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김방경 일본정벌 그 전적지를 찾아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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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9-04-04 18:08 조회3,430회 댓글2건본문
- 히라도(平戶)를 찾아서
몽골촌 답사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를 히라도로 정했다. 그런데 시간이 벌써 1시를 넘기고 있었고, 점심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허기가 엄습할 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불평을 토로하는 이가 없다. 다른 여행이나 답사팀과 달리 조상의 얼을 찾아 나선 탓에 그럴 것이라고 짐작을 하였다.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점심 식사는 타카시마를 일단 출항한 다음 결정하자고 하여 그때까지 견디기로 하였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처음 출항지였던 이마후쿠로 가지 위하여 승선준비를 다했는데, 그곳에서 배가 출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항구로 차를 움직였다. 다행히 그곳에서 페리에 승선하여 히라도를 향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점심을 먹을만한 식당이 없는 것이다. 겨우 기사가 헤메고 묻고 하던 끝에 찾은 식당은 준비가 덜 되었다고 1시간 정도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찾은 곳이 ‘나이샷 쇼토’라고 하는 음식점이었다. 이곳에서 함박스텍을 겨우 먹을 수 있었는데, 음식이 나온 시간은 3시가 더 지난 늦은 점심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억지로 웃을 거리를 찾자면 음식점의 상호였다. ‘나이스 쇼토'라는 상호가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여주인의 말이 걸작이다. 골프에서 쓰는 용어인 ’나이스 샷‘이란다. 같은 영어라도 ‘오렌지’와 ‘오뤤지’가 다르다더니, ‘나이스 샷’과 ‘나이스 쇼토’는 또 어떤 경우인가?
▲ 히라도로 가는 배안에서 바라본 다카시마. 이노우에 야스시의 검푸른 해협이 연상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으니, 일단 점심을 해결하고나니 다음 행선지인 히라도성을 답사하여야 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배도 부르고 아침 일찍부터 설쳐댄 탓에 약간은 지쳐 있는듯하였다. 게다가 빗줄기가 점차 거세지더니 이젠 우산이나 우비가 없이는 다니기가 어려운 날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점차 그만 두었으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여행을 여러번 다녀도 히라도까지 온다는 것이 그리 자주오는 기회는 아니다. 더구나 충렬공 김방경장군을 찾아서 나선 그 후예들이 이 정도의 우천에야 망서려서야 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제의도 없었는데 이윽고 아무도 불평없이 점점 더 게세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히라도성을 향해 전진했다.
▲ 히라도성 전경
▲ 히라도성 연표를 보고 있는 답사 일행
히라도는 여몽연합군이 제2차 원정때 중요한 거점으로 지정하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과 남송군이 합류하기로 하였던 지점이다. 그런데, 여몽연합군은 제 날짜에 이곳에 도착하였으나 남송군이 지연출발하여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재집결지로 잇키섬을 정하였고, 이러던 중에 강풍이 불어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히라도의 성주는 마스우라씨(松浦氏)이다. 마쓰우라씨는 좋게 말하면 중세의 해양호족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해적이었다. 마쓰우라도오(松浦黨)라고 하면 13세기부터 동아시아 일대의 해양을 호령하던 대해상세력이었다. 이들은 여몽연합군의 원정때도 일본을 지키는데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는 조선을 침공한 세력이기도 했다. 이러한 마쓰우라 세력의 본거지인 히라도성의 입구에는 그들의 내력이 대형 현판에 소개되어 있다.
히라도성의 내부는 역사자료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성주였던 마쓰우라 가문이 사용하던 갑옷도 있고, 칼도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의 규모와 구조를 알아 볼 수 있는 평면도도 전시되어 있었다. 히라도성의 천수각(天守閣)에 올라가니 다른 여늬 일본성과 마찬가지로 일대의 지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천수각이라고 하는 것은 다층으로 되어 있는 일본성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방을 말한다. 이곳에서 성주들은 자신의 관할구역을 관찰하였다는 것이다. 천수각에서 바라보는 히라도 주변의 해협은 그야말로 해상 요충이라고 할만하였다. 그곳만 봉쇄하면 선박들이 엄청난 거리를 우회하여야 한다는 것은 수로에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히라도의 번주였던 마쓰우라 히로무가 착용했다던 갑옷이 전시되어있다.
▲ 히라도성 천수각에서 내려다본 히라도 해안 모습
그러니 이러한 해상요충을 여몽연합군이 점령하려고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히라도는 이러한 해상과의 근접성으로 일찍부터 외래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이 지역에 오니 적지 않은 교회당의 소개 문건을 볼 수가 있다. 일본은 본디 신도와 불교의 나라인데, 유럽 문화가 일찍 전래되었던 이 지역에서는 기독교문화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일본에 꽃피운 조선의 도자기 문화
악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예정된 일정은 꾸려나가게 되어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날의 숙소는 우레시노 온천마을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주 이름있는 온천지대이다.
이러한 숙소를 앞에 두고 기사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아리타(有田)였다. 아리타는 일본의 이마리(伊万里), 샤쓰마(薩摩)와 함께 대규모 도자기 도시이다. 특히 아리타는 임진왜란때 일본에 건너 간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이 뿌리를 내린 곳으로 유명하다. 또 다른 도공 심수관(沈壽寬)이 뿌리를 내린 곳은 샤쓰마이다. 아리타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 와서 이삼평의 흔적은 보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일행은 철로 뒤로 보이는 도리이(鳥居)를 향해서 걸었다. 이곳에서는 이삼평을 도조(陶祖)라고 기록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신사가 도산신사(陶山神社)이다. 왜 조선의 도자기 예술이 이곳에서 꽃피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기분이 꼭 좋지만은 않았다. 우리의 것에 대한 애착과 그것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비쳐졌다.
▲ '이삼평 비 ' '이삼평 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 도산신사를 오르는 건널목의 경고판. 한글이 크게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리타와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함을 알수있다.
▲ 도조 이삼평을 모신 신사답게 도리이 및 사자상이 도자기로 되어있다.
우레시노(嬉野) 온천마을에 도착했다. 우리가 머물 곳은 봉양(鳳陽) 호텔. 이곳의 온천은 마그네슘이 풍부하게 함유된 온천수로 만지면 미끈덕 미끈덕한 것이 기분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온천과 저녁을 마치고 부근의 이자카야를 들렀다. 아무래도 일본이 초행이 많은 일행들에게 다른 곳은 몰라도 가장 대중적인 이자카야의 분위기 정도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친절하게도 박사장의 누님이신 추자씨께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우중인데도 불구하고.
▲ 우레시노의 봉야호텔. 마그네슘이 풍부한 온천물이 일품이다. 피부 미용에 좋아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 호텔 부근의 이자카야
▲ 이자카야의 내부. 우리나라의 실내포장마차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 잇키섬의 무쿠리·고쿠리(蒙古·高麗)에 대한 기억
전날 늦게 도착하였지만, 잇키섬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호텔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잇키섬을 답사하고, 하루 숙박을 하고 다음날 후쿠오카로 돌아와 귀국을 하는 것이었다. 전날 우리를 우레시노로 안내했던 기사가 하카다항까지 인도하였다.
제트호일이라고 하는 쾌속선이 우리 일행을 잇키섬으로 안내했다. 1시간이 조금 더 지난 거리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잇키섬의 아시베항이었다. 잇키섬에서 외부와 여객선이 닿는 곳은 아시베와 우라노코의 두 항구다. 우리를 마중 나온 차량과 안내인 유키코(由紀子)가 기다리고 있었다.
▲ 잇키여행사의 안내원 유키꼬(由紀子)씨
우리가 도착한 아시베항(芦辺港)의 선착장은 입구부터 여몽연합군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의 영웅이라고 하는 쇼니(少貳資時)의 동상이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쇼니는 19세로 여몽연합군의 2차 공격때 전사한 인물이다. 이 곳에서 쇼니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것 같다.
▲ 아시베항 배머리에 세워진 쇼니 쓰케도키의 동상.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19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잇키섬에는 그의 무덤 및 그와 관련된 표석이 많이 존재한다.
아시베항구는 가까운 곳에 잇키신사가 있다. 잇키신사는 마치 원구에 대한 반감을 고무시키고자 하는 그런 분위를 연출하고 있었다. 먼저 입구에 서 있는 도리이와 바람에 펄럭이는 일장기의 행렬이 새삼 일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 유끼고는 이미 우리가 가야할 곳을 지도에 표시해 가지고 있었다. 답사지의 순위를 조절 중.
▲ 잇키신사 돌기둥(도리이)
▲ 잇키신사 내부 모습
잇키신사는 두차례의 여몽연합군의 일본 공격시에 초토화되었던 격전지였다. 고전장(古戰場)이라는 표석이 여기 저기 보이고, 바다에서 건졌다고 하는 여몽연합군의 군선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닷으로 사용한 큰 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 닷돌들이 고려의 땅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설명은 아무데도 없다.
▲ 잇키신사 위 해안에 전시해 놓은 닷돌(碇石). 2차 일본정벌 당시 침몰한 여몽연합군의 함선에서 인양한 것이다.
▲ 쇼니 쓰케도키의 묘
잇키섬은 대륙에 대한 반감이 아주 극심하다. 이곳에는 무쿠리와 고쿠리에 대한 아주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무쿠리는 몽고, 고쿠리는 고려를 말하는데 이들이 잇키섬에 대하여 잔혹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로 깎아 만든 무쿠리·고쿠리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잇키섬에는 울던 아이에게 ‘무쿠리고쿠리가 온다’라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우리가 ‘애비가 온다’라고 하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애비는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잘라간 조선인의 이비(耳鼻)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본어의 비참하다는 뜻의 단어인 ‘무고이’의 무는 무쿠리에서, 고는 고쿠리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이다. 여몽연합군에 대한 좋지 않은 역사적 정서가 남아 있는 것이다.
- 천인총에서의 고유제
잇키섬에는 천인총이라는 이름의 돌무덤들이 여럿 있다. 문자 그대로 1천명의 무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인이 죽어서 만인의총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ㄷ 이 천인총의 안내문은 거의 동일하다. 그 가운데에는 원정군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였고, 코와 귀를 베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 했다. 여성을 한 곳에 모아두고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새끼로 엮어 끌고 다니며 즐겼다. 그리고 군선에 묶어두어 익사시켰다’는 내용들이 나온다. 여몽연합군의 잔학성을 알려 반감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천인총 가운데 하나가 잇키신사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이곳에서 고유제를 지냈다. 충렬공의 후손들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해왔다. 가로로 길게 늘인 현수막과 간단한 제의에 필요한 용기와 물품들을 준비해 온 것이다. 고유제가 끝나자 선조의 은총을 함께 하는 음복의 순서도 빠질 수 없다.
천인총을 지나서 찾은 곳은 피신굴이다. 잇키섬의 주민들이 여몽연합군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았는데,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 잇키섬의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죽였다고 한다. 아이들이 울기라도 하면 ‘무쿠리고쿠리’에게 발각이 되어 몰살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일본에 갖는 좋지 않은 감정 그 이상으로 이 일대에 유전된 대륙에 대한 이질적 정서는 이토록 강렬하다는 것이 씁쓸하기 조차 했다.
▲ 산이 많은 대마도와는 달리 평야가 많은 잇키섬에서는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야산 숲속에 구멍을 파고 숨었다.
- 금강산도 식후경이지만, 음식값은 치루어야
이 세상 여러 말 가운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제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아닐까? 조상의 발자취를 쫓는 것도 이쯤 했으면, 먹을 것은 먹고 다녀야 하는 법. 유키코씨가 안내한 식당으로 향했다. 아열대풍의 아담한 식당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일본식 정식이다. 생선회 몇점과 튀김 두어조각, 그리고 미소시루와 함께 지리를 곁들인 점심이다. 걱정했던 날씨가 파란 기운을 뿜으며 풍치를 더하니 천인총, 피신굴 등 살벌한 전장만을 답사하고 있었지만, 그런데로 정신적인 휴식공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못내 아쉬어서 도열하다시피 배웅을 나온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에게 보이지 않을 까지 손을 흔들며 잠깐의 만남에서 헤어짐을 아쉬어 했다.
▲ 유끼꼬의 요청으로 식당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유끼꼬의 휴대폰으로 찍힌 이사진이 잇키일일신문(壱岐日々新聞)에 기사로 나왔다.
그런데 익 웬일인가? 호사다마가 바로 이것이다. 총무를 너무나 꼼꼼이 하던 태영씨가 갑자기 난색을 표명한다. 잘먹은 점심값을 지불하지 않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버스를 돌려 다시 그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일본인에 대한 촌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식대를 받지 않고도 그렇게 오랫동안 손을 흔들고 있었을까하는데 대한 의문이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아마도 그 중 누군가가 받았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든 우리로서는 상당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 우리에게 그들은 또 다시 손을 끝까지 흔들며 배웅을 해주었다. 알 수 없는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불쾌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신성(新城)고전장과 고려교를 찾았다. 잇키섬에 상륙했던 주력은 고려군이었다. 그래서인지 고려라는 명칭이 지명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고려군이 이곳에 상륙했다면 김방경 장군의 지휘소도 이 부근 어디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러한 추정을 하면서 이 일대의 유적들을 확인하였다.
▲ 문영의 역 고전장 안내판. 일본에서는 1차 일본정벌을 '분에이노에키' 문영의 역(文永의 役)이라 부르고, 2차 일본정벌을 '고안노에키' 홍안의 역(弘安의 役)이라 부른다.
▲ 고려교 표석. 아쉽게도 부근에서 고려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 고려교 표석 부근에 산재한 석축들.
이어서 잇키의 향토관과 하르노쯔지유적을 답사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잇키의 향토지에서 기자가 방문을 하였다. 이들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이 날의 마지막 일정인 안국사를 향했다. 그러나 안국사에 도착을 하자 너무 날이 늦었다. 안국사에는 고려초에 제작된 『고려판대반야경』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일본국가지정문화재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유래는 잘 알 수가 없다.
이제 3박4일의 마지막 방을 이곳 잇키섬에서 보내게 되었다. 잇키섬의 숙박처인 보성장으로 향했다. 보성장은 온천은 없었고, 그 대신 대중탕이 있었다.
- 잇키 향토박물관을 거쳐 후쿠오카로
전날의 여흥이 아침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나도 정신이 들어보니 룸메이트인 우회씨의 발 밑에 나둥그러져 자고 있는 것이다. 내 스스로도 지나쳤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떡이 되도록 마시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모두 제 시간에 출발하는데 늦지를 않았다. 유키코씨는 여전히 밝게 웃으며 우리를 안내했다. 잇키섬의 또다른 항구인 코노우라항에 도착하자 잇키의 신문사에서 다시 인터뷰를 요청한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다시 배가 멀리 떠나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는 유끼꼬씨와 신문사의 기자를 뒤로하고 다시 후쿠오카로 향하였다.
▲ 잇키의 신문기자와 인터뷰 중인 우회님
후쿠오카에서 우리가 처음 답사한 곳은 원구방루였다. 첫날 하코자키에 있는 원구방루의 유적에 실망하기도 했던 일행들은 서남학원대학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일본이 여몽연합군의 1차 공격때에 얼마나 많은 위협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비록 일부분이었지만, 그 너비가 2미터 이상이고 높이가 3미터는 되어 보임직한 돌덩어리들이 쌓인 형상은 난공불락으로 여길만하였다.
▲ 서남학원대학 안에 있는 방루. 대학 신축 당시 발견되어 건물의 구조가 바뀌었다.
원구방루 다음으로 찾은 곳은 소하라(조원)의 지휘소였다. 이곳 지휘소는 아마도 김방경장군의 발길이 닿은 곳임은 거의 확실하다고 하겠다. 당시 전황으로 보면 제1차 원정때에 여몽연합군은 이곳을 사령부로 삼아 태재부로 재차 진격을 하려다가 의견에 충돌에 생겨 군선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 고려군은 내친 김에 공격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몽고군은 이를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폭풍으로 대손실만 입은 채 퇴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군이 이곳 소하라를 지휘소로 하였을 것이고, 그 사령관의 한 사람이었던 김방경장군의 발길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소하라 지휘소는 지금은 공원이었다. 700여년전, 운명을 결한 접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던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다란 오석에 새겨진 글자 몇 개만이 역사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둘러보니 정말 지휘소로는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하라산이라고 하지만, 얕으막한 동산에 불과한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이른바 감제고지라고 하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절감했다.
▲ 여몽연합군의 지휘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하라 공원 정상의 평지
김방경장군을 생각하며, 당시 함께 했을 고려군을 상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어쩌면 이번 여행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후쿠오카시립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을 최종 목적지로 삼은 것은 여행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시립박물관은 부지도 넓고, 정원에는 브로델의 조각들이 들어서 있는 예술적 분위기를 띠었지만, 관람객도 많지 않고 전시된 유물도 많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사였던 원구(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와 관련된 내용도 소락하였다. 그러나 이곳 서점에서 귀중한 자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고 자위하는데 그쳐야 했다.
▲ 후쿠오카박물관 전경
▲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
▲ 풍신수길주인장(豊臣秀吉朱印狀) . 임란당시 조선에 출병한 왜장에게 내리는 풍신수길의 명령서
- 아쉬움을 남기고
점심을 후쿠오카 시립박물관 식당에서 일본식 도시락으로 하였다. 이제 긴장이 풀어졌는지 사뭇 움직이기 싫어하는 눈치들이다. 결국 공항으로 바로 가기로 했다. 몇몇은 후쿠오카 시내 구경 겸 쇼핑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다수가 미리 공항에서 여유있게 기다리다 가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3박4일의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을 따라 나선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돌이켜 보니 3박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하루마다가 강행군이었다. 어느 하루도 석양이라도 보는 여유를 가지며 숙소로 향한 적이 없었다. 겨우 마지막날, 조금 일찍 공항에서 대기한 것 이외에는 너무도 빠듯한 일정이었다.
그런데도 무척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역(異域)에서 숨진채 돌아갈 고향을 떠도는 많은 고려인들의 영혼이 혹여 이 부근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였다. 선물로 하려고 했던 일본술을 따서 마시는 일행도 있었다. 몇몇은 공항 로비에 있는 스낵바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유사 이래 최고의 환율을 기록했던 시기에 그나마 쉴 틈없이 강행군을 해야만 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강풍과 폭우를 무릅쓰면서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히라도성에 올라갔던 열정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들과 함께 한 3박4일 일본 큐슈 답사, 여몽연합군의 전적지를 찾아간 답사는 문자 그대로 충과 열이 함께 한 여정이었다.
댓글목록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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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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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렬공 발자취를 더듬으며 장도에 오르셔서 큰일을 해놓으셨습니다
무척 감명 깊게 읽고 보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비행기와 충렬공 멋지십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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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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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이재범 교수님의 해박하신 역사 해설과 함께 현장감 넘치는 여정 기록, 정말 명문을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었는데, 이렇게 행사 후기를 보니 다소 위안이 됩니다.
다녀 오신 여러분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안김의 역사에 대단히 중요하고 귀한 일을 하고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답사 장소마다 명품 사진으로 남겨 주신 발용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