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凡의 길 그대로 ........ 金信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6-26 16:12 조회1,884회 댓글0건본문
白凡의 길 그대로 ........ 金信
오늘은 백범 김구 선생 서거 5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 사설칼럼에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백범기념사업회장) 선생께서 기고하신 글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조선일보/사설칼럼)
[기고] 白凡의 길 그대로 ........ 金信 (2002.06.25)
오늘 우리는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53주기를 맞는다. 백범이 우리 민족의 발전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남긴 이정표는 여전히 후손들의 가슴에 뚜렷이 남아 있다.
지금 인류는 정보화로 인해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라 불릴만큼 가까워지고 국가간의 국경도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지구촌에는 민족간의 갈등과 전쟁이 끊임없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고, 민족간의 증오는 인류를 전쟁과 테러의 공포에 직면하게 하는 사태로까지 치닫고 있다. 백범이 일찍이 역설했듯이 각 민족이 서로의 자주성과 자존성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간 화합과 공존공영을 추구했었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더 평화롭고 안정되게 번영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각 분야에서 발전을 지속해 세계속에서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온 국민이 극심한 곤란을 겪었던 수년 전의 경제위기는 대부분 극복되고 새로운 경제적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백범은 우리 민족이 분단이라는 비극 앞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라고 희망을 준 은덕으로 우리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백범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라고 우리 민족이 참으로 잘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에서는 인류가 서로의 기상을 드러내고 화합과 협력의 정신을 구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 세계적인 축제 속에서 우리의 젊은이들과 국민들은 단합된 힘과 질서의식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세계 만방에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를 전파해 인류가 공존공영하는 문화를 만드는 과제를 주도할 수 있도록 백범이 지하에서나마 도와주기를 기원한다.
백범이 항일 독립운동을 할 때, 일부 인사들은 날로 강해지는 일제를 보고 우리의 독립을 비관했다. 백범이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할 때에도 국내 많은 인사들은 미국과 소련에 의지하면서 백범이 국제정세에 어두워 비현실적인 길을 간다고 매도했다. 이에 백범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고 절규하며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결행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호전됐던 남북관계가 최근 답보상태에 있으나 백범이 말한 것처럼 ‘통일은 민족의 지상명령’이므로 우리 후손들은 통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3년 전 정부의 지원과 백범을 흠모하는 국민들의 관심과 격려 속에 시작된 백범기념관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기념관이 효창원(孝昌園)에 우뚝 서면 백범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 각종 자료의 수집과 전시를 통해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통일국가 건설과 인류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도장이 될 것이다.
(金信/백범기념사업회 회장)
(소년조선)
[오늘의 역사] 백범 ●김구 암살(1949. 6. 26) (2002.06.25)
백범 ●김구 암살(1949. 6. 26)
독립 운동가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1949년 오늘 암살됐다. 남달리 강한 애국심으로 18세 때부터 나라를 위하는 일에 앞장섰던 그는 3·1 독립 운동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을 지냈다. 광복 후 귀국해 신탁 통치 반대·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 등을 펼쳤다.
(조선일보/사람들)
[사람들] 발자취/ 반민특위의 산 증인 이원용씨 (2002.06.13)
12일 타계한 이원용(李元鎔·82)씨는 1948년 반민족행위자 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설립부터 해체까지 지켜본 반민특위의 산 증인이었다. 또 반민특위 관련 생존자 중 가장 최고위직 인사이기도 했다.
일제시대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방 직후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 진영인 경교장 판공처 비서실에서 일하다 1948년 10월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金尙德) 제헌의원의 권유로 특위에 발을 내딛었다. 1949년 9월말 특위 해체때까지 그는 중앙사무국을 책임진 총무과장 겸 반민족행위자 체포·조사를 맡은 조사관, 김상덕 위원장 비서관, 예산 집행관 등 1인 4역을 해냈다. 1960년대초부터 14년간 대한중석에서 근무하다 은퇴, 교회 활동에 헌신해왔다.
생전의 그는 반민특위가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것에 대해 늘 가슴아파했다. 지난 2월말 광복회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 공개 당시 광복회 심의위원으로 명단 선정작업에 참여한 것도 이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신만고끝에 광복회가 내놓은 명단과 무관하게 일부 의원들이 친일파 명단을 추가한 것이 물의를 빚자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는 “해방 직후에는 현재보다 친일파 청산 의지가 훨씬 강했지만, 반민족행위자 선정은 조사위원 전원 합의제를 취할 정도로 신중하게 처리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친일파 청산은 개인적 독단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민족행위자를 추궁하던 조사관답게 평생 꼿꼿한 자세로 민족 정기 회복을 강조해 온 일생이었다.
( 金基哲기자 kichul@chosun.com )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항용 -
▣ 김윤만 - 사랑과 평화의 전도사 선생님은 위대한 종교가 같기도 합니다. 그 분의 신앙은 조국과 민족이셨겠지요.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