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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金方慶) 소전(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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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4-27 16:43 조회3,40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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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金方慶) 소전(小傳)


   1) 출  생

   1212년 태어나 어려서 조부 김민성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후에 ‘전고(典故)와 예식(禮式)에 밝았’ 으며, ‘과거 급제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시(詩)ㆍ서(書)ㆍ예(禮) 및 과거 급제를 위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206년 몽골 초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은 1215년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북경)를 점령하는 등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요나라 지도자 야율유가는 요양을 차지하고, 금나라 장수 포선만노는 대진국, 동진국을 세웠으며, 1216년부터는 거란 유민 수만명이 서북면 일대로 밀려 내려와 경기도 일대까지 이르는 등 만주와 서북면 일대는 절대 지배자 없는 완충지대의 형세가 지속되었다. 1219년 강동성에서 김취려, 조충 등이 몽골군과 합세하여 거란군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1234년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멸망하였다.

   2) 출사와 문무겸전, 출장입상

   1227년 16세의 나이로 음직으로 양온서 동정으로 출사하였다. 이때 백부 김창은 최이가 설치한 정방(政房)에서 전선(銓選-인재 선발)임무를 맡고 있었다. 시중 최종준이 김방경에게 군국의 중요한 임무를 맡길 정도로 신임하였다. 최종준의 사위가 이장용이고, 이장용은 김방경의 처남 박휘의 장인이었으며, 김방경의 자매로 추정되는 영가군부인 김씨가 최종준의 동생 최종자의 손자 최문본의 배위였다.

   김방경은 문무반, 내외직을 넘나들면서 문무겸전, 출장입상으로 명장이자 명재상으로 60년 가까이 벼슬길에 있었다. (16세)1227년 양온서 동정을 시작으로 대정(隊正), 태자부 견룡(牽龍), 산원(散員), 식목녹사(式目錄事), 서북면 병마녹사(綠事), 별장(別將), 낭장(郎將), 감찰어사(監察御史) 역임. (36세)1247년 서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 견룡행수(牽龍行首), 장군(將軍), 급사중(給事中), 어사중승(御史中丞),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 서북면 병마사 역임. (49세)1260년 출배별감(出排別監), 지합문형부사,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선군별감사, 상장군(上將軍), 남경(南京)유수, 판례빈성사, 서북면 병마사,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 역임.

   (59세)1270년 삼별초 토벌시 역적추토사, 통군참지정사(統軍參知政事),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 행영중군 병마원수(行瑩中軍 兵馬元帥), 문하시중(侍中),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원세조) 역임. (63세)1274년 일본 정벌시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判御史臺事), 도원수(都元帥), 호두금패(虎頭金牌, *원세조), 첨의중찬(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 역임.

   (72세)1283년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中重大匡判都僉議事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 (84세)1295년 도첨의령(都僉議令)에 가자. 세자(*충선왕)에 의해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식읍(食邑)일천호 실봉(實封)삼백호.

   (사후7년)1307년 충선왕에 의해 선충협모정난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 추증. 시호 충렬(忠烈). 왕명으로 신도비(神道碑) 세움.

   3) 강화도 천도와 항몽전쟁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고려 침략은 이후 7차례에 걸쳐 30년 넘게 고려 전 국토와 백성을 유린하였다.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시 박서, 김경손 등이 서북면 일대에투입되어 항몽전쟁을 전개하였다. 1232년 고려 정부는 최이, 최종준, 김창(*김방경 백부) 등의 주도로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이때 김방경은 정족산 전등사 아래 마을(현 길상면 온수리)에 거주하였으며, 수많은 몽골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1247년에는 북계 병마사 노연의 휘하에 있으면서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위도(평북 정주 앞바다 섬)에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 간척과 개간사업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서북면 일대는 김방경의 정치적 배경이 되어 훗날 무고사건 때는 서북민의 후원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서북면 일대 세력은 몽골에 투항하는 자가 많았는데 홍복원은 동경총관이 되어 요동의 고려인을 다스렸으며 아들 홍다구, 손자 홍중희 등이 대대로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 고려를 괴롭혔고, 홍다구는 김방경과 평생을 대립하였다.

   4) 김방경 가의 불교

   조계종 수선사 개창조인 보조국사(지눌)가 1210년 입적하였다. 김방경은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여 지눌이 1209년 저술한 선수행의 요체를 설명한 <목우자사기>를 애독했다.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은 1224년 원진국사(승형)의 비문, 1235년 수선사 2세인 진각국사(혜심)의 비문을 썼다. 김방경의 정치적 후원자인 최종준은 1226년 <어의촬요방>, 1236년 <향약집성방> 등 의서를 지었으며, 1239년 수국사(남경)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였다. 1232년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간행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 백운화상이 지은 <直指>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됨)

   최우, 정안, 수기, 몽여, 이규보 등의 주도하에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 팔만대장경이 제작되었다. 해인사에 750년 넘게 목판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제일의 문화재로 손꼽히고 있다.(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

   5) 30년 항몽전쟁 종식과 몽골의 지배

   1241년 이규보, 1246년 최종준, 1249년 최우의 죽음과 1253년 김효인, 1256년 김창의 죽음으로 김방경의 정치적 배경이자 항몽전쟁의 주도세력이 사라져 가고 30년 넘게 지속된 항몽전쟁에도 불구하고 전 국토와 백성의 유린이 계속되자 몽골과의 화친 움직임이 높아갔다.

   1259년 원종이 몽골로 들어가 쿠빌라이를 만난 이후 고려는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티벳, 대리의 점령과 고려와의 화친을 통하여 대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연경에 궁궐을 조성하여 대도라 하였고, 개평부는 상도라 하여 여름철 수도로 삼았으며, 1271년 대원 제국을 선포하였다. 몽골족 1,2백만명이 1,2억명을 다스리는 다민족 세계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중앙아시아, 이슬람제국은 물론 러시아, 헝가리, 다뉴브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역사상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서양 문명 교류의 기반이 놓이고 있었다.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항주)를 함락하였으며, 1279년에는 문천상 등 남송 부흥세력까지 무너졌다. 1274년에는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들어와 1291년까지 이후 17년간 머물다가 이탈리아로 돌아가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 라고 하는 <동방견문록>을 저술하였다.

   6) 8차례 이상 원나라 사행

   김방경은 8차례 넘게 원나라 사행을 다녀왔다. (54세)1265년 1월 진봉사로, (58세)1269년 9월 임연의 원종 폐위시, (62세)1273년 7월 삼별초 토벌후, (64세)1275년 1월 일본정벌후, (65세)1276년 7월 성절사(황제생일 축하)로, (67세)1278년 7월 무고사건, 대청도 유배후, (67세)1278년 12월말 홍다구 세력 척결후 대도에 다녀왔으며, 1279년에는 아들 김흔(29세)이 의관(衣官)자제 25인과 함께 뚤루게(禿魯花, *인질)로 들어갔다. (69세)1280년 11월 아들 김순을 데리고 하정사(신년 축하)로, (85세)1296년 9월 충렬왕을 따라 대도에 들어가 고려승속 10인과 함께 몽산덕이와 서신으로 교유하였다. 아들 김흔은 1299년 한희유 등 충렬왕파에 밀려 대도에 들어가 7년간이나 머물다가 1307년 돌아왔다.

   김방경은 원나라 사행을 통하여 국제적 정세와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승상 안동과 교유가 있었으며, 후에 손녀딸이 승상 아홀반의 아들 별리가불화에게 출가하였으므로 아홀반과도 교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장용은 왕악과, 박전지는 왕악의 외조카 왕지강 및 철산소경과 교유하였다. 이승휴는 후우현과 교유하였으며, 그가 지은 연행록 <빈왕록>은 기록상 최초의 연행록이다. 김방경이 시중(첨의중찬)으로 있을 당시인 1276년 어학 기관인 통문관을 설치하였으며, 어학 교재로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등이 발간되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노걸대> 원본이 1998년 한국에서 발굴됨)

   7) 100년 무신정권 종식과 삼별초 토벌

   1269년 임연, 임유무 제거로 고려중기 100년 가까이 지속된 무신정권이 종식되고 개경환도가 단행되자 강화도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다. 삼별초는 1227년 집권자 최이가 순찰을 목적으로 조직한 집단으로 후에는 항몽전쟁은 물론 각종 권력투쟁에 투입되는 등 권력화 되었으며, 일본과의 연대를 시도하기도 하였다(1997년 동경대 사료편찬소에서 <고려첩장불심조조> 발굴됨).

   김방경은 이때 무신정권을 장악할 위치에 이르렀으나 무신정권을 연장하지 않고 왕실 편에 서서 고려의 사직을 보존하는 입장에 있었다. 배중손, 노영희, 김통정 등 삼별초 세력은 이후 3년간 진도, 제주도를 비롯한 서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다. 김방경은 단기로 전주 나주 탈환을 시작으로 아해, 흔도 등 원나라 장수들과 함께 진도와 제주도의 삼별초를 토벌하였다. 유천우가 이를 축하하는 시를 지은 것이 <동문선>에 전한다. 김방경은 시중에 올라 이후 10년 넘게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이때 삼별초의 잔존세력중 일부가 유구(오키나와)까지 이동하였다는 설도 있다.(최근 오키나와에서 계유<?1273>명 고려기와가 다수 발굴)

   8) 여원연합군을 이끌고 두차례 일본정벌

   원 세조 쿠빌라이의 명으로 1274년과 1281년 두차례에 걸쳐 여원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정벌 길에 올랐다. 대마도, 일기도를 거쳐 박다만(현 후코오카) 일대를 공략하였으나 태풍 등으로 회군하였다. 1274년 1차 정벌에는 둘째아들 김흔이, 1281년 2차 정벌에는 셋째아들 김순이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였다. 한편 김방경은 1263년, 1281년에는 남해안의 왜구와 북방의 야인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일본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 전북 부안, 전남 장흥 등지에서 전함의 고려식 건조를 지휘하였으며, 군량 확보를 위하여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 고부 눌제 등 저수지의 개축을 주도하였다. 원감국사(충지)가 일본정벌에 앞서 김방경을 축수하는 글을 짓기도 하였다. 김해 금강사에 주둔하면서 송악신에 제사하여 송악단과 장군차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경기도 광주 경안천에 경안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1281년 2차 일본정벌 회군길에 고향 안동에 들러 충렬왕을 만나고 영호루에 올라 지은 시가 <동문선>에 전해 온다. 김방경은 앵계리, 고류동 등 개성 일대에 거주하였다. 앵계리 인근 보제사에 5백나한당을 화려하게 건축하기도 하였다.

   9) 수차례의 무고사건과 원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

   김방경은 (57세)1268년 김준, 임연, 전분 등 무신세력과의 대립, (59세)1270년 삼별초의 난 진압중 홍찬, 홍기의 무고, (65세)1276년 제국대장공주 세력과의 대립, (67세)1278년 부원배 홍다구,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 등에 의한 무고사건으로 대청도에 유배, (71세)1282년 죽판궁 사건 등 여러차례 무고사건에 휘말렸으나 유경의 변호 및 원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 등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1291년 홍다구의 죽음과 1294년 쿠빌라이의 죽음 이후에는 김방경 가의 사람들이 충선왕의 개혁정치를 후원함으로써 충렬왕 측근세력과 대립하여 1300년 김방경의 예장을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1307년 한희유, 충렬왕이 죽을 때까지 대립관계가 지속되었다.

   10) 1283년 72세로 치사후 민족의 정통성 확립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은 1231년 전중시어사로, 당시 국자감 四門學에서는 <효경> <논어> <예기> <춘추좌씨전> 등 사서삼경, 제가백가 등을 가르쳤다. 김방경의 백부 김창은 1240년경 강화도에서 이규보와 함께 사학기관인 성명재를 재건하였다. 이승휴는 12세(1235년)에 <좌전(左傳)> <주역(周易)>을 배우고, 14세(1237년)에 문헌공도(文憲公徒) 낙성재(樂聖齋)에서 <주역> <상서> <예기> <주례> 등 유교 경전과 중국의 역사책인 <사기> <한서> <후한서> 등을 공부하고 시와 문장 짓기를 익혔다고 한다. <노걸대>에 보면 당시 <논어>, <맹자>, <소학>을 공부하고, 사서, <주역>, <자치통감>, <삼국지評話>를 대도에서 구입하는 기록이 있다.

   김방경은 전고(典故)와 예식(禮式)에 밝았으며, 병법은 물론(춘추좌씨전, 손자병법, 김해병서), 주역, 불교에 조례가 깊었음을 볼때(단모부에 대한 답신, 신화상에게 답한 글), 어려서부터 조부, 부, 백부의 영향하에 유교 경전과 역사책, 시문 공부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1283년 72세로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국가 중대사에 자문하였다. 김방경은 향리에서 진출한 신흥 세력이었으나 수많은 항몽전쟁, 삼별초 토벌, 일본정벌 전공과 10년 재상을 거쳐 대벌족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원 세조로부터 금부를 받고 도원수가 되자 권력이 온 나라에 미쳤으며, 그가 지휘한 전장이 전국의 주와 군에 분포되어 있게 되었으므로 부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내상(內廂)이라고 일컬으면서 날마다 그의 문전에서 경비를 서는 등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방경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 안동에 자주 왕래하였을 것이며, 회곡리 집터와 정자터, 상락대 등이 남아 있다. <초당일기>도 저술하였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보각국사(일연)는 1281년경 <삼국유사>를 저술하였으며, 만년(1284-1289)에 군위 인각사에 우거하였다. 이승휴는 삼척 두타산 천은사 등지에 은거하면서 1287년 <제왕운기>를 저술하는 등 몽골에 우월한 고려의 오랜 역사와 민족적 정통성을 고양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1290년에는 최탄, 한신의 투항이후 20년간 몽골 직할령에 들어갔던 동녕부(서경)를 돌려 받았다.

   또한 김방경는 1288년 홍규 변호, 1298년 조인규 변호 등 원나라 출신 세력에 맞서 고려 중신들을 보호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으며, 1290년에 원의 반당인 합단의 침략시에는 김방경 휘하였던 박지량, 한희유, 김흔, 나유 등이 합단적을 물리쳤다.

   11) 충선왕의 개혁정치를 후원

   1295년 세자(충선왕)에 의하여 상락국개국공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호를 받았다. 이를 기념하는 이승휴의 글(단모부>이 <동안거사집>에 전한다. 1298년 1월 충선왕이 등극한후 이때 이승휴를 비롯하여 조인규, 정가신, 안향 등과 김흔, 김순, 이진, 박전지 등 김방경 가의 인물들은 충선왕의 편에 서서 개혁정치를 후원하였다. 8개월만인 1298년 8월 충선왕이 대도로 물러가고 충렬왕이 다시 즉위하자 이승휴, 김순, 김승용 등은 정치적 타격을 입고, 특히 둘째아들 김흔은 한희유 등 충렬왕파와의 갈등으로 1299년 대도에 들어간 이후 7년간이나 머물게 된다.

   12) 말년 불교에 심취

   1295년 요암장로 등 고려 승속 8인이 중국 강남의 휴휴암에 은거하고 있던 참선 등 간화선을 주창하는 임제종 양기파의 몽산덕이를 찾아가 교유하였으며, <동안거사집>에 전하는 글(김방경이 만월봉 요요암 신화상에게 답한 글)을 보면 김방경은 말년에 지눌의 <목우자사기>와 신화상이 보낸 법어, 게송, 요요암명 등을 애독하였다. 1296년 겨울 보각국사(일연)의 수제자 혼구를 비롯하여 충렬왕비 정화궁주의 두 딸, 김방경, 김흔 등 10인의 승속이 고려의 만수상인을 통하여 몽산덕이와 서신으로 교유하였다. 1298년에는 몽산덕이가 이승휴와 서신으로 교유하기도 하였다.

   13) 1300년 89세로 별세

   1300년 89세로 개성 백목동 앵계리의 본댁에서 별세하였다. 앵계리는 1200년대 초 이규보가 한때 거주한 곳이며, 1200년대 말에는 정인경, 유자우(*이승휴의 사위) 등이 살던 곳이다. 당시 한희유 등 충렬왕파가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예장을 치르지 못하고 유언에 의하여 고향인 예안현 서쪽 산록(현 안동 녹전 죽송리)에 장사지냈다. 셋째아들 김순의 요청으로 이진이 묘지명을 찬하였다.(이진은 이외에도 권단, 홍규 등의 묘지명을 찬함)

   14) 사후 김방경 가의 불교

   1307년 충선왕이 다시 권력을 잡고, 한희유가 죽자 연경에 있던 둘째아들 김흔이 귀국하였다. 이때 故 김방경에게 왕명으로 공신 추봉, 충렬공 시호와 함께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기록상 최초의 신도비라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1298년 셋째아들 김순은 동화사 홍진국존(혜영, *법상종 계열) 비문을 썼으며, 1302년 영가군부인 김씨(*김방경의 자매로 추정)의 영가발원문이 아미타불 복장물(*화엄종 계열)에서 발견되어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304년 강남에 유학중이던 원명국사(충감)가 몽산덕이의 수제자 철산소경을 데리고 고려로 왔을때 허평(*허공의 아들) 부부, 김변처 허씨(*허공의 딸), 권단 등과 교유하였다. 1306년 철산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 있던 허평 부부의 대장경을 중국 의춘현 대앙산에 옮기고 <고려국대장이안기>를 민지 찬, 김순 서로 세웠으며, 1314년 원관이 중국 항주 혜인사에 대장경을 희사하고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 사대장경기>를 민지 찬, 김순 서로 세웠다.

   김순의 아들 김사순은 출가하여 자은종(*법상종) 대덕이 되었으며, 1327년 김영후는 상주목사로 있으면서 법주사(*법상종 계열) 자정국존과 교유하였다.

   15) 창조와 불멸! 800년 넘어 영원히 살아 있는 김방경 시대

   김방경은 문무겸전 출장입상, 명재상이자 명장. 고려 최대의 安社功臣, 난세의 영웅. 항쟁과 굴종 사이를 오간 고려의 버팀목. 고려를 구한 거시적 안목의 실리주의자. 일본과 대적 우리 민족의 명예를 드높인 5대 인물. 고려의 안동 인물 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신라 중심이었던 고대 역사를 이규보의 <동명왕편>,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 고구려 및 단군조선까지 확대하였고, 한국 제1의 문화재인 위대한 민족유산 팔만대장경,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상정고금예문>, 의학서 <향약집성방> 등이 출현하였고, 안향 등에 의한 성리학의 수용과 쿠빌라이가 티벳 승려를 통해 만든 파스파문자는 조선 세종의 한글 창제에 영향을 주었으며, 몽산덕이의 <육조단경>, 간화선을 이은 지눌과 혜심의 조계종 법맥은 물론 진돗개, 안동소주, 하회탈, 별신굿놀이, 차전놀이 등은 몽골과의 교류 속에 전래되어 꽃을 피워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세계 국가 원 제국과의 교류 속에 고려에는 몽고풍이 유행하고, ‘마누라’ ‘아기’ 등 몽골어가 들어왔으며, 당시 원에서 유행하던 잡극 <삼국지評話>는 이후 원말명초 나관중을 거쳐 동아시아 불멸의 고전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충렬왕 때 추적은 <명심보감>을 간행되었다. 한편 원 제국에는 오늘날의 韓流인 高麗風이 불었으며, 북경, 요양, 심양 등지에는 오늘날의 코리아타운인 高麗莊 등이 생겨났으며, 후에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 등 고려 세력이 원 황실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팍스 몽골리아는 동서양 문명 교류길인 몽골리안 루트를 통하여 콜럼버스의 세계탐험, 르네상스 등 유럽의 근대세계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김방경 시대는 고려중기 100년 무신정권과 몽골의 말발굽 아래 모든 것이 파괴된 황무지에 세계국가 대원제국의 국제도시 대도로부터 전해온 새로운 문명과 고려의 민족적 자주성이 융합하여 꽃을 피운 한국 最初, 最古로 여겨지는 창조물들이 잉태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2012년 김방경 탄생 800주년을 맞아 그의 불멸의 위업을 되새겨 앞으로 나아가야 할때다. 김방경 시대정신의 재조명은 물론 한중일이 함께 만드는 대하드라마 및 영화 제작, 한국 최초의 항공모함은 ‘김방경함’ 으로 명명 등.

   16) 21세기 新 세계사의 주역

   13세기 팍스 몽골리아 이후 유럽, 미국으로 이어졌던 세계의 중심이 태평강을 건너 다시 동아시아로 급속하게 이동하고 있다. 중국의 급팽창, 한국의 약진, 일본의 건재 등 2008년 전대미문의 세계적 경제위기 이후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어 태평양 문명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21세기 첨단 지식정보사회! 한국은 세계 IT산업을 선도하고 있으며, 문화 콘텐츠, 韓食의 세계화로 韓流 열풍이 식을 줄 모르고 있다.

   21세기 해양시대! 한국 조선업은 세계 시장을 석권한지 오래이며, 대단위 간척사업, 4대강 운하 건설 등 해양대국으로 세계 해양시대를 선도하고, 나아가 우주시대를 전개하고 있다. 800년 넘어 세계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기본과 원칙을 바탕으로, 위기를 체질개선의 절호의 기회로, 진취적 도전 강인한 탐험정신, 그리고 창조의 불멸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여 다시한번 세계사의 주역으로 솟구쳐 일어나 우뚝 서야 할 때다.

  < 참고문헌 >

  김방경 고려를 지키고 안동에 돌아오다 (배영동, 장동익, 남인국, 2007)

  고려시대의 안동(안동시, 안동대학교, 2006)

  고려사 (사회과학원, 1963)

  금석문종합정보시스템 (인터넷 사이트)

  몽골의 침략과 30년 전쟁 (이이화, 1999)

  항몽전쟁 (구종서, 2007)

  풍도 (이노우에 야스시, 1963)

  검푸른 해협 (장홍규 옮김, 2001)

  불멸의 민족혼 삼별초 (구종서, 2008)

  김방경 일본을 정벌하라(김봉석, 2006)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정순태, 2007)

  일본정벌군 (제성욱, 2008)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2005)

  쿠빌라이칸, 그의 삶과 시대 (모리스 로사비, 2008)

  고려에 시집온 칭기스칸의 딸들 (이한수, 2006)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김호동 역주, 2000)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박상진, 2007)

  일연을 묻는다 (고운기, 2006)

  이승휴의 삶과 정치활동 (장을병, 2008)

  고려에 남긴 휴휴암의 불빛 몽산덕이 (허흥식, 2008)

  원대여사자료집록 (장동익, 1997)

  원본 노걸대 (정광 역주, 2004)

  역사스페셜 (KBS, 2003)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lt;충렬공 실기&gt;에 넣어도 될는지 모르겠네요
오탈자, 내용 수정 지적 바랍니다.

김상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상석
작성일

  가감없는 단원별 핵심정리로 시대적 배경에 따른 정치, 종교와 문화의 개괄적 압축, 인물과 저술 등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셨습니다. 수년 전 청주에서 나누었던 대화 속 의중의 총체적 화룡점정이라 생각합니다.
6. 아들 "수" 와 참고문헌 "북역"을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