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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성 묘갈(김희수 서)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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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9-01-25 05:14 조회1,99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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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재(悠然齋) 휘 희수(希壽)께서 서(書)하신 안자성(安子誠) 묘갈의 탁본입니다. 교토대 자료로 탁본첩의 형식입니다.

 

1519년(중종 14)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안자성(安子誠)의 묘갈(墓碣)이다. 찬자는 김안로(金安老, 1418~1537)이며, 서자는 해서체를 잘 썼던 조선 중기의 문신 김희수(金希壽, 1475~1527)이다.
안자성(1447~1514)은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재직 중 관아에서 사망하게 되자 그의 아들과 사위들이 양성(陽城)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냈다.
비문의 초반부와 중반부에서는 주로 공의 가계에 관한 내용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3품관의 관직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본받을 만한 공적을 많이 남겼고 청렴함으로 칭송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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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朝鮮國通訓大夫公州牧使兼
公州鎭兵馬僉節制使安侯墓碣銘
幷序
通 政大夫吏曹參
議知製敎金安老撰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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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書
正德紀元之九年歲甲戌八月日公
兆牧使安侯卒于官其孤㥠等扶櫬
歸陽城故里葬以是年十一月辛酉
越五年戊寅春淑人李氏歿旣又祔
非于侯墓之右相與謀樹碣以畀諸
後請銘于安老老誠不文其何敢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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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其言之不已竟不獲辭焉謹按安
氏之先出竹山有諱曾仕爲進賢館
直提學於侯曾祖子曰季仁知高城
郡事孫曰迢戶曹參判視參判秩贈
及父若祖有差以其具本銜令略之
司醞直長安德中以女配參判生侯
侯旣長聘司直三奇女三重大匡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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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君思安之後是謂淑人內外門闌
皆右姓望族袞袞 簪紳遠而不替侯
之男長卽anjasung07.jpg漢城府判官次恒擧壬
子司馬榜始筮宦爲典牲署參奉次
慥先侯亡女長歸慶州府尹柳希渚
登丙辰文科甲科多踐淸顯至今官
次歸奇逈登丙子文科出補茂長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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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忠義衛洪繼玄次歸兼司僕崔浚
內外孫摠十八人子孫之慶其未艾
乎侯中戊子司馬試由門蔭積勤謹
至三品職所莅多效績以廉能聞在
世凡六十有八歲淑人享壽視侯與
齊而實三年有加吁何其念耶侯之
名子誠字勿欺云 銘曰 生齊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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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同兆 是共願其亦少 牧守尊
子孫多 如侯備有幾何 斯已矣
更誰求 于以安永千秋
維正德十四年己卯十一月日立石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통훈대부(通訓大夫) 공주목사 겸 공주진 병마첨절제사 안후(安侯)의 묘갈명(墓碣銘) : 서문(序文)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지제교(吏曹參議知製敎) 김안로(金安老)는 비문(碑文)을 짓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김희수(金希壽)는 비문의 글씨를 쓰다.

정덕(正德) 기원(紀元) 9년인 갑술년(1514, 중종 9) 8월 일에 공주목사(公州牧使) 안후(安侯)가 관아(官衙)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과 사위들이 널을 떠받치고 양성(陽城) 고향으로 돌아와 11월 신유일에 장사(葬事)하였다. 5년이 지난 무인년(1518, 중종 13) 봄에 숙인(淑人) 이씨(李氏)도 사망하니, 또 목사(牧使) 묘(墓) 오른편에 하관(下棺)하였다. 그리고 서로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함께 도모하여 이에 나에게 명문(銘文)을 써줄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안씨(安氏)의 본관(本貫)은 죽산(竹山)이다. 증(曾)은 진현관 직제학(進賢館直提學)의 벼슬을 지냈고, 목사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직제학의 아들 계인(季仁)은 지고양군사(知高陽郡事)를 지냈고, 손자 초(迢)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니, 그 작질(爵秩)을 미루어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증직(贈職)한 것은 차등(差等)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본래 관함(官銜)으로 지금 대략 기록한다.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안덕흥(安德興)이 딸을 참판(參判)에게 출가(出嫁)시켜 목사를 낳았다. 목사는 장성해서 사직(司直) 삼기(三奇)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삼중대광(三重大匡) 전의군(全義君) 사안(思安)의 후손으로, 이 사람이 숙인(淑人)이다. 내외(內外)의 가문이 모두 세력 있고 명망 있는 훌륭한 집안으로, 줄줄이 높은 벼슬아치들이 나왔으며 오래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목사의 장남은 바로 서(anjasung07.jpg)로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이고, 다음은 항(恒)으로 임자년(1492, 성종 23) 사마시(司馬試)의 방목(榜目)에 올라 비로소 벼슬에 나가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막내는 조(慥)로 목사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장녀는 경주부윤(慶州府尹) 유희저(柳希渚)에게 출가하였는데, 유희저는 병진년(1486, 성종 17)의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거쳐서 지금의 벼슬에 이르렀고, 다음은 기형(奇迥)에게 출가하였는데, 병자년(1516, 중종 11)의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으로 보내져 무장(茂長)에 보임(補任)되었으며, 다음은 홍계현(洪繼玄)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최준(崔浚)에게 출가하였다. 내손(內孫)과 외손(外孫)을 합하면 모두 18인이니, 자손의 경사(慶事)가 한이 없다.
목사는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오래도록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벼슬을 두루 거쳐서 3품(品官)의 관직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본받을 만한 공적(功績)을 많이 남겼고 청렴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향년(享年)이 68세이며, 숙인도 향수(享壽)를 누렸다. 목사와 비교해서 나란히 향수를 누렸으나 실로 3년을 더 살았다. 아! 어찌 온전하지 않겠는가? 목사의 이름은 자성(子誠)이요, 자(字)는 물기(勿欺)이다.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살아서 목숨을 같이하고 죽어서 한 무덤에 묻혔으니
이것이 그의 소원이었으나 그것 또한 작은 것이라네.
목수(牧守)는 존경을 받고 자손은 번성하니
목사와 같이 갖추어진 이가 얼마나 될까.
이것으로 그만이니 다시 누구를 구할 것인가.
이로써 편안히 만세토록 영원하여라.

정덕(正德) 14년인 기묘년(1519, 중종 14) 11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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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중한 교오토대 자료, 이를 보기좋게 재편집하셔서 감사합니다 .
본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