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공(金愃)과 김신(金侁)은 다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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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12-31 12:45 조회1,738회 댓글3건본문
판서공(金愃)과 김신(金侁)은 다른 인물
판서공[휘 선(愃)]께서는 고려사 기록이 적어 행적을 자세히 추적하기 어렵다. 충렬공께서 일본을 정벌하실 당시 중책을 맡은 인물 중에 김신(金侁)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1차 일본정벌 당시 고려군 좌군사(左軍使)로 고려 삼익군(三翼軍) 중 좌군(左軍)을 지휘하였으며, 태풍으로 인해 익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근 일부 소설류에서는 이 김신(金侁)을 충렬공의 장자인 판서공(金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이런 착오는 두 사람의 휘자와 활동연대가 비슷한 데다 판서공의 행적이 고려사 등에 잘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듯하다. 당시 고려 정계(政界)를 완전히 장악한 충렬공의 위상을 고려할 때 큰아드님 판서공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낭장 왕연(王涓)은 종실의 먼 족속(族屬)이었는데, 광평공(廣平公) 왕혜(王譿)가 그 노비를 빼앗으니, 왕연의 사위 밀직사 김선(金侁)이 소송하여 이를 얻었다. 뒤에 김선이 일본을 정벌하다가 물에 빠져 죽으니, 왕혜가 그 노비들을 몽고 공주에게 바쳤다.
- 『동국통감』(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5권 155쪽.
* '金侁'은 '김신' 또는 '김선'으로 읽히는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김선'으로 적었다.
이 내용은 고려사 충렬왕조에도 기록돼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김신은 판서공과 동명이인임이 확실하다. 한편,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김신(金侁)이 익사하지 않고 몽고군 함선에 구조돼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확인하지 못했다.
<추가> 이러한 오해 때문인 듯 웹문서 여기저기에 김신(金侁)을 판서공이라 적은 곳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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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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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새해에는 뜻하시는 바 모두 이루시길 빕니다
마음만큼 도움 드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김봉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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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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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밀직 김 신--본관은 진례(금산)이니 그 시조이다.1274년 좌군사로 중군사 김방경을 도와 일본으로 원정,일기도 삼랑포에서 많은 전과를 얻었어나 풍랑으로 전선이 침몰,원나라 병선에 구원되어 원나라로 들어갔다.그 후 원에서 요양행성 참정 등 벼슬를 하며 고려에 많은 공이 있어 충렬왕 31년(1305)그의 고향 진례현을 금주로 승격하여 지금주사로 임명되었다. ---보유고려사열전(1997년 (사) 고려숭의회 발행) 참조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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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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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두 분 대부님, 감사합니다. 새해 만사형통하시길 빕니다.
봉석 대부님, 건강 많이 회복하셨는지 여쭙지도 못해 죄송합니다.
김신에 대한 자료를 좀더 알고 싶습니다.
본래 김신이 무관이 아니라 문관으로 출발했다는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