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에서 읽는 이야기들도 진진한 맛이 있지만, 금석문에 새겨진 글들은 정말로 신비롭다. 집안 언덕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마모된 글자들은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부적과도 같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학문의 다짐을 새겨 넣은 신라의 청소년들은 누구일까? 안압지에서 나온 주사위[木製酒令具]의 “任意請歌”라거나 “衆人打鼻”라는 글자들을 보면, 신라인들의 술 마시고 희롱하던 광경에 웃음을 금할 수 없다. 금석문은 판독이 어려울수록 신비감을 더한다. 사라진 글자들을 추리와 상상으로 메우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이맘 때 어떤 외국 손님을 모시고 경주 일대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여러 곳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경주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전시실과 성덕대왕신종을 돌아보고 뒤뜰 야외 전시장으로 나갔는데, 크고 튼실하게 보이는 화강암 돌 구유 하나가 보였다. 어림짐작으로 길이가 3~4미터, 폭이 1.5미터, 높이가 1미터쯤이나 되었다. 투박하고 밋밋하며 장식이나 문양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언뜻 보기에 글씨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멈추어서 보니, 전면에 큰 예서체로 “天光雲影”이라 새겼고, 구연부에도 잔잔한 글씨가 많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전면 구연부에는 한시(漢詩)를 새겼고, 반대쪽에는 그 유래를 새긴 것이었다. 이런 횡재가 있나! 내용이 꽤 흥미로운 것이어서 급히 메모지에 적었는데, 제대로 된 것인지 모르겠다.
▶ 흥륜사터 돌구유_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전면 외벽: “天光雲影”(隸書 橫書) 전면 구연부: “二樂堂前雙石盆 何年王女洗頭盆 洗頭人去蓮花發 空有餘香滿舊盆 崇禎戊子流頭 蘇湖李敎方”(楷書 橫書) 후면 구연부: “此乃羅代興輪舊物, 寺廢抛在荊棘中者, 幾千餘載. 崇禎戊寅冬, 運入植蓮, 以爲玩賞之具, 顯晦有數. 因廣陵後人晩悔書”(楷書 橫書) 위의 시를 대략 번역하면,
이요당(二樂堂) 앞 한 쌍의 돌 구유는 어느 때 공주님이 머리를 감으셨나? 머리 감은 분은 가시고 연꽃만 피었으니 옛 구유에는 헛되이 남은 향기 가득하네 - 숭정(崇禎) 무자(戊子: 1648) 유두(流頭)에 소호(蘇湖) 이교방(李敎方)
후면 구연부의 명문은 “이것은 신라시대 흥륜사 터에 있던 유물로, 절이 황폐되고 가시밭에 버려진 지가 수천 여 년이 되었다. 숭정 무인년(崇禎戊寅: 1638년, 인조 16년)에 옮겨 와 연꽃을 심어 완상하는 기구로 삼았으니, 쓰이고 버려지는 것에도 다 운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광주(廣州) 후인 만회(晩悔: 李必榮)는 쓴다"고 하였다.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순간적으로 아하! ‘湯之盤銘’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흥분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何年王女洗頭盆”이라 하였으니, 바로 여인들이 머리 감는 데 쓰는 물통이다. 이 시는 6월 6일 유두에 지은 것이므로, 여인들이 창포물에 머리 감는 민속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유는 머리를 감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높은 수조(水槽)가 아닌가? 보통의 욕조보다 3배나 더 큰 것이다. 아마도 “머리를 감는다”는 것은 점잖은 유학자의 표현이고, 사실상 이것은 공주님들이 목욕하던 욕조가 틀림없다! 탕(湯) 임금의 욕조에도 “苟日新....” 운운하는 명문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상상이 나래를 펴자 예전에 읽은 『삼국유사』의 흥륜사(興輪寺) 기사가 떠오른다. 그 절터는 현재 반월성 서쪽의 사정동 285-6번지이거나 혹은 경주공업고등학교 부지로 생각되고 있다. 흥륜사는 이차돈의 순교지에 신라가 국력을 기울여 건설한 최초의 사찰이다. 법흥왕 14년(527)에 공사를 시작, 17년을 경영하여 진흥왕(眞興王) 5년(544)에 비로소 준공되었다. 절이 창건되자 국왕은 스스로 여기서 승려 행세를 하였고, 궁궐에 살던 왕족들을 이 절에 노비로 희사하였다. 재상 김양도(金良圖)의 두 딸도 스스로 이 절의 노비가 되었다. 그래서 흥륜사는 신라의 왕실ㆍ귀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자녀들이 절 노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고귀한 신분으로 천한 일이야 했겠는가. 사실은 출가 수행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돌구유야말로 그들이 사용한 욕조가 아니겠는가! 흥취가 솟구친 김에 나는 그 외국인에게 이 시를 어설픈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In front of Iyodang are the twin stone tubs In which once a princess bathed her hair She was gone away to blossom the lotus Vainly remains the lovely fragrance. - Written on June 6th of 1648 by Lee Kyo-bang, pen-name Soho
이 구유가 흥륜사 터에 있었던 것은 조선초기 김시습(金時習)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매월당집』에 “흥륜사지(興輪寺址)” 시 2수가 전하는데, 그 서문에 “흥륜사 터는 모두 여염집이 되었고, 오직 옛 석조(石槽)와 돌 솥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1638년에 이 구유의 유래를 새긴 “廣陵後人 晩悔”는 당시 경주 부윤 자리에 있었던 이필영(李必榮)이 틀림없다. 『경주선생안(慶州先生案)』에는 그가 1637년(인조15) 8월에 부임하여 1640년 7월에 이임한 기록이 있다. 그는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증손자로 광주(廣州)가 본관이다. 이필영은 관민을 대거 동원하여 이 육중한 석조를 경주 관아의 동헌 아래로 옮겨 놓고 연꽃을 심어 완상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대산집(臺山集)』에는 이 석조가 경주부 동헌인 금학헌(琴鶴軒)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 박물관으로 옮겨오기 전까지는 경주시 동부동 옛 군수 관사에 있었다고 하니, 그 자리가 바로 금학헌 자리였던가 싶다. 워낙 무거운 석조였으므로 이리 저리 옮기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귀중한 문화재를 함부로 옮겨갔던 이필영은 그래도 할 말이 있었나 보다. 쓸모 없이 버려졌던 물건을 관아의 조경용으로 유용하게 쓰게 된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초야에 버려졌던 인재를 크게 등용이나 한 것처럼.
그런데 10년 후인 1648년에 시를 지어 새긴 “蘇湖 李敎方”은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다. “二樂堂前雙石盆”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당시 “이요당(二樂堂)” 앞에 있었고, 한 쌍(똑 같은 것 2개)이 있었다는 것이다. 1648년이라면 이 석조는 분명 경주 동헌(금학헌) 아래 있었을 것인데, 왜 이요당 앞에 있었다는 것인지? 동헌에 “이요당”이란 부속 건물이 또 있었던 것일까? 현재 경주 남산동 973번지 서출지(書出池) 못 가에는 진짜 “이요당”이란 정자가 있다. 1664년(현종 5년)에 유학자 임적(任勣)이 지은 것으로, “樂山樂水”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석조는 원래 이 정자 앞에 있었던 것일까? 구유인지 석분(石盆)인지 몰라도 원래는 한 쌍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또 하나는 현재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된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의문이 의문을 낳고 즐거웠던 상상은 골치를 지끈지끈 아프게 한다. 아아! 고통스러운 금석문이여!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찾아보니, “天光雲影”이란 주자의 시〈觀書有感〉의 “半畝方塘一鑒開,天光雲影共徘徊”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다른 분들의 명문 판독에는 “王女”를 “玉女”라 하였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선녀라? 신라의 역사가 아니라 그냥 전설이라는 것인가? 연꽃을 심었다는 그 석조는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욕조도 수조도 아니요, 귀족들의 무덤에 사용하였던 석곽(石槨)이었을 것 같다. 흥분이 가라앉자 상상은 날개를 접었고, 백일몽에서 깨어난 듯, 술에서 깨어난 듯 제 정신이 든다.
글쓴이 / 이영춘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연구편찬실장
* 주요저서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임윤지당-국역윤지당유고-, 혜안, 1998 강정일당-국역정일당유고-, 가람기획, 2002 봄의 노래-춘사선생 한시집-, 동방서적, 200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