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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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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09-05-09 08:58 조회1,6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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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문의하신 김주(金湊)는 고려말 조선초의 인물로서 본관은 낙안(樂安)입니다.

본 문중에 고려시대의 인물로 김주(金湊)란 분은 안계십니다.

자주 뵙길 바랍니다.  

 

<김주 소개>-네이트한국학의 자료

김주(金湊). ?∼1404(태종 4).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낙안(樂安).
문과에 급제한 뒤 공민왕 때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간관(諫官) 정공권(鄭公權)이 신돈(辛旽)의 죄를 극간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곧 서용되어 비서감승(祕書監丞)의 직에 올랐다.
우왕 때 사헌집의(司憲執義)·지신사(知申事)·밀직제학(密直提學)·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였고, 1377년(우왕 3) 9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79년에 양광도(楊廣道)에 왜구가 침입하자 원수 도흥(都興)과 더불어 이를 막았다.
1386년 9월에 동지밀직사사 이숭인(李崇仁)과 더불어 중국 난징(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또, 1388년 5월 양광도지역에 왜구가 침입하여 유린하니 원수 도흥,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이를 막았다.
1389년(공양왕 1)에는 도평의사사 신청사(新廳舍)의 건축공사를 감독하였고, 1391년 8월에는 문하평리 겸 대사헌(門下評理兼大司憲)이 되어 상소를 올려 5도(五道)의 정부(丁夫)를 뽑아 도성을 수축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축성공사가 시작되자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10월에 공사가 너무 크다 하여 축성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규정(糾正)박자량, 집의(執義)우홍득, 사복부정(司僕副正) 변벌개(邊伐介), 한양부윤 유원정(柳爰廷) 등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392년 3월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2월에 예문춘추관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가 되었으며, 1393년(태조 2) 2월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로서 계룡산 아래 신도(新都)후보지의 새 도읍지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조사하던 중, 조운(漕運)과 도로 관계를 조사하는 데 참여하였다. 태조가 개성에 돌아간 뒤에도 그곳에 남아 신도경영을 감독하였다.
또, 한양천도 때 좌복야(左僕射)로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등과 더불어 새 도읍지 건설공사를 급속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어 1394년 9월 9일에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市廛)·도로의 기지를 선정, 구획하고, 심덕부와 더불어 현지에 남아 모든 건설사업을 감독, 시행하였다.
1398년(태조 7) 9월 제1차왕자의 난에 관련되어 김사행(金師行)이 참수당할 때, 그와 더불어 백성을 혹사하였다 하여 영주(寧州)로 유배되었으나 성곽 경영의 공로로 감형되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밀양 영남루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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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진주 남강의 촉석루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누각의 하나인 밀양 영남루(嶺南樓)는 밀양강 절벽 위에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지은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에 기둥의 간격을 넓게 하고 마루 바닥을 높여,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좌우의 건물들과 층계와 복도로 연결되어 건물의 배치에 변화를 주면서도 균형을 유지하였고, 전체적인 규모는 한결 더 웅장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의 명성에 어울리는 면목을 갖추었다.

최초 영남루는 고려시대 말(1265년)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신라시대의 절인 영남사(嶺南寺) 터에 같은 누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의 증축과 임진왜란 때 화재, 역대 밀양부사의 중건 등 과정을 겪었으며 1844년에 다시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남루'라 쓴 현판은 명필 성파(星波) 하동주가 쓴 것으로 유명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인이 영남루를 읊었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영남루 답사시 또 다른 볼거리는 영남루 경내와 주변바닥.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그 형태가 국화꽃 모양의 군(群)을 이루고 있는 석화(石花)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비온 후에 선명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이채로운 현상이다. 석재의 재질이 연한 납석이어서 쉽게 부식되거나 훼손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영남루 좌측 언덕에 있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된 아랑각(阿娘閣)도 둘러보자. 아랑각은 명종(1545~1567 재위) 때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는 '아랑전설(阿娘傳說)'의 주인공 아랑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이다.

아랑은 당시 밀양부사(密陽府使)의 딸로 성은 윤씨(尹氏), 이름은 '동옥(東玉)' 혹은 '정옥(貞玉)'이다. 어느날 유모를 따라 영남루(嶺南樓)로 달 구경을 갔다가 괴한의 핍박을 받자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 한다. 그 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여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혼백(魂魄)을 위로했다고전해지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1930년 영남루를 중수(重修)하면서 '정순아랑지비(貞純阿娘之碑)'라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碑閣)을 지어 아랑각이라 불렀다. 지금의 아랑사(阿娘祠)는 1965년 낡은 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맞배지붕의 3칸 사당과 삼문의 정문을 중창(重創)한 것이다. 사당 안에는 아랑의 영정과 위판을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아랑제 행사에서 규수를 뽑아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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