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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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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6-30 06:35 조회1,6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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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26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백곡 김득신의 아버지이신 남봉 김치 관련 기록을 찾아 모아 보았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치(金緻)



1577(선조 10)∼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 석(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갑(忠甲)이고, 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이며, 어머니는 양언개(楊彦漑)의 딸이다. 증 영의정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예부흥을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하였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조참의·동부승지·대사간을 거쳐, 교리(校理)·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한때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 되어서는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그 뒤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 3)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경서(經書)에 통달하였고, 특히 점술을 연구하여 천문(天文)에 밝았으나 재물을 탐내어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심곡비결 深谷煉訣≫이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典故大方.

공원영











▣ 남봉집(南峰集)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김치(金緻)의 시문집. 3권 1책. 필사본. 이 책은 본래 5책이었는데, 1책은 분실되고 나머지 4책을 아들 득신(得臣)이 재편집하여 3권 1책으로 편성하였다고 한다. 득신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427수, 권2에 고시 18수, 가(歌) 1편, 곡(曲) 2편, 서(書) 7편, 서(序) 1편, 교서(敎書) 5편, 발 1편, 묘갈 1편, 권3은 부록으로 연보·유사·묘비·과방(科榜)·수록(搜錄)·기문록(記聞錄)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그가 순무어사 또는 지방관으로 각 지방을 다니면서 읊은 서경시가 대부분이다. 한라산을 읊은 시는 한때 경향(京鄕)에서 애송되었던 시로, 당시 재상이었던 이원익(李元翼)을 비롯하여 문장가로 이름높던 이식(李植) 등도 극찬하였다고 한다.



〈용호십경 龍湖十景〉·〈침류정십영 枕流亭十詠〉·〈회천십육영 懷川十六詠〉·〈갑천팔영 甲川八詠〉 등도 명시로 꼽히는데, 특히 〈용호십경〉은 서울의 용산(龍山)에서 바라본 한강의 경치를 읊은 것이다.



그 내용은 동봉제월(東峯霽月)·남악조람(南岳朝嵐)·포구귀범(浦口歸帆)·사두후안(沙頭候雁)·장주백우(長洲白雨)·만야몽운(滿野夢雲)·연촌원등(煙村遠燈)·강안만조(江岸晩潮)·오탄어부(梧灘漁父)·노량행인(露梁行人) 등 10경(景)을 서경과 감회를 섞어 운치있게 묘사하고 있다. 서(書)는 모두 가족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윤혁동









▣ 심곡비결(深谷秘訣)



조선 중기의 학자 ●김치(金緻)가 지은 점서(占書). 3권 5책. 필사본. 연대는 미상이다. 권1 상에 〈포신명십이결 布身命十二訣〉 등 50조, 권1 하에 〈수국 水局〉 등 30조, 권2 상하에 〈궁합법 宮合法〉 60조, 권3에 〈설생문 薛生問〉 등 35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포신명십이결〉은 음양오행에 의하여 길흉화복을 판별하는 비결을 언급한 것이다. 〈안북두제성결 安北斗諸星訣〉등은 점성에 관한 것으로 사람은 태어날 때의 성좌(星座)에 따라 길흉화복이 판별된다는 비결이다.



〈자미법 紫微法〉은 사주(四柱)에 의하여 운세를 판별할 수 있다 하며 태음과 태양 상호간의 상합된 관계의 길조를 밝혔다.



〈복궁유지 福宮酉地〉는 남녀간의 궁합 또는 인간관계의 길흉을 판별하는 방법을 논술한 글이다. 〈설생문〉에서는 설생이 토(土)가 중앙에서 긴궁(緊宮)이 된 연유를 물은 데 대하여 오행 중 토가 정위가 없이 가장 왕성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음양오행을 통하여 사주·궁합·점성 등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할 수 있는 비결을 수록한 책으로서 이 시기 역학의 발달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저술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李純斗











▣ 남제주군(역사)

1466년(세조 12)에 안무사를 둔 데 이어 병마수군절제사를 두었으며, 뒤에 여러 곳에 진을 설치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판관 ●김치(金緻)가 동·서 방리를 설치하고 약정을 두었다. 제주목은 중면·우면·좌면, 정의현은 좌면·중면·우면, 대정현은 좌면과 우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金宗業





▣ 북제주군(역사)

1416년(태종 16)에는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을 제주목이라 하여 목사를 두어 행정을 관장하게 했으며, 남쪽을 다시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은 정의현(旌義縣), 서쪽은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고 현감을 두어 행정을 관장하였다.

1609년(광해군 1) 판관 ●김치(金緻)가 동서 방리에 약정(約正 : 향약단체의 임원)을 두었다. 金宗業





▣ 제주시(역사)

1416년에는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이 제주목이라 하여 목사가 두어지고, 산남은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이 정의현(旌義縣), 서쪽이 대정현(大靜縣)으로 구분되어 현감이 두어졌다.

1609년(광해군 1) ●김치(金緻)가 판관으로 있을 때 동서 방리를설치하고 약정(約正)을 두었다.











▣ 태백산사(太白山祠)



태백산의 산신을 모셨던 신당. 성현(成俔)의 ≪허백당집 虛白堂集≫에 그 산은 동쪽으로 뻗어 동해를 임하여 삼척부(三陟府)가 있고, 3도(道)의 사람들이 산정에 신당을 짓고 신상을 만들어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산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제사를 마치고는 신사 앞에 소를 매어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가 3일 만에 와서 몰고 가는 습속이 있었다. 잠시 소를 두고 갈 때 뒤를 돌아보면 신의 벌을 받는다고 하여 금기를 지켰다고 하는데, 소를 두고 가는 풍속을 퇴우(退牛)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산신은 매년 사월 초파일에 마을에 내려왔다가 5월 단옷날에 산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이 신이 마을에 있는 기간 동안에는 마을사람들이 신기(神旗)를 만들어 읍의 서낭당에 모셔두고 그 앞에 제상을 차려놓고 빌고 정성을 드린다.



이러한 것을 미신으로 여긴 충학(沖學)이라는 중이 이 신사를 불살라 버렸다고 하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당시 영동의 관찰사였던 ●김치(金緻)가 태백산사를 헐었다고 하였다.



아직도 이 지방에서의 산신에 대한 주민의 숭배는 여전한데, 현존하는 민속으로서 강릉의 단오제가 대관령산신을 맞아 별신굿을 하고 보내는 과정에서 산신을 맞아 모시고 보내는 과정은 그러한 유습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태백산 천제단에서 매년 개천절에 단군을 기리는 천제가 복원되어 행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巫俗考(李能和, 啓明 19, 1927).

崔吉城











▣ 홍애유고(洪崖遺稿)



고려 후기의 시인 홍간(洪侃)의 시집. 1책. 목판본. 10대손 방(濤)이 ≪동문선≫·≪청구풍아 靑丘風雅≫·≪대동시림 大東詩林≫·≪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 등에 수록되어 전하는 시편들을 초출하여 1629년(인조 7)에 간행하였다. 그 뒤에 병화로 인멸되자 12대손 만조(萬朝)가 1688년(숙종 14)에 중간하였다. 불분권 단책이다.



≪홍애유고≫의 권두에 문집목록과 경상도 안동임내 풍산홍씨세계가 있다. 이어서 칠언절구 17수, 오언율시 1수, 칠언율시 6수, 칠언배율 1수, 칠언고시 17수 등의 시가 실려 있다.



≪홍애유고≫의 부록으로는 〈동래잡시 東萊雜詩〉가 있다. 이것은 편집자가 정포(鄭恙)의 〈동래잡시〉 10수 중 1편이 정포의 친구이며 동래현령을 지낸 홍간의 작품이라 생각하여 뽑은 듯하다.



여기에 대하여 그의 후손 보○가 차운(次韻)하고, 이어 ●김치(金緻)·이민구(李敏求)·홍득일(洪得一)·정홍명(鄭弘溟)·홍방·박홍미(朴弘美) 등이 차운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집 끝에는 방의 발문과 만조의 지(識)가 있다.



---중 략---



≪홍애유고≫는 완벽한 홍간의 작품집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시풍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규장각도서와 연세대학교·성균관대학교 도서관도서 등에 있다.



≪참고문헌≫ 東文選, 靑丘風雅, 三韓詩龜鑑, 惺所覆螺藁, 饑翁稗說, 高麗名賢集 5(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0).



李信馥









▣ 김현도(金玄度)



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홍지(弘之), 호는 인재(認齋). 아버지는 여정(汝鼎)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1599년에 해주목사가 되었다.



이때 지평 남탁(南晫)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구황책(救荒策)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다는 황해도어사 ●김치(金緻)의 상소로 파직당하였으나, 1602년 모두 모함이었음이 드러나 복직되고 양재찰방(良才察訪)을 지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文守弘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김치의 남봉집(영인본)과 심곡비결(규장각 소장본 복사본)은 저에게 있습니다.

▣ 태영/문 -

▣ 김재익 -

▣ 김영환 - 남봉선조님가 백곡선조님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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