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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炘(심방변)장군과 연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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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7-25 18:01 조회2,3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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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흔(金 ) 장군은 생몰년 1251(고종 38)∼1309(충선왕 1). 고려시대의 무신. 아버지는 명장이며 명재상이었던 방경(方慶)입니다.



김흔 장군은 아버지이신 김방경을 따라 삼별초 토벌과 일본원정에 참여하셨고, 원나라의 반란군인 합단적이 고려에 침입하자 충남 연기지역에서 무찌른 바 있고 (연기군 서면 국촌리에 김흔장군 연기대첩사적비를 연기군 종친회에서 건립) 김방경 무고사건때 김방경은 대청도로, 김흔은 백령도로 유배된 적이 있는 등 다섯 형제중 (선, 흔, 순, 윤, 돈) 아버지인 김방경 장군의 최측근에서 활동을 가장 많이 하신 분입니다. 아쉽게도 후사가 없어 직계후손이 없는 실정입니다.



김흔 장군과 관련된 자료를 몇가지 올려 보았습니다.







▣ 경순왕에서 김흔 장군까지의 世系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경순왕 김부 (金傅)

② 김은열 (金殷說) (4남)

③ 김숙승 (金叔承) (2남) ★구안동김씨 시조

④ 김일긍 (金日兢)

⑤ 김이청 (金利請)

⑥ 김의화 (金義和)

⑦ 김민성 (金敏成)

⑧ 김효인 (金孝印) (2남)

⑨ 김방경 (金方慶) ★구안동김씨 중시조

⑩ 김 흔 (金 ) (2남)



족보에 김흔 장군은 初名은 綬(수)라 하였고, 충렬공(김방경)의 유명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萬戶 벼슬을 형(선)의 아들인 承用에게 넘겨준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슬하에 1남(승고), 2녀(민적, 조련)를 두었는데



1남 承固(승고)는 평리상호군 행숭복도감판관에 추봉되었고 1녀를 두었는데 의성인 金台權 (문좌사윤 瑞之의 아들)에게 출가하여 김흔장군의 世系는 끊기게 됩니다.



1녀는 여흥인 閔 (민적)에게 출가하였는데 민적은 밀직사사 문순공 복흥군 충순공 宗儒(종유)의 아들이고, 평찬성 문온공 호급암 思平(사평)을 낳았습니다. 민사평은 문온공파 파조이신 척약재 김구용의 외할아버지이므로 김흔장군의 장녀는 김구용의 외증조모가 되는 것인가요?



2녀는 평양인 趙璉(조련)에게 출가하였는데 조련은 찬성 충숙공 도첨의사사 평양부원군 정숙공 仁規(인규)의 아들입니다.









▣ 디지털 한국학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51(고종 38)∼1309(충선왕 1). 고려시대의 무신. 아버지는 명장이며 명재상이었던 방경(方慶)이다. 음서(蔭敍)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22세) 1272년(원종 13) 방경을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대장군이 된 뒤, 곧 사재경(司宰卿)에 올랐다.



(24세) 1274년 일본원정 때는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가하였고, 진주목사를 지냈다.



(27세) 1277년 북쪽 변방이 소란해지자 출정하였고, 이듬해 방경이 무고를 입어 대청도(大靑島)로 유배될 때 백령도에 유배되었으나, 충렬왕의 변호로 풀려났다.



(29세) 1279년(충렬왕 5) 대방공 징(帶方公#징02)이 원나라에 갈 때 원부(元傅)의 아들 정(貞) 등 의관(衣官)자제 25인과 함께 뚤루게(禿魯花)로 다녀왔으며,



(32세) 1282년에도 상장군(上將軍)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 있을 때 고려사람 유주(庾#주61)가 원나라의 황제에게 고려에 이롭지 못한 일을 건의하자, “너는 금필(黔弼)·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그런데 본국을 그와같이 파괴하려 하느냐.”고 비난하였다.



(36세) 1286년 지신사(知申事)로서 삼사사(三司事)가 되었고, 이듬해 동판밀직사사(同判密直司事)가 되었다.



(38세) 1289년 만호(萬戶)로서 조정군(助征軍)을 이끌어 요양행성(遼陽行省)에 갔으며, 동계(東界) 방수군(防戍軍)을 조사하고 합단(合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40세) 1290년 합단이 쳐들어오자 이를 연기(燕岐)부근에서 격파하고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하여,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원나라로부터 궁시(弓矢)·안(鞍)·옥대(玉帶) 등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승려 일영(日英)이 한희유(韓希愈)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므로 인후(印侯)와 함께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으나, 마침 원나라에 갔던 충렬왕이 무고임을 밝혀 한희유가 무사히 귀국하여 중용되자 귀국하지 않았다. 한희유가 죽자 연경에서 7년 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삼중대광(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三重大匡)이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이르기를, “대덕(大德) 3년(1299)에 본국의 무뢰한 무리가 장차 난을 꾀하고자 하거늘, 흔(#흔05)이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먼저 알고 난을 진정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상(賞)하여 특히 서용(敍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에 습봉(襲封)되었다.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인자하였다고 한다.









▣ 김흔장군 연기대첩사적비



소재지 : 충남 연기군 서면 국촌리



이곳 대박산 앞 정좌산은 고려 충렬왕때 연기대첩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연기대첩은 고려 충렬왕때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적이 고려로 쳐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하다가 1291년 (충렬왕17) 5월 1일 이곳 정좌산에 침입한 것을 격퇴시킨 연기지역에서는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대 승첩이었다.



적의 침입에 고려와 원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5월 2일 동이 틀 무렵 정좌산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너무 강력하게 저항함에 우리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후퇴하는 자는 엄히 참하리라" 하고 앞장서 적의 예봉을 꺽고 진격하여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정좌산 전투에서 패주한 합단적은 남쪽으로 패주하였다가 5월 8일 전열을 재정비하여 원수산으로 다시 침략해 왔다. 원수산 전투에서는 한희유 장군이 앞장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하므로써 전후 2년여에 걸친 합단적의 침입은 종식을 고하였다.



이처럼 연기대첩은 합단적의 유린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승전이었음에도 후대에 이 대첩을 기념할 어떠한 유적도 남겨놓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연기대첩에 참여했던 김흔장군은 안동김문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의 둘째아들로 비록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연기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연기대첩지의 역사성을 기리고 아울러 방계의 조상을 기리는 깊은 뜻으로 이 비를 새겨 멀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1997년 5월 일

공주대학교 교수 이해준 지음

충렬공 후예 在山 씀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세움









▣ 참고로 안동시청 홈페이지 (http://www.andong.kyongbuk.kr/)에 질의하는 과정에서 종친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게재합니다.





⊙ 질의내용



문화재연구소에서 CD로 제작한 문화유적총람 3편에 김기 출생지(金圻出生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문의하고자 하는 내용은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132번지가 현재 댐에 수몰된 곳인지, 안된 곳인지 알고 싶고, 관리자로 되어 있는 김택진 이라는 분의 연락처와 위 기록과 관련된 다른 자료나 정보가 있으면 알려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위에 언급된 김기(金圻)라는 분은 김방경 장군의 둘째아들로 이름은 김흔(심방변+斤)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오기인 것 같습니다.





【유적명칭】김기 출생지(金圻出生地)

【관리번호】760-910-370-156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위인선현유적(위인선현순절지·생가·출생지 등)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132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개인(김택진)

【유적내용】



김기(金圻)는 김방경(金方慶)의 아들로 은보(○補)로 처음 관직에 올랐고 장군이 되어 아버지인 김방경을 따라 탐라의 삼별초(三別抄)를 무찔러서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원나라가 일본을 칠 때 김방경을 따라 일본에 도군하여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을 제수받고 아버지를 뒤이어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다. 이곳은 김기의 출생지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154.

【비 고】







⊙ 답변내용



작성자: 김재교 (http://my.netian.com/~kimjk31/)



이렇게 인터넷을 통하여 족친(族親)을 뵈오니 반갑습니다. "會"를 항열로 쓰신다면 "敎"가 항열인 저에게는 증조항이 되는 분이군요. 저는 안동시청에 근무하고 있으며 중시조인 충열공으로부터 29세손(世孫) 됩니다. 주향은 소산(素山)입니다. 본향인 안동에 거주하면서도 조상들의 흔적을 잘 찾지 못하여 늘 송구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님께서 질의하신 내용중 오천리 132번지는 현재는 수몰지역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조상님의 유지는 아닙니다.



"기(圻)"를 쓰시는 분은 우리조상이 아니고 광산김씨의 조상님 입니다.(편집진의 오류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 오천리도 광산김씨가 세거해 오던 곳이며 "김택진"이라는 분은 광산김씨 현 종손의 先考되시는 분입니다. 현재 광산김씨 문중은 그곳의 고가를 모두 오천 "군자리"라는 곳으로 이건하여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광산김씨와 우리집안의 인연은 일찌기 우리 중시조님(충열공 김방경)의 산소가 실전 되었는데, 조선 중기무렵 광산김씨의 조상인 김효로공의 산소를 쓰다가 묘지석을 발견하여 새로이 산소를 찾았으므로 새로이 단장을 하고 예전에는 안동인근에 있는 소산과 사촌의 양 집아네서 주로 향사를 모셨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대종회 차원에서 향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라며 안동에 들르실 일이 있으면 연락하시고 아울러 종택인 "삼소재(三素齋 경상북도 지방민속자료 제66호)"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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