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16-2.(강진군마을사-군동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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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26 05:27 조회6,181회 댓글0건본문
강진군마을사(군동면)/강진군청/1998
☞ 옮긴이 註 : 강진의 안동김씨 입향조는 承用(승용)으로 1290년에 벼슬을 시작
하여 대제학을 거쳐 1329년 원나라에서 高麗君鎭國萬戶(고려군진국만호)를 지내
고 귀국하던 중 1334년 숨을 거두었다. 묘는 강진군 남산동에 있으며 “提學陵洞
(제학능동)”이라 불리운다. 그뒤 자손은 군동면 내동으로 옮겨 살고 있으며 현재
25세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강진군마을사는 각 면단위로 발행하고 있는데
작천면편 이후 5년만에 발행한 군동면편을 광명시립도서관에서 찾아 옮깁니다.
▣ 금강리 내동(錦江里 內洞) pp224~225
---금강리(錦江里)는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5㎞~3㎞지점에 위치하는데 내동,
안풍, 서은의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들을 건너 용소리, 서로
는 면소재지인 라천리, 남쪽으로는 경지 정리된 들과 강진. 장흥의 젖줄인 탐진강
이 있다. 북쪽으로는 화산리의 3개 마을이 위치한다.
---면소재지에서 국도 2호선을 따라 장흥쪽으로 가면 곧 바로 좌측으로 내동마
을이 나타나고 바로 다음에 안풍마을이 있다. 또 서은마을은 안풍마을에서 북서
쪽으로 농로를 따라 1㎞를 더 올라가면 있다.
---거주성씨 : 안동김씨 13.
▣ 마을연혁. pp227
---안동김씨 : 중시조 충렬공 방경(中始祖 方慶, 1212~1300)의 9대손 김질(金礩,
1519~ ? )이 1538년(중종 33) 한양에서 내려와 정착했다. 그리고 지금의 안골목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름을 내동(內洞)이라고 했다.
▣ 주요지명. pp228
---내동(砂洞 사동) : 고려말 도강김씨가 본 마을에 터를 잡고 속칭 사기등(砂器嶝)
에서 사기를 구우면서 마을이름을 사동(砂洞)이라 했다. 그후 안동김씨 김질(金礩,
1519~ ? )이 1538년 한양에서 내려와 본 마을에 정착했다. 그리고 밖이 훤이 내
다보이는 곳은 바람을 잘타고 생기가 없어진다는 풍수설 때문에 지금의 안골목에
터를 잡고 마을이름을 한자어로 내동(內洞)이라 했다고 전한다.
▣ 마을인물. pp236~237
★ 김질(金礩, 1519~ ? ) : 안동김씨 본 마을 입향조로 충렬공 방경(方慶)의 장남
판서공(判書公) 선(愃). 손자 대제학공(大提學公) 승용(承用). 증손 평리공(評理公)
후(厚). 현손 군사공(郡事公) 칠양(七陽) 등 4대의 묘가 작천면 토마리 남산동에
있는 김질이 그 선산에 성묘차 내려오다가 날이 저물어 안풍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안풍마을에는 해주오씨 오팽수(吳彭壽)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조
중종(1519) 때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여 은거했던 성균관(成均館) 진
사(進士)다. 오팽수는 김질의 풍채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가 총명함을 감탄하
고 곧 사위로 맞아들이고 전답(田畓)을 주어 내동에 정착하도록 했다. 김질은 군
사공 칠양의 5대손으로 그의 후손은 군사공파로서 내동에 세거(世居)하며 현재까
지 작천면 토마리에 있는 남산동 선영(先塋)을 세전수호(世傳守護)하고 있다.
★ 김흥업( ? ) : 김질의 아들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군기시직장(軍器寺
直長)으로 군사 100명을 이끌고 남당포(현 강진읍 남포)에서 왜적의 공격을 맞서
싸우다가 전사함. 그의 아들 김서봉 역시 아버지의 비보에 격분하여 싸우다가 전
사하였다.
★ 김재철(현 66세) : 1987년 마을 복지회관 건립기금 2,000만원 희사, 1990년대
금탑산업훈장 포장.
☞ 주(註) : 김재철씨에 대해 아시는 분 의견란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김경묵(작고) : 1980년대 대통령상 수상.(안동김씨로 추정)
★ 김일묵(현 49세) : 서울강남경찰서 경위 재임.(안동김씨로 추정)
▣ 문화유적. pp238~239
★ 안동김씨 제각 : 우목샘 위에 있는데 1971년 4월에 건립하였다.
★ 내동회관 : (전략) 1940년 서당골의 내동회관을 안골목으로 이축(移築)하여 계
속 회관으로 사용하는 한편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하였다. 1954년에 안골목
회관을 다시 마을 앞으로 이축하고 기와로 지붕개량을 하였다. 회관 내부구조는
방이 2개, 마루가 1개, 창고가 1개다. 내동회관은 두 차례의 이사로 몸살나게 뒤
틀리고 난장이가 되었다. 이사 때마다 주춧돌에 맞추느라 기둥 밑을 도려냈기 때
문이다. 1987년 봄에 회관 건물을 철거하고 김재철씨의 협찬으로 현대식 2층 건
물로 신축했다.
★ 하마석(下馬石) : 마을 진입로를 따라 사장나무 가까이 이르면 길 양측에 비석
모양의 자연석이 세워져 있으니 이 돌을 하마석이라 했다. 계급이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하마석 앞에서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정중하게 마을로 걸어 들어오라는
뜻을 알리는 표석(標石)이다. 1972년 경지 정리하면서 하마석이 철거되고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에 1984년 김재철(金在哲)이 안동김씨 세장비를 세웠다.(2002. 6.25)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태영/문 - 대부님, 동원그룹 회장이 김재철(金在哲) 씨인데 혹 그분 아닐까요? 김재철 종친은 군사공파이며, 1935년생입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상기 김재철씨는 현 동원그룹 회장이십니다. 마을 진입로와 도로포장도 해 주셨다고 합니다.
▣ 김주회 - 전국 시군지 탐방! 흥미진진합니다. 시군지 탐방이 모두 끝나면 문중사료의 기초를 세로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영환 - 현지탐방의 기초자료가 되는 아주 귀중한 작업을 하셨습닏.
▣ 김발용 - 동원그룹 김재철회장을 말씀하신 듯합니다.김재철종친은 1934년 甲戊年 생으로 부산수산대를 졸업하고 명예수산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 한국무역협회장으로 금탑산업훈장포상의 경력이 있습니다.그리고 안동김씨로 추정된다는 敬默공은 1991년 타계하신 김재철종친의 선친이신듯 싶습니다.
▣ 김은회 -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 옮긴이 註 : 강진의 안동김씨 입향조는 承用(승용)으로 1290년에 벼슬을 시작
하여 대제학을 거쳐 1329년 원나라에서 高麗君鎭國萬戶(고려군진국만호)를 지내
고 귀국하던 중 1334년 숨을 거두었다. 묘는 강진군 남산동에 있으며 “提學陵洞
(제학능동)”이라 불리운다. 그뒤 자손은 군동면 내동으로 옮겨 살고 있으며 현재
25세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강진군마을사는 각 면단위로 발행하고 있는데
작천면편 이후 5년만에 발행한 군동면편을 광명시립도서관에서 찾아 옮깁니다.
▣ 금강리 내동(錦江里 內洞) pp224~225
---금강리(錦江里)는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5㎞~3㎞지점에 위치하는데 내동,
안풍, 서은의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들을 건너 용소리, 서로
는 면소재지인 라천리, 남쪽으로는 경지 정리된 들과 강진. 장흥의 젖줄인 탐진강
이 있다. 북쪽으로는 화산리의 3개 마을이 위치한다.
---면소재지에서 국도 2호선을 따라 장흥쪽으로 가면 곧 바로 좌측으로 내동마
을이 나타나고 바로 다음에 안풍마을이 있다. 또 서은마을은 안풍마을에서 북서
쪽으로 농로를 따라 1㎞를 더 올라가면 있다.
---거주성씨 : 안동김씨 13.
▣ 마을연혁. pp227
---안동김씨 : 중시조 충렬공 방경(中始祖 方慶, 1212~1300)의 9대손 김질(金礩,
1519~ ? )이 1538년(중종 33) 한양에서 내려와 정착했다. 그리고 지금의 안골목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름을 내동(內洞)이라고 했다.
▣ 주요지명. pp228
---내동(砂洞 사동) : 고려말 도강김씨가 본 마을에 터를 잡고 속칭 사기등(砂器嶝)
에서 사기를 구우면서 마을이름을 사동(砂洞)이라 했다. 그후 안동김씨 김질(金礩,
1519~ ? )이 1538년 한양에서 내려와 본 마을에 정착했다. 그리고 밖이 훤이 내
다보이는 곳은 바람을 잘타고 생기가 없어진다는 풍수설 때문에 지금의 안골목에
터를 잡고 마을이름을 한자어로 내동(內洞)이라 했다고 전한다.
▣ 마을인물. pp236~237
★ 김질(金礩, 1519~ ? ) : 안동김씨 본 마을 입향조로 충렬공 방경(方慶)의 장남
판서공(判書公) 선(愃). 손자 대제학공(大提學公) 승용(承用). 증손 평리공(評理公)
후(厚). 현손 군사공(郡事公) 칠양(七陽) 등 4대의 묘가 작천면 토마리 남산동에
있는 김질이 그 선산에 성묘차 내려오다가 날이 저물어 안풍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안풍마을에는 해주오씨 오팽수(吳彭壽)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조
중종(1519) 때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여 은거했던 성균관(成均館) 진
사(進士)다. 오팽수는 김질의 풍채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가 총명함을 감탄하
고 곧 사위로 맞아들이고 전답(田畓)을 주어 내동에 정착하도록 했다. 김질은 군
사공 칠양의 5대손으로 그의 후손은 군사공파로서 내동에 세거(世居)하며 현재까
지 작천면 토마리에 있는 남산동 선영(先塋)을 세전수호(世傳守護)하고 있다.
★ 김흥업( ? ) : 김질의 아들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군기시직장(軍器寺
直長)으로 군사 100명을 이끌고 남당포(현 강진읍 남포)에서 왜적의 공격을 맞서
싸우다가 전사함. 그의 아들 김서봉 역시 아버지의 비보에 격분하여 싸우다가 전
사하였다.
★ 김재철(현 66세) : 1987년 마을 복지회관 건립기금 2,000만원 희사, 1990년대
금탑산업훈장 포장.
☞ 주(註) : 김재철씨에 대해 아시는 분 의견란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김경묵(작고) : 1980년대 대통령상 수상.(안동김씨로 추정)
★ 김일묵(현 49세) : 서울강남경찰서 경위 재임.(안동김씨로 추정)
▣ 문화유적. pp238~239
★ 안동김씨 제각 : 우목샘 위에 있는데 1971년 4월에 건립하였다.
★ 내동회관 : (전략) 1940년 서당골의 내동회관을 안골목으로 이축(移築)하여 계
속 회관으로 사용하는 한편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하였다. 1954년에 안골목
회관을 다시 마을 앞으로 이축하고 기와로 지붕개량을 하였다. 회관 내부구조는
방이 2개, 마루가 1개, 창고가 1개다. 내동회관은 두 차례의 이사로 몸살나게 뒤
틀리고 난장이가 되었다. 이사 때마다 주춧돌에 맞추느라 기둥 밑을 도려냈기 때
문이다. 1987년 봄에 회관 건물을 철거하고 김재철씨의 협찬으로 현대식 2층 건
물로 신축했다.
★ 하마석(下馬石) : 마을 진입로를 따라 사장나무 가까이 이르면 길 양측에 비석
모양의 자연석이 세워져 있으니 이 돌을 하마석이라 했다. 계급이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하마석 앞에서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정중하게 마을로 걸어 들어오라는
뜻을 알리는 표석(標石)이다. 1972년 경지 정리하면서 하마석이 철거되고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에 1984년 김재철(金在哲)이 안동김씨 세장비를 세웠다.(2002. 6.25)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태영/문 - 대부님, 동원그룹 회장이 김재철(金在哲) 씨인데 혹 그분 아닐까요? 김재철 종친은 군사공파이며, 1935년생입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상기 김재철씨는 현 동원그룹 회장이십니다. 마을 진입로와 도로포장도 해 주셨다고 합니다.
▣ 김주회 - 전국 시군지 탐방! 흥미진진합니다. 시군지 탐방이 모두 끝나면 문중사료의 기초를 세로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영환 - 현지탐방의 기초자료가 되는 아주 귀중한 작업을 하셨습닏.
▣ 김발용 - 동원그룹 김재철회장을 말씀하신 듯합니다.김재철종친은 1934년 甲戊年 생으로 부산수산대를 졸업하고 명예수산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 한국무역협회장으로 금탑산업훈장포상의 경력이 있습니다.그리고 안동김씨로 추정된다는 敬默공은 1991년 타계하신 김재철종친의 선친이신듯 싶습니다.
▣ 김은회 -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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