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선조님(문숙공, 상락백공, 제학공, 사간공, 교관공)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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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10-07-07 13:14 조회2,110회 댓글0건본문
1. 문숙공(文肅公. 충렬공 3세. 휘 永暾). (1285년(충열왕11)-1348년(충목왕4))
자(字)는 휘곡(輝谷). 호(號)는 균헌(筠軒) 또는 구봉(龜峰)이다. 장경공(章敬公) 정해(鄭瑎)로 부터 사사(師事) 받았다. 1305년(충열21) 문과에 제 3등으로 장자윤(張子贇) 방하(榜下)에 급제하여 강릉부 녹사(江陵府 錄事)가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試取-시험으로 인재를 뽑음)하였다.
1342년(충혜왕 3) 공은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할 때 아우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와 함께 이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렸고, 성병의익찬일등공신(誠秉義翊贊一等功臣)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적신 조적이 난을 꾸민 후 과인이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자 간신 여당이 거짓말로 날조하여 사람을 모아서 국가의 난을 모의하였지만 시종하는 신하들은 시종 절의를 지켜 과인을 보좌하고 협조하였는 바, 그 공은 너무도 막대하고 커서 잊을 수가 없도다. 그것으로써 그대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의 재상인 국노(國老)에게 붙잡히자 공은 왕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상서를 올리려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논의는 같지 않았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청하는 것이 마땅하고 급한 일이다.”고 하였다.
충혜왕때 삼중대광첨의사사(三重大匡僉議司事)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1346년(충목왕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과 옷, 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충목왕 때(1347년) 좌정승 판정치도감사(左政丞 判整治都監事-정치도감의 長 . 整治都監-1347년 충목왕 3년에 지방 토호족들이 과도하게 소유한 田土를 개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으로 이듬해 없어짐)를 지냈다. 이때 지방 토호들의 과도한 토지 소유를 없애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반발 세력들과 기황후(奇皇后-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의 배경을 믿고 횡포를 부린 기황후의 4촌 아우 기삼만(奇三萬)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로 한때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결국 공은 의도한 목표가 좌절되자 화병을 앓다가 1348년(충목왕4) 7월 13일 64세로 몰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묘는 풍덕(豊德) 앙동산(仰洞山)이나, 실전하여 1974년 10월에 백전종중과 탑원종중 주관 하에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도정사에 설단(設壇)했으며, 1998년 10월에 파종회비로 거북좌대와 이수 보수공사를 하였다.
*遺傳 詩 소개
<扈從白馬山應御製>(호종백마산응어제)
*문숙공께서 1347년(충목왕3) 좌정승으로 계실 때 임금(충목왕)을 호종하고 백마산에 올라 지은 시임.
翠保行尋蒼海上(취보를 받들고 임금을 모시어 창해 위를 찾아오니)
玉簫吹送白雲間(흰구름 사이로 옥퉁소 불어 보내네)
紅塵一片飛難到(한 티끌의 홍진도 날아오기 어려운데)
萬点螺分雨靑山(만점의 푸른 소라요 비 갠 뒤의 청산만 벌여 있네)
출전--<東文選>(민족문화추진회 刊. 2권. p496. )
배위(配位)는 냉평국대부인(冷平國大夫人) 이천신씨(利川申氏)로 부(父)는 판도사랑(版圖仕郞) 여강(汝岡)이다.
2. 상락백공(上洛伯公. 충렬공 4세. 휘 縝). (1315년(忠肅2)-1375년(禑王1)추정)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최고 관직은 단성려절 보조공신(端誠勵節補祚功臣), 중대광 판자혜원사(重大匡 判慈惠院事-종1품),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묘는 실전(失傳)이고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 설단하였다.
배위(配位)는 의혜택주(義惠宅主) 문화유씨(文化柳氏)로 부(父)는 밀직우부대언(密直右副代言) 보발(甫發)이며, 조(祖)는 삼사사(三司事) 문화군(文化君) 온정공(溫靖公) 인기(仁琦)이며, 증조(曾祖)는 평리(評理) 정신공(貞愼公) 승(陞)이다. 외조(外祖)는 겸교평리(檢校評理)인 원주원씨(原州元氏) 선(善)이다.
묘소는 실전하여 1974년 10월에 백전종중과 탑원종중 주관 하에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도정사에 문숙공 영단과 함께 설단(設壇)했으며, 1998년 10월에 파종회비로 거북좌대와 이수 보수공사를 하였다.
3. 제학공(提學公, 충렬공 5세. 휘 益達. 派祖). (1340년(忠惠1)-1400년(朝鮮定宗2)추정)
1380년(고려 우왕6. 41세)에 문과(文科. 乙科 第五人. 李文和 榜下)에 급제하고 정순대부 밀직사 좌부대언(正順大夫密直司左副代言)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 지공조사사(寶文閣直提學知工曹司事)에 올랐다.
본 문중의 파조(派祖)로 묘는 실전(失傳)하여 1962년 임인파보 간행 후 잉여금으로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도정사에 설단(設壇)하고 도정사를 건립하였다. 이때 토지는 백전종중에서 헌납하였으며 1998년 10월에 파종회비로 거북좌대와 이수 보수공사를 하였다.
배위(配位)는 안동부주(安東府主) 영해박씨(寧海朴氏)로 부(父)는 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인 동생(東生)이며, 조(祖)는 판서(判書) 원계(元桂)이며, 증조(曾祖)는 전객령(典客令) 관(琯)이다. 외조(外祖)는 시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경주(慶州) 이제현(李齊賢)이다.
4. 사간공(司諫公. 충렬공 6세. 顧). (1389년(창왕1)--1431년(조선 세종13))
자(字)는 경보(警甫). 1404년(태종4)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1408년(태종8) 문과(文科. 丙科 제16인. 魚燮甲 榜下)에 급제한 후 좌사간(左司諫)에 올랐다. 향년은 43세이며,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소남면 도리촌 우봉계(長湍郡 小南面 桃李村 牛峰界) 이익재(李益齊) 묘 아래(휴전선 북방) 속칭 수회촌(水回村)으로 현 개성시 소남면 약정동(開城市 小南面 藥井洞) 자좌(子坐)이다. 1987년 4월 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山靑郡 生草面 月谷里)에 단묘하였다. 향사일은 음력 3월 15일이다.
배위(配位)는 동래부부인(東萊府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로 부(父)는 이조참의(吏議) 절(節)이며, 조(祖)는 봉원부원군(蓬院府院君) 양경공(良慶公) 양생(良生)이며, 증조는 밀직봉산군(密直蓬山君) 호(瑚)이다.
<단묘>
<묘비>
<묘비문>
<묘소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생초면 월곡리 일대)
재실-홍의재
<동방 급제자명단>
기록 순서 : 이름 생년 자 호 본관 합격등급. 태종8년 식년시때는 33명의 합격자를 냈다.
1.강리(康理) 미상(未詳) 同進士17
2.구강(具綱) 능주(綾州) 同進士19
3.권맹손(權孟孫) 효백(孝伯) 송당(松堂) 예천(醴泉) 同進士20
4.김고(金顧) 경보(警甫) 안동(安東) 同進士16
5.김원로(金元老) 미상(未詳) 丙科1
6.김유무(金由畝) 광주(光州) 同進士2
7.김익렴(金益廉) 안동(安東) 乙科3
8.김자(金赭) 언양(彦陽) 同進士10
9.김장(金廧) 미상(未詳) 乙科2
10.김재(金滓) 광주(光州) 同進士12
11.나유수(羅有綬) 미상(未詳) 同進士6
12.박융(朴融) 유명(惟明) 밀양(密陽) 丙科2
13.배소(裵素) 흥해(興海) 同進士15
14.설순(偰循) 경주(慶州) 丙科5
15.신인손(辛引孫) 조윤(祚胤) 석천(石泉) 영산(靈山) 同進士8
16.어변갑(魚變甲) 1381 신유 자선(子先) 함종(咸從) 乙科1
17.우승범(禹承範) 단양(丹陽) 同進士11
18.유계문(柳季聞) 숙행(叔行) 문화(文化) 同進士3
19.유상리(兪尙理) 창원(昌原) 同進士13
20.유효통(兪孝通) 행원(行源) 기계(杞溪) 丙科6
21.윤수(尹粹) 파평(坡平) 丙科3
22.이각(李㴶) 미상(未詳) 同進士14
23.이미(李敉) 미상(未詳) 同進士18
24.이숙복(李叔福) 한산(韓山) 同進士4
25.이심(李審) 여흥(驪興) 同進士21
26.이정문(李正文) 미상(未詳) 同進士9
27.이훈(李薰) 미상(未詳) 丙科4
28.정개보(鄭介保) 동래(東萊) 同進士7
29.정려(鄭旅) 해주(海州) 同進士5
30.정린(鄭鄰) 미상(未詳) 同進士22
31.정승서(鄭承緖) 초계(草溪) 丙科7
32.정신(鄭信) 미상(未詳) 同進士23
33.최맹량(崔孟良) 전주(全州) 同進士1
5.교관공(敎官公. 충렬공 13세. 時進) 1564(명종19)~1632(인조10)
자는 용오(勇吾)이며 선무랑(宣武郞)으로서 임란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웠으며 서사교관(筮仕敎官)이 되었다. 묘는 수신면 도정의 선산 아래 묘좌이다. 종손(從孫) 득신이 찬한 묘갈이 있었으나 지사(地師)가 꺼리므로 세우지 못하고 백전의 사우(祠宇) 뒤에 묻었는데 1973년 묘 아래에 세웠다.
<풍수 지리 소개>
출전 : <우리 문화 우리풍수-김시민 장군 어머니(창평이씨) 무덤에 대하여>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곳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세로 산머리 부분에 김시민 장군의 어머니 묘가 있다. 풍수에서 땅을 보는 방법에는 일정한 체계가 있다. 먼저 특정한 지점의 산과 물을 세분하여 미시적으로 알아본 다음, 해당 부분이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지 여부를 거시적으로 살핀다. 대개는 미시적으로 판단한 것과 거시적으로 판단한 결과가 일치한다. 즉 미시적으로 살펴 좋은 땅은 거시적으로도 그렇다는 얘기다.
이렇게 거시적으로 땅을 살피는 것을 물형(物形)론, 또는 형국론이라고 한다. 물형론은 대개 특정 동식물이나 사람의 모양에 빗대어서 땅의 기운을 설명한다. 물형론이 우리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땅에 대한 인간의 미학적 인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심미(審美)의식을 고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땅의 특성을 파악, 적절한 쓰임을 찾아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 방법론을 제시한다. 땅에 대한 학대가 심한 요즘, 물형론적 사유방식이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잣밭) 마을. 앞산에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1554~92)의 어머니 창평 이씨 무덤이 있다. 이 무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고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 이영림 감사는 전한다.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渴馬飮水形)이 그 하나고, 나머지 하나는 명나라 명풍수 두사충(杜師忠, 주간동아 382호에 소개)에게 부탁하여 잡은 자리라고 한다.
이 두 전설을 가지고 이곳 터와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몇 가지 사실을 확인, 또는 추론할 수 있다. 먼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은 산세가 말처럼 힘 있고 규모가 커야 한다. 목마른 말에게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샘(泉)이나 연못(池), 호수(湖), 내(川)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장군 어머니 무덤 바로 앞으로 ‘산방천’ 물이 흘러 들어와 그러한 요건을 충족시킨다. 또 목마른 말의 경우 신경이 모두 머리에 쏠려 있기 때문에 무덤을 말머리 부분에 써야 하는데, 김 장군 어머니 무덤은 말머리를 연상시키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마셔야지 나가는 물을 마셔서는 안 되는데 무덤이 물이 들어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또 동물에 빗대어 땅을 표현한 곳에는 돌을 올려놓으면 그 짐승이 힘을 쓸 수 없다고 해서 비석이나 상석 등 석물을 세우지 못하게 한다. 이곳 김 장군 어머니 무덤에도 그러한 까닭에 일체의 석물을 올리지 않아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두 번째, 이 무덤을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명나라 풍수 두사충에게 은(銀) 서 말을 주고 잡게 했다는 전설에서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김 장군이 두사충에게 부탁하여 잡았을 것이라는 말이 있으나, 앞뒤 정황을 보면 동생 김시진(1564~1632)이 주도한 듯하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나자 이여송 군대를 따라 1592년 12월 평양에 머문다. 그런데 이때는 김 장군이 이미 전사(1592년 10월)한 뒤이므로 김 장군과 두사충의 만남이 불가능하고, 또 김 장군의 어머니 창평이씨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594년에 죽었다. 게다가 김시진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무덤 입구에 ‘도정강사(桃汀講舍)’를 짓고 글을 읽었다고 하는데, ‘도정강사’의 건축 양식은 중국식이다.
이로 보아 두사충에게 묘지 소점을 받으면서 정사 터와 공간 배치까지 조언 받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두사충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아산에 와서 이순신 장군의 무덤(옛 무덤 터)을 잡아준 기록이 있어 그 즈음에 이곳에 들렀는지, 그 이전에 들렀는지는 불확실하다.
이 터를 소점받기 위해 두사충에게 지불한 은이 서 말이다. 보통 지관에 대한 보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은 정중하게 하고, 예물은 후하게 한다(비사중폐-卑辭重幣)’가 지관에게도 적용되는데, ‘쌀 서 말에 두루마기 한 벌’이면 비교적 점잖은 사례였다. 은 서 말이 현재 시가로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중국의 명풍수라고 알려진 두사충이었던 만큼 지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수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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