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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郡守 金琂 淸德碑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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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10-02-07 21:55 조회1,9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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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金琂){3}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2AE40C5B8FFFFB1588X0
여윤(汝潤)
시호 민숙(愍肅)
생졸년 1588 (선조 21) - 1636 (인조 14)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안동(安東)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중기 / 문신
과거 및 취재 [무과] 인조(仁祖) 15년 (1637) 정축(丁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2211위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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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金琂){3}에 대하여
1588년(선조 21)∼1636년(인조 14).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윤(汝潤). 아버지는 진사 낙서(洛瑞)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 8년 뒤 겨우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에 머물렀다.

인조반정 후 부안현감·예조정랑·병조정랑·성균관사예·예빈시정·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 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정렬하여 관찰사 홍명구(洪命耉)에게 예속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重普)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허적(許積)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정표(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 6)에 허적이 처형된 뒤 아들 세보(世輔) 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민숙(愍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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