若采)의 대부터다.
---이 마을의 내력에서 김약채의 큰며느리 허씨(許氏)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
다. 『계해보』에 의하면 김약채의 맏아들 김문(金問)이 일찍 죽고 그 부인 허씨
가 17세의 나이에 홀로 되자 허씨의 부모가 딸을 불쌍히 여겨 개가시키려 하였
다. 허씨는 끝내 거절, 아들 김철산(金鐵山)을 데리고 시가인 고정리로 내려와
아들을 키우며 수절하였다.
---이후 김철산(金鐵山)<옮긴이 註 : 김철산의 부인 정경부인 김씨가 문온공
파 부사공 명리의 셋째따님임>이 성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
광(金謙光) 등 4형제를 낳았고, 다시 김국광의 5대손에 김장생이 태어 났으니 오
늘의 고정리 마을은 정경부인 허씨의 정절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현재 광산김씨는 논산읍에 382가구, 연무읍에 280가구, 양촌면에 225가구, 연
산면에 64가구 등 논산군 전체에 182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가구에 거주하
는 인구는 6,100여면으로 논산군 전체 인구의 4.7%를 차지 한다.
▣ 안동김씨(pp1224)
---안동김씨의 시조는 김숙승(金叔承)이다.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은
설(殷說)(옮긴이 註임 : 은열의 오기임) 둘째 아들(옮긴이 註세 : 세째 아들이라고
도 함)이며 공부시랑을 지냈다. 그 뒤 경순왕의 9세손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
慶)을 중조(中祖)로 하여 후대를 잇고 있다.
---안동김씨는 김방경 이후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손자가 계속
재상의 지위에 올라 고려말에 최고 가문의 지위를 누렷다. 그의 현손인 김사형(金
士衡)이 조선 개국1등공신이 되고 태종 때에 좌의정(옮긴이 註좌 : 좌정승이 바른
표기임)에 오름으로서 조선조에서도 가문의 세력을 유지. 발전해 올 수 있었다.
---현재 안동김씨는 논산읍에 60가구, 연무읍에 42가구, 광석면에 24가구, 상월면
에 2가구 등 총 265가구가 논산군에 정착 거주하고 있다.(2002. 6.18)
▣ 김정중 -
▣ 김주회 -
▣ 김태서 -
▣ 김영환 - 매일 좋은 자료 염치 없이 잘 보고 있;습니다.
▣ 김항용 -
▣ 김재익 -
▣ 김주회 - 안동김씨와 광산김씨!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논산군에 다녀올 거리가 생겨서 좋습니다.
--충남 논산군 상월면 산성리는 안동김씨 충민공(김흠=金欽) 자손들의 세거지라
이곳에다 김흠의 단소를 설단하고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며 그 곁에 충민재를 건립
하였다는 본 홈피 제2207호/2002. 6. 3에 의거 논산군지를 통하여 또다른 기록을
살펴 보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또다른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논산군지를 살펴보던중 광산김씨 국광(國光), 겸광(謙光)의 금석문(신도
비)에서 문온공(九容)의 차자 부사공(明理)의 기록이 있어 두눈 동그랗게 뜨고 아
래와 같이 살펴 보았습니다.
1. 논산군지/논산군지편찬위원회/1994.
▣ 금석문(金石文)<신도비(神道碑)>(pp1616~1621)
✪김국광신도비(金國光神道碑)
--(전략)本朝爲大司憲激濁揚淸謇諤有憲臣體官至觀察使若采生諱問登第拜禮文檢閱
早歿問生諱鐵山平生醇謹自守不求名官官止司憲監察人皆曰檢閱父子有大德不大厥施
必委祉於後子孫其興乎監察卽公皇考也以功勳 贈純忠績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
大夫議政府領議政光城府院君皇妣金氏安東大姓成川府使諱明理之女永樂乙未五月
十二日戊申生(후략)
--(전략)본조위대사헌격탁양청건악유헌신체관지관찰사약채생휘문등제배예문검열
조몰문생휘철산평생순근자수불구명관관지사헌감찰인개왈검열부자유대덕불대궐시
필위지어후자손기흥호감찰즉공황고야이공훈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
대부의정부영의정광성부원군황비김씨안동대성성천부사휘명리지녀영락을미오월
십이일무신생(후략)
❋ 옮긴이 註 : 증 영의정 광성부원군(철산)의 부인 안동김씨는 성천부사 명리의
여식이다.
✪김겸광신도비(金謙光神道碑)
--(전략)公諱謙光子撝卿光山人也古祖諱鼎推誠補理功臣重大匡光城君重大匡生資憲
大夫忠淸道觀察使若采觀察使生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 世子貳師問贊成生 贈輸
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兼領觀象監事光城府院君鐵山府
院君娶成川大都護府使金明理之女貞敬大夫人生公於永樂十七年九月丁未其源遠乎
哉(후략)
--(전략)공휘겸광자위경광산인야고조휘정추성보리공신중대광광성군중대광생자헌
대부충청도관찰사약채관찰사생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 세자이사문찬성생 증수
충적덕병의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겸영관상감사광성부원군철산부
원군취성천대도호부사김명리지녀정경대부인생공어영락십칠년구월정미기원원호
재(후략)
❋ 옮긴이 註 : 증 영의정부사겸 관상감사 광성부원군 철산부원군은 성천대도호
부사김명리의 여식에게 장가를 들었다.
2. 안동김씨문온공파세보
✪1992년 임신보 권2.(pp1~8)
--문온공(구용) - 명선(明善). 명리(明理). 명윤(明允)
--명리(明理) - 맹헌(孟獻). 중서(仲舒). 계우(季友). 서(婿) 권훤(權烜). 남경복(南
景福). 김철산(金鐵山, 광산인 직장 자 국광 좌의정 겸광 좌찬성). 최선문(崔善
文)
✪부사공(副使公) 휘명리(諱明理) 묘비문(墓碑文). (1992년 임신보 권1. pp129)
--(전략) 생육(生育) 3남4녀하였으니 장(長)은 예문관직제학 휘맹헌(孟獻)이요, 차
(次)는 호조참의공 휘중서(仲舒)이며, 말(末)은 의정부사인공 휘계우(季友)이다.
--제1서(第1婿)는 직장 안동권공훤(烜)이요, 제2서는 좌군사직 의령남공경복(景
福)이며, 제3서는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광성부원군 광
산김공 철산(純忠績德秉義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 光城府院君 光山金
公 鐵山)이라, 말서(末婿)는 시(諡) 문혜공(文惠公) 화순인 최선문(崔善文)인 바
세종조에 사헌부지평하고 문종조에 공조판서에 승직하였는데 세조가 등극하여 좌
찬성에 소명하나 불사하였다.
✪조선국 봉정대부 성천도호부 부사겸 근농부사 안주 좌익병마단련부사 김공명리
묘지.(朝鮮國 奉正大夫 成川都護府 副使兼 勤農副使 安州左翼兵馬團鍊副使 金公
明理 墓誌)(1992년 임신보 권1. pp135)
--(전략)사첨시직장 광산인 김철산(金鐵山)은 생남4하니 생원 국광(國光, 此出 士
溪 金長生) 겸광(謙光) 우광(迂光) 경광(景光)이오 여2는 어리다. 국광의 부인은
호군 황보신(黃保身 ; 황희정승의 아들)의 딸로서 생남1여1하니 남은 뉴(忸)요, 딸
은 어리다.
3. 광산김씨공안공파보수권(光山金氏恭安公派譜首卷/1994) pp2~3
▣ 증영상 김철산(贈領相 金鐵山)은 신라국김씨왕자흥광(新羅國金氏王子興光)의
21세손이고 아들로 좌의정공 국광(國光), 공안공 겸광(謙光), 첨정공 정광(廷光),
판판공 경광(景光)이 있다.
4. 문온공파(文溫公派) 부사공(府使公) 명리(明理)의 외손(外孫)들.
▣ 김국광(金國光)(논산군지 pp1254)
---이조 예종 때의 명신,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시호는 정정(丁靖),
본관은 광주(光州)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철산(鐵山)의 아들. 성균관생으로
뽑혔을 때 영상 황희(領相 黃喜)가 한번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손녀로 처(妻)
를 삼아 주고 항상 이르기를 김생(金生)은 비범한 사람이라 하며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뒤라야 국광(國光)을 보았다. 1438년(세종 20) 사마시에, 1441년(세종 23)
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와 박사가 되었고 이어 의잉고부사를 거처 황해도 도
사를 지냈으며 1447년(세종 29)에 사헌부감찰로 과장(科場)의 시관(試官)이 되어
이양재(李梁材) 등을 뽑았다. 이듬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왔으며 이어 승문원교
리를 역임했다. 세조가 원종공신의 호를 내렸고 이어 부지승문원사에 승진하였다.
세조의 명으로 경국대전을 만들 때 법을 만들되 털끝만한 일이라도 자상하게 분
석하여 주대(奏對)함이 상감 뜻에 맞게 하니 그 때 상문국(詳文局)을 맡은 사람들
이 모두 훈현대신(勳賢大臣)이로되 상감이 편전(便殿)에서 홀로 국광(國光)만을
불러 일을 의논하고 말하되 “내가 국광에게서 배운 바가 많다.” 하였다. 얼마 후
승정원부승지에 발탁되어 통정대부 좌부승지를 거쳐 1461년(세조 7)에 병조참판
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마음껏 치적을 나타내려 하여 국광(國光)에게
군사일을 맡기니 그는 감축하고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계획이 정밀하니 세조가
칭찬하여 “국광(國光)같은 사람은 참으로 문무를 겸한 대재(大材)로다.”하고 총애
함이 날로 융성하고 일찍이 세조가 친찰(親札)로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글
자를 주어 칭찬하였다. 하루는 세조가 편전에서 수라를 국광(國光)에 나누어 주어
먹게 하고 날이 기울도록 얼굴을 가까이 대하여 일을 의논하면서 늙은 노관(老
官)에게 이르되 선왕조에서 군신(君臣) 사이에 이같이 잘 만난 이가 있었더냐 하
니 노관이 대답하되 “신이 네 조정을 섬겼으되 오늘같은 일은 보지 못하였습니
다.”라고 하였다. 1462년(세조 8)에 식과시(式科試)를 맡아 조번달 등을 뽑았고,
1464년(세조 10)에 호조판서로 승진하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이어 중추부사 정
헌대부를 거쳐 병조판서,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시
애(李施愛)의 란(亂)에 큰 공을 세워 그 훈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
功臣)의 호를 내리고 이어 숭록대부좌찬성(崇祿大夫左贊成)에 승진 했다. 1469년
(예종 1)에 대광보국숭록대부우의정겸영경연사(大匡輔國崇祿大夫右議政兼領經筵
事)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오고 1471년(성종
2)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말년
에 병이 위중하니 성종이 내의를 보내고 좋은 약을 보냈으나 효험이 없었다. 운
명하였다는 소식에 왕이 크게 슬퍼하며 불도지전(不挑之典)을 내렸다.
☞ 김국광(金國光) 사당(祠堂) : 의정공(議政公) 김국광 사당은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성종 13년(1482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사우(祠宇)는 14.8평이고 1합문
(閤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에는 종가 4대조를 포함 5위가 모셔져 있고, 해마
다 음력 11월 10일은 의정공, 10월 9일은 배위의 제향을 올리고 있다.
▣ 김겸광(金謙光)(논산군지 pp1266)
---이조 성종 때의 공신, 자는 위경(撝卿), 호는 서정(西亭), 본관은 광산, 시호는
공안(恭安), 좌의정 국광(左議政 國光)의 아우로 1454년(단종 1)에 문과에 급제하
였으며 성종 때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에 책봉되고 광성부원군(光
城府院君)에 봉하였다. 벼슬은 예조판서.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
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다.
☞ 김겸광(金謙光) 사당(祠堂) : 공안공(恭安公) 김겸광 사당은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본래는 부적면 안천리에 있었으나 탑정저수지 공사로 수몰하게 되어 1944
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사우(祠宇)는 6평, 종가(宗家)는 17평이며, 사
당(祠堂)에는 종가 4대조를 포함 5위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5월과 7월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 김경광(金景光)(논산군지 pp1280)
---이조 세종 때의 문신, 자는 군경(君卿), 본관은 광산으로 좌의정 국광(左議政
國光)의 아우로 1420년(세종 2)에 문과에 급제 통훈대부군기시겸교서판교(通訓大
夫軍器寺兼校書判校)를 역인하엿다.
▣ 김장생(金長生)(논산군지 pp1249)
---이조 중기의 학자,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본관
은 광산, 대사성 계휘(繼輝)의 아들로 처음에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에게 예학
을 배우고 뒤에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게 성리학을 배워 통달하여 문명이 높고
예학과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나라의 전례나 행사에 의문이 있으면 다 사계(沙
溪)에게 상의하였으며 인조가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追尊)할 때에도 역시
사계에게 물었다. 이 때 사계는 이에 반대하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왔
다. 사계의 예학은 다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에 전하여 서인을 중심한 기호
학파(畿湖學派)에서 크게 성했으며, 그 후 모든 의례의 규범이 되었다. 여러번 나
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형조참판에 임명
되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순박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
났다. 글을 일다가 깨닫는 바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적어 책을 지으니 모든 사람
이 덕행군자(德行君子)라 일컬어 추앙했다. 많은 문하생 가운데 김집(金集). 송준
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등 3인이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송시열(宋時烈). 최명
길(崔鳴吉) 등 9인의 재상(宰相)과 신흠(申欽). 장유(張維) 등 5인의 대제학(大提
學), 이시직(李時稷) 등 2인의 순절공신(殉節功臣)을 배출하였다. 저서로 『경서변
의(經書辨疑)』『근사록석의(近思錄釋意)』『의례문해(疑禮問解)』『서소잡록(書
疎雜錄)』『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이 있다. 연산의 둔암
서원(遯岩書院)에 주향(主享)하고 강경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외 여러 곳의 서원
에 배향되고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 김장생(金長生) 사당(祠堂)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사당은 고정리에 있는
데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고종 4년에 중수되었다. 사우(祠宇)는 9평, 종가(宗家)
17평, 염수재(念修齋) 13.5평, 문간채 19평, 아래채 14.4평으로 구성되고, 광산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위패는 종손가 4대를 포함 5위이고 해마다 음력 8월
2일에는 사계선생을, 음력 4월 24일에는 배위의 제향을 올리고 있다.
▣ 김집(金集)(논산군지 pp1249~1250)
---이조 효종 때의 학자,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諡)는 문경(文
敬) 본관은 광산으로 사계(沙溪) 장생(長生)의 아들 18세에 진사에 합격 재랑(齋
郞)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ddkqj지를 모시고 영산 향리로 돌
아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아버지가 다시 벼슬에 나서자 그도 부여현감을
거쳐 임파현령으로 있다가 퇴관.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수차의 임관을 사양하다
가 효종 즉위 후 이조판서 직을 세 번이나 상소로 사양했으나 허락지 않음에 감
격하여 출사하였다. 정사(政事)에 김자점(金自點)과 맞선 관계로 청나라와 대립
하여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상소(上疏)를 받았으나 효종의 총애로 별일 없었다. 의
정부 좌참찬 판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끝내 사퇴하였다. 학문이 깊어 우수한 제자
들을 많이 배출하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유고로 『전서(全書)』 문집 9권이 있다.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효종묘정(孝宗廟庭)에 배향되고 연산의 둔암서원(遯岩書
院)을 비롯 각 지방의 여러 서원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 김집(金集) 사당(祠堂) :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사당은 연산면 임리에 있
다. 인조 7년(1629)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오는데 사우(祠宇), 종가(宗家), 문간
채, 일각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에는 종손가 4대를 포함 5위를 모시고 있
으며, 광산김씨 문경공파 종중에서는 해마다 음력 5월 12일에는 신독재선생을, 12
월 8일에는 배위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5. 안동김씨와 광산김씨.
▣ 광산김씨.(pp1222~1223)
---광산김씨의 시조는 김흥광(金興光)으로 신라말 왕자로 태어났다. 고려가 삼한
을 통일하게 됨으로서 신라의 비운을 예견한 그는 무주(武州)의 서일동(西一洞)에
피난 은거함으로서 광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구보 세록(世錄) 편에는 김흥광이
헌강왕의 셋째 아들이라 하기도 하고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라고도 하였으나, 헌
강왕은 아들이 한분뿐이었고 신무왕의 아들이라 하는 점에도 후일의 확증이 요구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근래에 수보(修譜)된 여러 파보에는 그가 다만 신라의 왕
자라고 적고 있다.
---광산김씨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이다. 지금도 광금(光金) 특히 사
계(沙溪) 자손이라면 알아주는 집안으로 꼽고 있다. 광산김씨는 세도가 당당했던
집안이라기 보다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한 명문이다.
---조선 중기 예학(禮學)의 태두요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광산김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은 유
학의 입문이요 맺음이라 할 예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동국(東國) 18현
(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누렸다. 광김(光金)은 조선
에서만 상신(上臣) 5명, 대제학(大提學) 7명, 왕비 1명을 배출했으며, 문과 급제자
는 무려 200여명에 이른다. 주요 세거지 변천과정을 『계해보』를 통하여 살펴보
면, 시조 김흥광이 라말(羅末). 려초(麗初)의 혼란을 피해 지금의 전남 광주 평장
동으로 가터를 잡고 살았던 사실이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일찍이 광주를 세거의
터로 삼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후 20세 김효종(金孝宗)이 부여에 터를 잡아 세거하였고, 22세 김맹규(金孟
規)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충남 공주지역으로 이주 세거하였다. 또 김천리(金
天利)의 자손들은 19세 김숭지(金崇之)의 대부터 22세 김수항(金秀迒)의 대에 걸
쳐 서천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리하여 1930년 경에 이르러 충남 논산군 일원, 서산군 팔봉면 등지에 집성
촌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1980년에 와서 특히 광산김씨의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으로 손꼽을 수 있는 곳이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高井里)이다. 사계
김장생이 광해군의 혼정(昏政)을 피해 은거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 마을에
광산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것은 19세 김약채(金若采)의 대부터다.
---이 마을의 내력에서 김약채의 큰며느리 허씨(許氏)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
다. 『계해보』에 의하면 김약채의 맏아들 김문(金問)이 일찍 죽고 그 부인 허씨
가 17세의 나이에 홀로 되자 허씨의 부모가 딸을 불쌍히 여겨 개가시키려 하였
다. 허씨는 끝내 거절, 아들 김철산(金鐵山)을 데리고 시가인 고정리로 내려와
아들을 키우며 수절하였다.
---이후 김철산(金鐵山)<옮긴이 註 : 김철산의 부인 정경부인 김씨가 문온공
파 부사공 명리의 셋째따님임>이 성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
광(金謙光) 등 4형제를 낳았고, 다시 김국광의 5대손에 김장생이 태어 났으니 오
늘의 고정리 마을은 정경부인 허씨의 정절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현재 광산김씨는 논산읍에 382가구, 연무읍에 280가구, 양촌면에 225가구, 연
산면에 64가구 등 논산군 전체에 182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가구에 거주하
는 인구는 6,100여면으로 논산군 전체 인구의 4.7%를 차지 한다.
▣ 안동김씨(pp1224)
---안동김씨의 시조는 김숙승(金叔承)이다.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은
설(殷說)(옮긴이 註임 : 은열의 오기임) 둘째 아들(옮긴이 註세 : 세째 아들이라고
도 함)이며 공부시랑을 지냈다. 그 뒤 경순왕의 9세손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
慶)을 중조(中祖)로 하여 후대를 잇고 있다.
---안동김씨는 김방경 이후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손자가 계속
재상의 지위에 올라 고려말에 최고 가문의 지위를 누렷다. 그의 현손인 김사형(金
士衡)이 조선 개국1등공신이 되고 태종 때에 좌의정(옮긴이 註좌 : 좌정승이 바른
표기임)에 오름으로서 조선조에서도 가문의 세력을 유지. 발전해 올 수 있었다.
---현재 안동김씨는 논산읍에 60가구, 연무읍에 42가구, 광석면에 24가구, 상월면
에 2가구 등 총 265가구가 논산군에 정착 거주하고 있다.(2002. 6.18)
▣ 김정중 -
▣ 김주회 -
▣ 김태서 -
▣ 김영환 - 매일 좋은 자료 염치 없이 잘 보고 있;습니다.
▣ 김항용 -
▣ 김재익 -
▣ 김주회 - 안동김씨와 광산김씨!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논산군에 다녀올 거리가 생겨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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