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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능동재사(安東金氏 陵洞齋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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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9-03-14 10:38 조회2,64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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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金氏 陵洞齋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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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능동재사

 

1. 유래

안동김씨 능동재사인 음수재(飮水齋)는 안동시 녹전면 구송리(죽송리의 오기) 능골에 있다. 이 건물은 고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제를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다. 음수재를 찾아 가는 길은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 방면으로 이동하는 국도 35호선을 이용한다. 국도를 따라 와룡면소재지를 지나 도산서원 방면으로 나아가면 감애에서 녹전면으로 연결되는 지방도와 만난다. 이곳에서 지방도를 따라 녹전면으로 방향을 잡아 7km 정도 들어가면 역계천을 가로지르는 구송교를 만나는데 이 지점에는 충렬공 묘소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 지례(知禮) 마을 표석,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선조인 참판공 묘소 입구, 충렬공 김방경 묘소 입로를 알리는 표석을 만난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좌회전하여 1km 정도 더 들어가면 재사를 만날 수 있다. 재사는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광산김씨 능동재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의 묘소재사(墓所齋舍) 총명(總名)에 의하면 “능곡(陵谷)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을 장사했다. 생원 김효로 역시 장사했다. 그 자손들이 재사 30여 칸을 지어 산지기를 두어 수호하게 하였다.”고 기록하였고, 선성읍지 총묘(塚墓)에 김방경의 묘는 현 서쪽 지례촌 위에 있다고 했다. 지례촌는 녹전면 구송리에서는 가장 큰 마을로 옛날에 덕산인(德山人) 지령(芝嶺) 윤의정(尹義貞, 1525~1612)공이 마을에 살게 되면서 예의(禮儀)를 세우게 되었다 하여 지례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성지의 시거(始居)조에 보면 “직장 윤관(尹寬, 1508~?)이 안동으로부터 변효검(卞孝儉)의 사위가 되어 처음으로 지례에 살게 되어 큰집을 짓고서 맏아들 생원 윤의정을 조곡(條谷)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직장 류우춘(柳遇春)을 이웃하게 하여 그 자손들이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데 속명은 내동(來洞)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충렬공 김방경 공의 묘소는 능골에 광산김씨 증 참판 효로공의 묘와 연분으로 위치하는데 오래도록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조 중기에 와서 심득(尋得)하였다.

김방경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본연(本然)이며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 한림학사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공은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구름과 노을을 먹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는데 그 후에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구름의 기운이 아직도 나의 입과 코에 있는 듯 하다고 말하며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 가운데서 왔을 것이다.”고 하였다.1)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이 양육했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

관직에 나아가기는 1229년(고종 16)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공의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했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게 되자 위도(葦島)에 입보(入保)하였다.2)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걷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가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강한 반대와 위협에 부딪쳐 원종이 복위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이장용(李藏用)의 천거를 받으면서 고려와 원나라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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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1차 2차 일본 원정로

1270년 6월에 이르러 개경 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그 토벌 임무를 맡아 삼별초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힘쓰게 되었는데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는데 도독사(都督使)로서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도원수 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도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심한 풍랑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공로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에 가직(加職)되었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ㆍ노진의(盧進義)ㆍ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어 원나라의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 그 후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고 1281년의 제2차 일본 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했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충렬공 김방경의 묘소3)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와 사연이 전해온다. 위대한 인물이었음에도 묘소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던 시기가 있었고 왕명에 의해 세운 신도비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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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김방경 묘소 전경

김방경은 자신을 고향 안동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안동에 묻기는 했지만 나라로부터 응당 받아야 할 예장의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충직한 인물이었음에도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하고 일본 정벌 후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인심을 잃었다고 평가되어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충렬왕은 이를 후회하였고 충선왕 때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宣忠協謀定亂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4))으로 추증하고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한편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그 후 어떤 경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도비는 없어진 듯하고 문온공(文溫公) 김구용(金九容)의 현손인 김예생(金禮生)이 예안현감을 지낼 때 김방경의 묘소에 묘갈을 다시 세운 적이 있다. 김예생은 선성지에 나오는 바와 같이 1495년(연산군 1) 8월부터 1498년(연산군 4) 6월까지 예안현감을 지냈으니5) 이 때 후손으로서 묘갈을 다시 세웠다고 이해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1602년에 후손들이 비석을 다시 세울 때 당시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이시발(李時發, 1569~1626)의 벽오유고(碧梧遺稿)에 실린 내용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1602년 당시 “후손인 김예생이 일찍이 예안현을 살펴보고 비석을 세우고 표식을 하였는데 이제는 이 비석도 함께 깨져버렸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김방경의 묘소는 김예생이 예안현감을 하던 1498년까지는 후손들에게 그 위치가 확인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부터 김방경의 묘소 위치가 알려지지 않다가 광산김씨가 1594년에 장례를 치르려고 하다가 비로소 김방경의 묘소를 찾게 되었다. 당시 예안 오천리 광산김씨의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1455~1534)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죽송리 현 지점을 파던 도중 “고려충렬공 김방경지묘”란 지석이 출토되어 묘를 찾았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김효로의 사망 시기가 1534년이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1594년에 김방경의 지석발견으로 묘소를 찾은 경위에 대해서 안동김씨와 광산김씨 두 문중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방경의 묘소를 실전했다는 것은 비석이 없어졌다는 뜻이며 광산김씨 문중에서 묘소를 쓰려다가 김방경의 지석을 발견했다는 것은 김방경 묘소는 당시 봉분조차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김방경의 묘소가 있던 산은 당시부터 최근까지 광산김씨 문중의 소유이다. 게다가 김효로는 1534년에 사망하였으므로 김방경의 지석을 발견했다는 1594년에는 김방경의 묘소 바로 위에 이미 김효로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안동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병영에서 1593년에 사망한 김효로의 증손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를 가매장 한 곳으로부터 정식 장례를 치르기 위해 1594년에 김효로의 묘소 아래에 광중을 파려다가 김방경의 지석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김해의 묘소를 김방경의 지석이 발견된 지점을 피해 그보다 더 아래쪽에 조성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지석을 발견한 사실을 안동김씨 문중에 통보하였다. 이에 안동김씨 문중에서는 김방경의 묘소임을 확인하고 1602년에 다시 봉분을 조성하고 비석을 세웠다.

안동김씨 문중에서는 이 일대의 산이 광산김씨 문중의 소유였기 때문에 김방경의 묘소 가까이 있는 광산김씨의 묘소에 대하여 이장하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김방경의 12대 손인 김시양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후 선조의 묘를 둘러보니 광산김씨인 김효로와 김해의 묘소가 선조인 김방경의 묘소에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의리에 맞지 않는 것을 들어 다른 곳으로 이장할 것을 협의하였다.6) 안동까지 찾아와서 고심하던 김시양은 광산김씨와 상의 한 끝에 김해의 묘소만 이장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 무렵에 김방경의 묘소의 상석은 더 큰 것으로 교체되었다. 또 사촌마을에 살던 후손 김상린(金尙璘, 1616~1675)은 문중 성원들과 의논하여 묘전(墓田)을 마련하고 매년 10월 상순에 향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향해 오르는 좁직한 돌계단의 입구에는 김방경 장군의 묘소라는 것을 알리는 표석 대신에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 묘소라는 표석이 서 있다. 그리고 김방경 장군의 묘소에 잇대어서 바로 위쪽에 광산김씨 입향조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어 하나의 능선에 두 집안을 대표하는 선조의 묘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안동시 서후면 능골에 있는 안동권씨 시조인 권태사의 묘소도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권태사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실전된 권태사의 묘를 찾은 권옹 부부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에 겸암과 서애 선생의 아버지인 풍산류씨 입암 류중영 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는 경우이다. 더구나 조상의 묘소를 그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한국적 의식구조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나아가서는 묘자리를 명당 개념으로 이해하는 한국적 의식 속에서 남의 조상 묘지 바로 위를 점령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

안동의 명현 당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몇 해 전에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안동김씨 삼소재 종택을 찾았을 때 평소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충렬공과 광산김씨 입향조인 김효로 공의 묘소가 한 곳에 있게 된 연유에 대해 종손 어른께 넌지시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종손 어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연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는데 종손 어른의 말에 따르면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실전해버려서 위치를 알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충렬공의 묘소 위치를 광산김씨 문중에서 찾아 주었으며 당시 안동김씨는 광산김씨와는 인척관계였고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입향조 시향제를 올릴 때면 먼저 김방경 장군의 묘에 술을 올리고 나서 자신들의 조상 묘에 제를 올린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두 집안의 관계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자료를 수집해보니 그렇게 된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전라도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광산김씨가 천리 먼 곳인 안동 땅에 기지를 잡게 된 것은 밀직부사(密直副史) 천리(天利)의 둘째 아들인 제용소감 무(務) 때이다. 무는 고려 말 조선 초에 고양에서 안동으로 이거했는데 바로 처가가 영가김씨(안동김씨)였기 때문이다. 무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탄지(坦之), 음성현감 숭지(崇之), 효지(孝之)이다. 둘째 숭지에서 회(淮)로 가계가 이어지고 다시 효원(孝源), 효로(孝盧)로 이어진다. 효로가 바로 예안에 시거(始居)하게 된다. 효로는 운암 연(緣)과 탁청정 유(綏)를 두고 연은 후조당 부필(富弼)과 읍청정 부의(富儀)를 유는 산남 부인(富仁), 양정당 부신(富信), 설월당 부륜(富倫)을 둔다. 후조당 부필은 무후하여 동생인 읍청정 부의의 아들 해(垓)를 양자로 후사를 잇게 된다. 이와 같은 내력을 보면 광산김씨가 안동에 정착하게 된 필연적인 요인은 바로 안동김씨와의 혼인 관계가 절대적인 원인이 된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쓴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묘지명에 보면 "이 해 11월 경오(庚午)일에 현(縣)의 서쪽 지례촌(知禮村)의 북쪽 들에 김해를 장사 지냈으니 상락공 김방경의 묘와 같은 산자락이다. 대저 선생(김해)은 상락공의 외손인 까닭이다."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광산김씨의 안동 낙향조인 김무 이후부터 근시재 선생에 이르기까지 안동김씨를 배위로 하는 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도 상락공의 외손이라 한 것은 무로 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용소감 무의 가계를 좀 더 살펴보면 아버지 김천리는 고려 충숙왕 복위 2년(1333년)에 출생하였고 몰년은 미상이다. 그는 조선왕조에도 입사하였다고 하니 상당한 장수를 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천리의 아들로는 희선(希善)과 무(務) 형제가 족보에 등재되어 있다. 김희선은 자식이 없었다고 하니 이 계열은 전적으로 김무의 후손들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광산김씨가 안동으로 낙향하는 것은 바로 이 김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광산김씨의 안동 낙향은 천리의 아들 무 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향토사학자 서주석씨는 「안동지방 씨족의 정착과정」이란 글에서 판군기감사 영리의 후손 중에서 안동에 낙향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판군기감사공파(判軍器監事公派)는 파조인 영리의 증손 때에 퇴촌공파(退村公派, 파조 閱, 호는 退村, 형조좌랑 역임)로 다시 갈리어 나간다. 퇴촌의 증손 용석(用石, 1453년생, 호는 潭庵)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 되어… 연산 무오(1498년)에 스승 점필재 김종직이 부관참시 되고 많은 사류가 화를 입는 사화가 일어나니 진취의 뜻을 버리고 처향(妻鄕)인 안동 구담촌(九潭村)으로 이거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광산김씨는 안동 일원에 두 계열이 들어와 살게 된 셈이라고 하겠다. 물론 시대적으로 앞서는 것은 김천리 계열의 김무이다. 김무가 안동에 입향한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1300년대 말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고 김영리 계열의 김용석이 안동으로 내려오는 때는 1400년대 말이라 할 수 있으니 그 두 계열의 입향 시기에는 1백 여 년의 시차가 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김무는 안동으로 내려와서 처음에는 남선면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제용소감 무의 둘째 아들 목청전직(穆淸殿直) 숭지(崇之)와 손자인 음성현감 회(淮)가 풍산 도양동(道陽洞)에 거주하였고 증손자인 성균 생원 효로(孝盧, 1454-1534) 때에 와서 예안 외내(烏川)에 정착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김방경의 묘소를 둘러싸고 문중간에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오히려 안동김씨 문중과 광산김씨 문중은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김방경의 묘소가 당초에는 안동김씨 소유의 산이었겠지만 어쨌든 400여 년간 광산김씨 문중 산에 모셔져 있게 되자 1990년 7월 23일 안동김씨 대종회에서 광산김씨 대종회로부터 김방경의 묘역을 양도받았다. 이에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묘역을 안동김씨 대종회에 기증하니 대종회에서는 김방경의 묘역을 확장하고 축대와 계단을 축조하여 새롭게 단장하니 선조의 묘역을 실전하여 안타까워했던 수 백 년의 통한을 풀게 되었다. 또한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안동김씨 문중에서 묘역을 관리하고 묘제를 받들기 위한 재사를 지을 때 강당 터를 무상으로 기증하기도 해서 김방경의 묘소를 매개로 하여 두 문중은 지금까지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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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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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김씨 능동재사 전문은 본 홈페이지의 용량초과로
충렬공 실기간행위원회 카페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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