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로 선조 글씨인 송질선생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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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22 10:36 조회1,665회 댓글0건본문
36. 송질(宋軼)선생 묘 및 신도비.
☞ 출전 : 향토유적총람/경기도/1987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8호
○소 재 지 : 양주군 은현면 선암리 산15
○관 리 자 : 송씨종중
○재 료 : 대리석
○크 기 : 〔신〕높이 190㎝, 폭 104㎝, 두께 26㎝
○시 대 : 조선 인조 19년(1641)
--송질(宋軼 ; 1454~1520)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가중(可仲), 본관
은 여산(礪山), 도정 공손(恭孫)의 아들이다. 성종 7년(1477) 생원시. 진사시에 합
격, 이듬해 알성문과, 성종 13년(1482) 진현시(進賢試)에 각각 급제하여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 우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중종 8년(1513) 우의정 뒤에 영의
정이 된 이듬해에는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묘는 앞면과 좌. 우면에 사다리형으로 장대석의 호석이 돌려져 있는데, 봉분의
높이는 1.6m, 직경 5.8m, 둘레 18m이다.
--묘 주위에는 1976년에 묘역 정화사업으로 조성된 석축의 곡장이 둘려졌으며,
묘 중앙에는 비두(碑頭)가 투구형에 연화문을 조각한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 좌
우에 문인석. 망주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백대리석으로 높이 120㎝, 폭
50㎝, 두께 12㎝의 규모이다.
--묘의 바로 전방에는 부인 정경부인 남원양씨의 묘가 위치해 있다.
--묘소 입구 언덕에 위치한 신도비는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
었으며, 비신은 백대리석이다.
--앞면 상단에는 전자(篆字)로 「유명조선국수충분의정국공신대광보국숙정공신도
비명(有明朝鮮國輸忠奮義靖國功臣大匡輔國肅靖公神道碑銘)」이라 횡서(橫書)했고
비제(碑題)를 「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지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광산
부원군 증시숙정송공신도비명병서(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知弘文館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礦山府院君 贈諡肅靖宋公神道碑銘幷書)」라 했다. 앞면 말미에
「숭정상십사년구월일건(崇禎上十四年九月日建)」ㅇㅇㅇㅇ이란 음각으로 보아 이
비는 인조 19년(164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성세창(成世昌)이 짓고, 김로(金魯)가 글씨를 썼으며, 박영(朴詠)이 전
(篆)했다. 그 규모는 높이가 190㎝, 폭 104㎝, 두께 26㎝이며, 상단과 하단에 톱질
자국이 크게 나있다.
--묘소 부근에는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한 사우(祠宇)가 있는데, 정면 2칸, 측
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 옮긴이 의견 : 김로 선조는 1498(연산군 4)에 태어나시어 1548(명종 3)에 졸하신
바 송질 선생의 비가 인조 19년(1641)에 건립되었다면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세창 선생의 근역서화징을 살펴보면 김로 선조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어떠한 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묘갈과 신도비 사진은 생략)
▣ 근역서화징/오세창/1998
140. 김로(金魯) pp321~322)
--자는 경삼(景參),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안동,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
의 아들. 연산군 6년 경신(1500 ; 옮긴이 주 - 1498년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오기
일 것을 추정됨) 생. 중종 20년 을유(1525)에 문과에 급제. 벼슬은 승지.
--서법이 가업으로 전해 오는 일이 많았으나 우리나라에는 이암(李嵓). 이강(李
岡)과 김희수(金希壽). 김로(魯) 부자가 모두 글씨를 잘 썼다.(지봉유설)
--김로가 또 글씨를 잘 써서 아버지의 풍도가 있었다.(국조인물고)
--촉체(蜀體 : 趙孟부體)에 능했다.(동국문헌필원편)
--어려서 글씨를 잘 썼다.(연려실기술)
--양주의 숙정공(肅靖公) 송질(宋軼)의 비와 광주의 삭령(朔寧) 남변(南忭)의 비
와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의 비와 고양의 서양군(西陽君) 이한의(李韓義)
의 비와 김포의 판서 윤은(尹訔)의 묘갈과 용인의 도정 윤진(尹珍)의 묘갈과 청주
의 참봉 송세량(宋世良)의 묘갈을 썼다.(해동금석총목)
--송질비(宋軼碑)의 해서(楷書)는 시원하면서도 자태가 있다.(동국금석평)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이제 양주의 선암리는 그냥 못 지나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정중 - !!
▣ 김영환 - 김노 선조님 생전에 비문을 받아 놓았다가 어떤 이유(재정, 집안사정등)로 후일 비를 세운 것이 아닐런지요.
▣ 김은회 - 대부님 생각과 같은 느낌을,,,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익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기회를 보아 찾아보겠습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출전 : 향토유적총람/경기도/1987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8호
○소 재 지 : 양주군 은현면 선암리 산15
○관 리 자 : 송씨종중
○재 료 : 대리석
○크 기 : 〔신〕높이 190㎝, 폭 104㎝, 두께 26㎝
○시 대 : 조선 인조 19년(1641)
--송질(宋軼 ; 1454~1520)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가중(可仲), 본관
은 여산(礪山), 도정 공손(恭孫)의 아들이다. 성종 7년(1477) 생원시. 진사시에 합
격, 이듬해 알성문과, 성종 13년(1482) 진현시(進賢試)에 각각 급제하여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 우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중종 8년(1513) 우의정 뒤에 영의
정이 된 이듬해에는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묘는 앞면과 좌. 우면에 사다리형으로 장대석의 호석이 돌려져 있는데, 봉분의
높이는 1.6m, 직경 5.8m, 둘레 18m이다.
--묘 주위에는 1976년에 묘역 정화사업으로 조성된 석축의 곡장이 둘려졌으며,
묘 중앙에는 비두(碑頭)가 투구형에 연화문을 조각한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 좌
우에 문인석. 망주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백대리석으로 높이 120㎝, 폭
50㎝, 두께 12㎝의 규모이다.
--묘의 바로 전방에는 부인 정경부인 남원양씨의 묘가 위치해 있다.
--묘소 입구 언덕에 위치한 신도비는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
었으며, 비신은 백대리석이다.
--앞면 상단에는 전자(篆字)로 「유명조선국수충분의정국공신대광보국숙정공신도
비명(有明朝鮮國輸忠奮義靖國功臣大匡輔國肅靖公神道碑銘)」이라 횡서(橫書)했고
비제(碑題)를 「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지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광산
부원군 증시숙정송공신도비명병서(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知弘文館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礦山府院君 贈諡肅靖宋公神道碑銘幷書)」라 했다. 앞면 말미에
「숭정상십사년구월일건(崇禎上十四年九月日建)」ㅇㅇㅇㅇ이란 음각으로 보아 이
비는 인조 19년(164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성세창(成世昌)이 짓고, 김로(金魯)가 글씨를 썼으며, 박영(朴詠)이 전
(篆)했다. 그 규모는 높이가 190㎝, 폭 104㎝, 두께 26㎝이며, 상단과 하단에 톱질
자국이 크게 나있다.
--묘소 부근에는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한 사우(祠宇)가 있는데, 정면 2칸, 측
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 옮긴이 의견 : 김로 선조는 1498(연산군 4)에 태어나시어 1548(명종 3)에 졸하신
바 송질 선생의 비가 인조 19년(1641)에 건립되었다면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세창 선생의 근역서화징을 살펴보면 김로 선조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어떠한 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묘갈과 신도비 사진은 생략)
▣ 근역서화징/오세창/1998
140. 김로(金魯) pp321~322)
--자는 경삼(景參),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안동,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
의 아들. 연산군 6년 경신(1500 ; 옮긴이 주 - 1498년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오기
일 것을 추정됨) 생. 중종 20년 을유(1525)에 문과에 급제. 벼슬은 승지.
--서법이 가업으로 전해 오는 일이 많았으나 우리나라에는 이암(李嵓). 이강(李
岡)과 김희수(金希壽). 김로(魯) 부자가 모두 글씨를 잘 썼다.(지봉유설)
--김로가 또 글씨를 잘 써서 아버지의 풍도가 있었다.(국조인물고)
--촉체(蜀體 : 趙孟부體)에 능했다.(동국문헌필원편)
--어려서 글씨를 잘 썼다.(연려실기술)
--양주의 숙정공(肅靖公) 송질(宋軼)의 비와 광주의 삭령(朔寧) 남변(南忭)의 비
와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의 비와 고양의 서양군(西陽君) 이한의(李韓義)
의 비와 김포의 판서 윤은(尹訔)의 묘갈과 용인의 도정 윤진(尹珍)의 묘갈과 청주
의 참봉 송세량(宋世良)의 묘갈을 썼다.(해동금석총목)
--송질비(宋軼碑)의 해서(楷書)는 시원하면서도 자태가 있다.(동국금석평)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이제 양주의 선암리는 그냥 못 지나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정중 - !!
▣ 김영환 - 김노 선조님 생전에 비문을 받아 놓았다가 어떤 이유(재정, 집안사정등)로 후일 비를 세운 것이 아닐런지요.
▣ 김은회 - 대부님 생각과 같은 느낌을,,,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익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기회를 보아 찾아보겠습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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