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발간사 01 (1580경진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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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03 06:32 조회1,732회 댓글0건본문
우리 문중의 최초의 最古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422년전인 임진왜란 12년전, 선조13년, 1580년에 간행한 경진보입니다.
대종회 서고정리를 하면서 문중의 족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구분이 잘 안돼서 이참에 족보도 공부할겸 족보간행 등 문중사에 헌신하신 선조님들의 행적을 찾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 안동김씨 대종보 발간사
---경진보 (선조13, 1580)
1. ●경진보 서
만력8년 맹하---예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고 億齡 謹序
2. 경진보 발
예손 조봉대부 행호조좌랑 齊賢 跋
---기미보 (영조15, 1739)
3. 기미보 서
상지15년 1739 기미 추 ---충렬공 13세손 자현대부 지중추부사 90세 환(金+爰) 근서
4. 기미보 서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사간원 대사간 유( +維) 근서
5. 기미보 발
숭정 갑신후 96년 기미 중추상한(=팔월초순) ---후손 漢章 敬발
6. 기미보 기사
상지 15년 기미 추 ---예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 우태遇兌 근지
---무술보 (정조2 1778)
7. 무술보 서
숭정기원후3 무술(세번째 무술년) 5월 하순(仲夏下澣) ---후손 가선대부 행 승정원 etmd지 겸 경연참찬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 光國 근서
---을유보 (순조25 1825)
8. 을유보 서
상지 즉조 25년 을유 5월하순 (仲夏下澣) ---통정대부 행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장 불초손 禹元 근서
---정묘보 (
9. 정묘보 서
상지4년 정묘 중춘 ---雲孫 道健 근서
---임인보 (광무6년 1902)
10. 임인보 서
歲 임인 중추 하한 (仲秋下澣) ---충렬공 22세손 圭默 근서
---을해보 (1935)
11. 을해보 서
을해 孟冬 ---충렬공 23대손 외부주사 文演은 삼가 쓰노라
12. 을해보 記事
을해 동 시월 하한 (1935) ---충렬공 22대손 若浩 근지
13. 을해보 緖言
을해 동 시월 하한 ---충렬공 22대손 참서관 尙默 근서
---기미보 (1979)
14. 기미보 발간사
-대보발간 및 회관매입에 대하여
-밀직사사공파 및 개성운공파 入譜에 대하여
1979년 을미 12월 하한 ---
안동김씨대종회장 안동김씨대동보편찬위원장, 한국국제문화협회 회장, 전 국회의원 정치학박사, 충렬공 24대손(익원공후) 明會 근지
15. 기미보 서문 1979
1979년 여름 ---충렬공 22대손 利浩(제학공후) 근서
16. 기미보 편찬후기 1979
1979년 을미 12월 15일 ---대종회 상무이사, 대동보편찬위원회 편찬주간, 충렬공 24대손 (안렴사공 20대손) 崙會 근지
경진보 (선조13, 1580)
1. ●경진보 서
만력8년 맹하---예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고 億齡 謹序
우리 김씨는 신라 경순왕 후로부터 대대로 卿相을 지내 왔으며 상락공에 이르러서는 공명과 사업이 빛나고 쟁쟁하여 고려사에 실려 있고, 이조에 들어 와서는 원류가 멀고 오래 되어도 더욱 번창하여 三韓世家의 으뜸이 되었다.
비록 그러하나 연대가 이미 얼어지고 지파가 서로 갈라져서 사람들이 先人의 業을 계승치 못함이 많았고, 또한 시골에 떨어져 살면서 겨우 같이 編戶(편호)는 하고 지내나 자기 자신이 상락공의 후손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가 하물며 系世가 어떻게 내려온 줄을 능히 알 수 있겠는가
同宗 중에 유식한 인사들은 일찍이 이에 개탄하여 혹은 사사로이 보첩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것이 소홀하고 틀리는 등 여러 폐단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己卯연간(=1579)에 김공 ★ (익)이 이를 수정하려고 뜻을 두고 일가의 보첩을 만들었으나 또한 간행도 못하였다.
이제 강화부사 김공 ★ (오)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로부터 이를 다시 교정하여 비용을 들여 출간함에 있어
同姓은 상세히 해서 조상을 존중하고 외손은 간략히 해서 종친을 존중히 한 연후에 우리 김씨의 세대의 遠近과 지파의 條達(조달)과 族黨의 親疎(친소)와 자손의 多寡(다과)를 명약관화하고 손가락과 손바닥 보듯이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항상 눈에 익혀서 派를 소급해서 그 근원을 찾고 近親으로부터 遠族에 이르기까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짐을 알게 되어 더욱 친애하는 뜻을 돈독히 하면 이 보첩을 편수한 것이 어찌 곧 우리 김씨만의 다행한 일이겠는가. 또한 우리 국가로서도 총화단결해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력8년 孟夏 ---裔孫(예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교 ★億齡 삼가 씀
★金 (김익)
---己卯연간(=1579)에 김공 ★ (익)이 이를 수정하려고 뜻을 두고 일가의 보첩을 만들었으나 또한 간행도 못하였다.
★金 (김오)
---강화부사 김공 ★ (오)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로부터 이를 다시 교정하여 비용을 들여 출간
★金億齡(김억령)
---경진보 서 : 만력8년 孟夏 裔孫(예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교 ★億齡 삼가 씀
<디지털한국학>
★제학) 김익(金#익12){1}
1486(성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군거(君擧). 경력(經歷) 언홍(彦弘)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었으며, 1519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언이 되어, 이른바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언사(言事)를 담당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이 투옥되자, 유인숙(柳仁淑)·공서린(孔瑞麟)·홍언필(洪彦弼) 등과 함께 대궐에 나가 조광조와 같이 옥에 갇히겠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안당(安塘)·안처겸(安處謙)부자 등이 처형된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되었다.
중종 말년에 김안로(金安老) 등이 다시 등용됨에 따라 유배에서 풀려났고,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었다.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거쳐 용담현령이 되었다. 그의 인물됨은 현량과 천목(薦目)에 순후 방정하고, 학식과 재행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賢良科硏究(李秉烋, 啓明史學 1, 1968). 〈李泰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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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령(金憶齡)
字(자)는 仲老(중노), 1552년(명종 7) 문과에 급제, 左承旨(좌승지)·知製敎(지제교) 등을 거쳐 江原道(강원도)·黃海道(황해도)의 觀察使(관찰사)를 역임했다. 吏曹 判書 兼 兩館大提學(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追贈(추증).
<사마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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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 김억령(金億齡) / 明宗 01 式年 進士
【시험년도】 명종(明宗) 01 (1546)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65
【본인성명】 김억령(金億齡)
【본인 자】 중로(仲老)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구경하(具慶下)
【본인문과】 임자(壬子) 1552 식(式)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언(金)
【부친품계】 통훈대부(通訓大夫)
【부친관직】 원주(原州)/전목사(前牧使)
【안항(형)】 김득령(金得齡)
<문과방목>
★익원) 김억령(金億齡)
명종(明宗)7년(1552년), 식년시(式年試) 병과14(丙科1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29년, 기축
자(字) 중구(仲耉)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언(金<언0x69F8>)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동(金誠童)
증조부(曾祖父) 김질(金<질0x73E5>)
외조부(外祖父) 이이수(李<이0x6EEF>壽)
처부(妻父) 이숙(李淑)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감사&(監司&), 지신사$(知申事$)
▣ 김은회 - 자료 잘읽었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애 많이 쓰셨습니다. 세밀한 분석과 정리를 하셨습니다. 경진보 서문 번역까지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재원 -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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