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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발간사 05 (1739기미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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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07 01:28 조회1,8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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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발간사 05 (1739기미보 발)





대종회 서고정리를 하면서 문중의 족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구분이 잘 안돼서 이참에 족보도 공부할겸 족보간행 등 문중사에 헌신하신 선조님들의 행적을 찾아 정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중의 최초의 最古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422년전인 임진왜란 12년전, 선조13년, 1580년에 간행한 경진보입니다. 그로부터 160년이 지난 영조15년, 1739년에 기미보를 발간하게 됩니다.









▣ 족보 발간사



---기미보 (영조15, 1739)

3. 기미보 서

상지15년 1739 기미 추 ---충렬공 13세손 자현대부 지중추부사 90세 ★ (환) 근서

4. 기미보 서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사간원 대사간 ★유( +維) 근서

5. ●기미보 발

숭정 갑신후 96년 기미 중추상한(=팔월초순) ---후손 ★漢章(한장) 敬발

6. 기미보 기사

상지 15년 기미 추 ---예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 ★遇兌(우태) 근지









---기미보 (영조15, 1739)

5. ●기미보 발

숭정 갑신후 96년 기미 중추상한(=팔월초순) ---후손 ★漢章(한장) 敬발





족보로서 일가를 列記하는 것은 오래 되었다. 우리나라에 名門大姓은 족보가 없는 집이 없으나 우리 안동김씨만이 홀로 족보가 없는 것은 족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족보가 있었으나



이미 160여년이 지나 오래 되었고, 또 세대도 멀어져서 후손이 더욱 번성하여 짐으로 먼 조상으로부터 수만 자손에 이르고 그 번다한 숫자를 한 계통으로 만드는 것이 구보로서는 해당이 될 수 없으니 비록 족보가 없다고 해도 可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족이 있어도 족보가 없으면 친족도 친하지 못하고 족보가 있어도 修譜하지 않으면 족보는 있어도 족보가 아니니



우리 종중의 선배 어른들은 대개 일찍부터 이 점에 유의하시고 혹은 시작하였다가 중도에 걷어 치웠다가 다시 시작해도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구보를 만들기 전에 후일을 바라는 뜻일까







辛亥년에 宗丈 ★도정공 聖游께서 그 族姪 ★지평공 權과 함께 여러 종인께 통고하여 改修해서 重刊할 계획을 하고 이에 통문을 놓아 자료를 수집하고 범례를 세워 교정을 하되



구보를 기본으로 하여 그 근원을 밝히고 私譜를 참고하여 그 派를 상세히 밝히고 타성족보와 碑誌 行狀 등을 고증하여 의아한 점을 바로잡고



이제 ★御將  (흡)이 조판을 갖추어 조력함으로 일이 거의 완성되어 가든차에 불행히도 ★지평 ★도정 두분께서 서로 이어 돌아가시니 아! 슬프도다



이 일에 ★漢章도 또한 일찍부터 참여하였으나 두분이 이미 작고하고 주관할 사람이 없어서 지연된 제가 이미 4-5년이나 되었다.







전일의 8-9할이나 쌓은 공이 허사로 돌아갈까 이를 염려하여 동지 종인 ★禾+集(집)과 더불어 구편을 보수하여 원고를 완성하였으나 남아 있는 자금을 모두 털어도 재력이 부족하여 간행이 무기연기 되었더니



이번에 종인 ★오위장 遇兌(우태)가 이를 개탄하여 이 일을 꼭 성취코자 결심하고 계획해서 다시 자금을 염출하여 먼저 간행한 책에서 잘못된 것을 다시 고치고 구판에 좀먹어 훼손된 것을 바꿔 써서 조각장에게 부친지 반년이 못되어 완공을 보게 되었으니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도정공(=성유)이고 끝을 마친 사람은 ★위장공(=우태)이다.







오호라! 구보의 편성은 실로 ★漢章의 7세조의 從兄이신 기묘 현량 ★정언공(= 익)이었는데 이번에는 ★漢章이 공의 방손으로서 마침 有司의 列에 참여하여 譜事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 어찌 영광스럽고 또 과분한 일이 아니겠는가?





숭정 갑신후 96년 기미 중추상한(=8월초순)

후손 ★漢章 敬跋











●御將  (흡)이 조판을 갖추어 조력함으로 일이 거의 완성되어 가든차에



부사) 김응하-(후손)★김흡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사) 김흡(金#흡04)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1723년(경종 3) 남병사(南兵使)를 거쳐 1727년(영조 3)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

1729년 우의정 이태좌(李台佐)의 신임을 받아 조현명(趙顯命) 등과 함께 《군공별록 軍功別錄》을 다시 수정하기도 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취임하였다.

그뒤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하여 1733년에는 우포도대장이 되고, 2년 뒤에는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1737년 어영대장에 올랐으나 4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광해군 때의 명장이었던 응하(應河)의 후손으로 비록 문음(門蔭)으로 시작하였으나 대장까지 올랐다.

기강문란은 용서하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근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金昊鍾〉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정중 -

▣ 김재이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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