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28.(수안군 : 황해도의 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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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15 05:19 조회2,334회 댓글0건본문
수안군지/수안군지편찬위원회/1992.
▣ ③수안김씨(遂安김씨) pp211.
--김씨도 집성촌을 이룬 것으로 되어 있어 근거를 찾아 보았다. 1874, 1903,
1922, 1954년 각각 보책이 간행되었으나 임진병화로 그 전 것이 소실되어 시조조차
가리질 못하고 있는 바 수안군(遂安君)이었던 김선(金愃)을 시조로 삼았을 것으로 짐
작이 간다.
--시조는 김해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27세손으로서 지(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之(元)
忠端力安社保定功臣)이요 봉익대부유화(부지)밀직사 전법판서상장군 봉수안군(奉翊
大夫劉和(副知)密直司 典法判書上將軍 封遂安君). 이로 인해 후손들이 본관으로 삼
었다 한다.
☞ 옮긴이 주 : 위 글중 김해김씨 시조는 수로왕으로 오기이고, 수안김씨 시조 김선
(金愃)은 충렬공 방경(方慶)의 맏아드님으로 김알지의 27세손이라 함도 오기이며( )
안이 바른 기록입니다.
참고로 전법판서 상장군 김선의 묘소는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에 있습니다.
◎ 1850년대의 거주성씨표 pp212.
--성동면 내덕리 (안동김씨) 81세대.
--성동면 제동리 (안동김씨) 72세대. ※재동리의 오기임.
--성동면 좌도리 (안동김씨) 43세대.
--대평면 대평리 (안동김씨) 20세대.
--천곡면 평원리 (안동김씨) 27세대.
※ 수안군에서는 위 기록이외 안동김씨의 거주 기록이 없으며, 1930년대 수안군의
--성씨별 인구 중 김씨는 3,093명으로 가장 많은 대성(大姓)이었음.
▣ 관향으로 본 인물(수안김씨). pp637~643.
○ 김선(金愃, 封遂安君. 典法判書) ※김독(金牘)이라고도 표기되어 있으나 근거없음.
--고려 충선왕 때의 인물임. 그는 신라 김알지의 28세손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
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 김방경(金方慶) 상락군(上洛君)의 큰 아들이
다. 공은 중신으로 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밀직사 전법판서 상장군(元忠
端力安社保定功臣 奉翊大夫 副知密直司 典法判書 上將軍)으로 수안군에 봉해지어 수
안김씨의 시조가 됨.
○ 김자(金資, 都僉議司事)
--직령(直令) 동정전리공신 봉익대부 삼중대광 도첨의사사(同正典理功臣 奉翊大夫
三重大匡 都僉議司事)를 지냄.
○ 김위(金爲, 典理判書)
--諱渭. 고려 전리판서(典理判書)였고, 금자광록대부사(金紫光祿大夫事)였다. 고려
원종때 분이다.
○ 김득남(金得南, 典理判書)
--諱渭德. 보전리판서(補典理判書)에 이름.
○ 김윤(金潤, 縣監)
○ 김이(金履, 正言)
--문과(文科)정언(正言)동국통감헌부(憲府)상소(上疏)계장수(稧長壽) 이무(李茂)
이빈(李彬) 김이(金履) 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교결당부(交結黨附) 욕무도(欲誣
蹈) 충양우란(忠良우亂)으로 국가의수직첩운운(國家宜收職牒云云)하고 경찬진도(竟竄
珍島)했다.
○ 김수(金綏, 吏曹正郞)
○ 김정(金精, 密直副使)
--밀직부사 여김홍식조사공유(與金洪植趙思恭兪) 밀직부사로서 김홍식, 조사공, 유
사의, 김제안, 김구빈, 이원림, 사희종 등과 모반하다 주살당하였으니 서기 1368년
10월의 일이다.
○ 김문범(金文範, 將士郞)
--장사랑(將士郞)행(行) 기자전(箕子殿) 참봉을 지냄.
○ 김세광(金世光, 副司直)
※ 수안김씨대동보에 의거 김이. 김수. 김정은 김득남의 자(子) 입니다.
▣ 대성면세일람(大城面勢一覽)
◎ 연혁(대성면)
--1938년 7월 1일에 성동면과 수안군 대평면의 일부(대촌리 미산리 철령리)가 통
폐합되어 이후로 대성면이라 일컬으게 되었다.
◎ 대성면 12개리 자연부락과 가구수.
(☞ pp212. 1850년대의 거주성씨표 중 안동김씨 부락 소개)
--좌도리(佐桃里) 2개구(個區) : 좌동 아랫말 낭말 새장거리 여자울 샛동네 120호
--재동리(齎洞里) 2개구 : 서재골 벌말 세거리골 논거리 당재 사당골 한심마을 새터
곰배 112호
--내덕리(內德里) 2개구 : 드렁골 안골 양촌 청덕골 고사리편 바리봉골 배태울 바랑
골 108호
◎ 산하
--산세 : 산지가 많고 평지가 비교적 적다. 본 면의 서북쪽으로 감박산(甘朴山,
629m)의 줄기가 뻗어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본 면 중앙부를 검산(劍山, 509m)줄기
가 남북으로 뻗어 있어 반상(伴上) 좌도리와 재동리, 내덕리, 월연리로 갈라놓고 있다.
--현령(峴嶺) : 동고개 - 동고개는 내덕리에서 도하리로 통하는 고갯길로 평소 교
통량이 많으나 고산준령이어서 내덕리 일대를 사회적. 문화적으로 낙후시키고 있다.
--수세 : 내덕천 - 서흥군 구포면 구정리에서 시류(始流)하여 내덕. 월연. 광수리를
거쳐 예성강에 흘러들어감.
▣ 주민성씨. pp759.
--본 면은 대체로 내덕리, 좌도리, 재동 3개리는 안동김씨의 집단부락이었고, 광수
리, 대촌리, 미산 3개리는 수안이씨의 집단 부락인 관계로 김씨, 이씨가 많았다. 그
외의 리(里) 성씨 분포는 다음과 같다.(후략)
▣ 산업. pp760~761
--본 면은 수안군 전역이 그렇듯이 산지가 많고 평지가 협소할 뿐 아니라 토지가
척박하여 농산물의 생산량도 많지 않다. 밭이 많고 논이 적어 잡곡의 생산량이 많다.
◎ 사기점(沙器店)
☞ 사기점에 대한 증언자 김동욱이 내덕리에서 월남한 분으로 내덕리가 안동김씨의
집단부락임을 감안하면 본 사기점에 대한 기록 또한 안동김씨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본 면에서 공산품으로 기록에 남길만 한 것은 미산리와 대촌리에서 산출된 도자
기를 들 수 있다. 미산리와 대촌리에 사기점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문헌자료가 충분
치 못하고 증언해 줄만한 인물도 거의 없어 확실치 않으나 여러가지 정황과 구전되어
오는 것을 종합하여 특히 내덕리에서 월남하여 현재 구로구 독산동에 거주하는 김동
욱(金東旭, 당년 90세)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사기점의 시초는 조선조 말기라고 생각되며 약 130년이나 140년 전의 일로 짐작
된다.
--상기한 김동욱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동욱씨의 4대 선조인 재위공(在瑋公, 신묘년
생 신미년졸)이 유달리 근검역행하여 재산을 다소 증식시켜 당대에 지방 호족으로 행
세하다가 좀더 재산을 늘리고 생활의 편의를 도모코자 궁리하던 차에 재위공의 선영
이 있는 미산리를 자주 왕래하다가 미산리에 사기의 원석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고 연
료도 마련하기 용이하여 거기에 사기점을 설치했다 한다.
--그 후 사업이 번창하여 사기점이 확장됨에 따라 대촌리에 거주하던 이모씨가 대
촌리에 사기점을 개설하여 이후로 미산리와 대촌리에 각각 사기점이 한개씩 생기게
되었다.
--그 후 세태의 변천에 따라 일흥일쇠(一興一衰쇄)하며 명맥을 유지하였고 사기점
주인도 형편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다가 일제말기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각종 군수
물자의 핍박을 감당치 못하여 끝내 한국인이 조상 대대로 보물처럼 아끼는 유기그릇
까지 강제로 공출 회수하게 됨에 따라 식기가 크게 부족하게 되어 사기점은 한층 더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품의 종류도 다양해져서 사발 대접 항아리 단지 등을 생산하게 되었
는데 생산량도 많이 증가되었다. 초기에는 제품의 판로가 수안군의 일부밖에 미치지
못했으나 일제말기에는 황해도 봉산군의 탄전일대에 까지 제품을 판매 공급하였다.
--당시 태평양전쟁 말기라 모든 물자 공급이 여의치 못한 때였으나 사기점은 생산
공장이라는 특혜를 받아 자가 발전기까지 갖추고 생산을 독려하는 형편이었다. 말기
의 사기점 경영자는 미산리 공장은 안시택(安始澤)이었고 대촌리 공장은 장우영(張禹
永)이 운영했다고 하며 김동욱씨 자신의 집에도 선대에 사기점을 경영했던 관계로 유
달리 사기 항아리 단지 등이 많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교육 pp762.
--본 면은 수안군의 변방벽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교육열이 높아 일찍부터 학교
가 개설되어 초등교육이 시작되었다.
◎ 성동공립보통학교 : 본 보통학교는 1923. 4~1929. 3 어간 도하리에 있었던 숭
의학원(崇義學院 : 설립자 박보현)이 해방후 인민학교, 성동초급중학교로 robus 개교
소재 : 덕문리)
◎ 문동(文東)학원 :(내덕리 소재, 1932년 10월 1일 개교, 설립자 김학준(金學俊),
1936년 4월 1일 재동간이학교 개교로 폐교)
◎ 대평공립보통학교(1935년 4월 1일 개교, 해방후 대평인민학교로 됨. 소재지 대촌
리) 재동간이학교(1936년 4월 1일 개교, 해방후 재덕인민학교로 됨) 소재지 재동리.
▣ 인물(항일독립투사) pp762.
◎ 김두섭
☞ 김두섭은 내덕리 출신으로 내덕리가 안동김씨의 집단부락임을 감안하면 김두섭 또
한 안동김씨로 추정할 수 있어 소개합니다.
--본 면에서 항일 독립 투사로서 기록에 남길만한 사람은 김두섭(金斗燮)씨를 들
수 있다. 그는 내덕리 출신으로 어려서 천성이 명민하고 활달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국운이 쇠진하고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에 태어나서 그 큰 포부와 도량을
펼쳐 보지 못하고 요절한데 대하여 후세의 마을 사람들이 두고 두고 아쉬워 했다.
--청소년 시절에 해주에서 시행하는 백일장에 나가 일천(一天 : 과거에 맨 먼저 바
치는 글장)으로 장원을 하니 백일장에 모였던 많은 문사들이 수안 산골에도 글 잘하
는 사람이 있구나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개화의 물결이 세차게 밀려들자 단신 상경
하여 서울의 쟁쟁한 문사들과 교유하며 민족의 진로와 국가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조
국의 앞날능 개척하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1915년 서울의 협성학교에
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던 중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홀연히 고향으
로 돌아와 그때까지 문중에서 부리던 노비들을 불러 놓고 노비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
문서를 다 태워버리고 노자를 마련해 주면서 자유롭게 나가 살라고 했다 한다. 그리
고 도지를 받던 토지를 모두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길로 상경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기미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후 고향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한다. 그 뒤 풍문에 들여오는 바에 의하면 중국땅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어
30세도 못되는 아까운 나이에 이역만리 땅에서 옥사하였다 한다. 상기 내용은 내덕리
출신으로서 현재 60~70대라면 누구나 부모님이나 웃 어른께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기록으로 남기려고 하니 거증할 만한 문헌이 없는 것이 정말 유감스럽기
그지 없다.
▣ 명승 고적지. pp763.
◎ 선돌바위.
--내덕리 앞을 흐르는 조그만 시냇물이 가로막은 듯이 보인다해서 가르지기산이라
불리우는 산이 있다. 이 산의 정상에 마치 매어달린 것 같이 간들간들 서 있는 이상
하고 신기하게 생긴 바위가 있으니 이름하여 선돌바위이다.
--그 생김새가 아주 기이해서 십자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거로 획이 약간 위로 치우
쳐져 있고 세로 획이 중간쯤에 점같이 혹이 붙어서 흡사 한자의 변(卞)의 기묘한 형
상을 하였으니 여기에 그럴 듯한 전설이 없을 수 없다.
--이 선돌바위는 내덕리에서 월연리 광수리로 통하는 가르지기산의 절벽에 간들간
들 매달려 있다. 어릴 때 그 바위 아래를 지나가려면 당장이라도 바위가 굴러 떨러져
내려오지 않나 하여 겁이 덜컥 나서 자기도 모르게 뛰어 지나가곤 했었다.
--이 선돌바위에서 남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곳에 곰치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 밑에 20평은 족히 될만한 샘물의 근원지가 있다. 이 샘물의 용출구가 지름이 1m
가량의 구멍이 수직으로 뚫려 있어서 거기에서 1년 내내 거의 같은 수량의 물이 샘솟
아 내덕리 재동리 일대의 젖줄기 구실을 하는 희한하고 고마운 수원지가 있다. 이 선
돌바위에 얽힌 전설은 곰치산 밑의 수원지와 맞물려서 전개 된다.
(중략)
--그래서 욕심쟁이 노인의 착한 며느리는 여인의 본분인 길쌈질을 잠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무명을 짤 때에 쓰는 도투마리를 이고 쌀함지를 옆에 낀 여인의 모습의
선돌바위가 되었고 욕심쟁이 노인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집자리는 내덕리 재
동리 일대의 벼농사의 물줄기를 제공하는 수원지가 되었다 한다.
▣ 광복에서 실향시까지. pp770.
--일제의 질곡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은 연합군의 승전으로 해방을 맞았다. 해방과
함께 삼팔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어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본 면의
내덕, 재동, 좌도 3개리는 안동김씨의 집단부락이었고, 광수, 미산, 대촌 3개리는 수
안이씨의 집단부락인 관계로 해방된 시초에는 대촌리를 제외하고는 선 듯 공산당에
입당하는 사람이 적어 공산당이 그다지 창궐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차츰 시일이 흐
름에 따라 안동김씨의 하속(下屬)으로 있던 사람들이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토지개혁
으로 약간의 토지를 분배받은 철부지 얼치기들이 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 자격으로
행세하려 들었다. 그러던 것이 공산당의 6.25 남침으로 전국민을 인민군이나 의무 노
동에 동원함에 따라 온갖 학정과 수탈이 시작되자 모든 국민이 일시에 공산정권에 심
정적으로 반기를 들고 국군이 진격해 오지만을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10월
중순에 국군이 진격함에 따라 공산당의 참혹한 학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대성면민회원 명단(안동김씨 집단부락의 김씨만 열거함). pp772.
◎ 내덕리 :
김동근(金東根), 김동남(金東南), 김동협(金東協), 김동환(金東煥), 김병일(金秉一),
김상회(金祥會), 김성일(金成一), 김손길(金孫吉), 김승회(金承會), 김안영(金晏永),
김재경(金在璟), 김영구(金榮九), 김창섭(金昌燮), 김영대(金領大), 김영환(金榮煥),
김웅회(金雄會), 김원식(金元植), 김응섭(金應燮), 김의복(金義福), 김태관(金泰觀),
김태규(金泰奎), 김태복(金泰福), 김태삼(金泰三), 김태연(金泰淵), 김태욱(金泰旭),
김필진(金弼鎭), 김덕홍(金德洪), 김태은(金泰殷), 김현식(金玄植), 김형섭(金亨燮),
김혁섭(金革燮), 김봉조(金鳳祚), 김인섭(金仁燮).
◎ 재동리 :
김운섭(金雲燮), 김범수(金範壽), 김산기(金山起), 김은묵(金殷黙), 김희숙(金熙淑),
김래섭(金來燮),
◎ 좌도리 :
김상선(金相善), 김상록(金相祿), 김상현(金相賢), 김재호(金在鎬), 김진걸(金鎭杰),
김태남(金泰男), 김태원(金泰元), 김노열(金爐烈), 김기회(金琦會),
▣ 천곡면세일람(泉谷面勢一覽) pp785.
◎ 연혁(천곡면)
--천곡면은 본 군의 역사와 더불어 자연군락으로 주민자치제인 향약에 의해 고려와
조선조까지 내려 오다가 근대 이조시대를 거치면서 면의 행정구역이 확정되어 일제
초기에는 9개리로 되었다가 일제 말에는 면이 개편되면서 12개리로 확장되어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평원(坪院)은 천곡면 면소재지이다)
◎ 산하
--북쪽으로 언진산이 있어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언진천이 있으며 중앙에는 단목산
이 있어 내금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과 산중계곡에서 흘러 합수되는 곳에 평원천
(坪院川)이 있으며 위의 두 하천이 달촌리에서 합류하여 에성강의 상류를 이룬다.
--면 전체가 언진산맥이 흘러 내려 이루어진 산지인 관계로 고개와 언덕이 수없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벌어니(평원)와 박새울 사이를 넘나드는 단목산정인 「박
새울고개」가 있고, (중략)평원에서 상구리로 가는 길목에 「구라우고재」가 있다.
◎ 행정구역과 동리명. pp 786.
--평원리(坪院里) : 웃장거리, 아래장거리, 안동네, 늦다리, 금수골, 말미께, 덕상.
◎ 호구수. pp 787.
--평원리(坪院里) : 300여호 1,500여명.(중략)
--이상 2,000여호 1만여명의 주민이 각 부락에 살고 있으며, 성씨로는 수안이씨와
안동김씨가 주종을 이루나 총막리 막실에는 유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각 성씨가 전 면
에 골고루 퍼져 살고 있다.
▣ 산업. pp787.
--천곡면은 언진산의 산자락으로서 산맥에서 흘러 내린 산악과 고원지대로 이루어
져 있음으로 산지가 대부분이며, 농경지로는 밭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관계로 밭
농사 위주의 농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천곡면은 언진산맥이 흘러서 펼쳐진 고장이므로 광업 수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금. 은. 동이 전 면(面)에 걸쳐 채취되고 있다. 내금리와 평원리 작수동(作水洞) 광산
에서는 금. 은. 동이 채굴되고 있고 그 밖에 달촌리와 주암리 등지에서는 사금(砂金)
이 많아 일제시대에는 일본광업이 사금채취에 진출하기도 했다.
◎ 교통.
--교통편은 평원에서 대오면 사창까지가 차도로 개발되어 있어. . . . .그밖의 교통은
각 부락마다 내왕하는 보도가 리(里)를 중심으로 뻗어 있으나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 시장.
--본 면은 산간지방이므로 교통이 불편하여 5일마다 장터를 개설하여 주민들의 경
제생활에 많은 편리를 가져 왔으며 생필품의 매매교환은 물론 친지들의 교우상봉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시장은 면내에 벌어니장터(평원)와 용현리에 연자개장터가 개설
되었다.
▣ 교육 pp788.
--(전략) 공립으로는 평원국민학교가 있었고, 중학은 8.15 이후에 평원리에 천곡중
학교가 설립되었었다.
▣ 반공의거. pp791~792.
◎ 서북청년회사건.
1947년 말경부터 48년 초에 걸쳐 평원리, 옥연리, 유촌리, 상구리 등지에서는 공산정
권에 대한 일대 검거 선풍이 있었다. 이 사건은 남한의 서북청년 세력이 이웃 곡산으
로 들어와 물자교류를 가장한 고무신 속에 권총을 반입. 무장 봉기를 도모하다 탄로
된 사건으로서, 곡산지방에서부터 탄로되기 시작하여 면내의 많은 조직원들이 체포되
었고, 일부는 탈출하였다.체포된 인사로는 옥련리에서 김상호, 김상빈, 김상현 외 다
수였고, 유촌리에서 김경구, 평원리에서 김재호, 김관순씨 등이 연루되었으나 이웃에
살던 김성옥씨가 반년간이나 다락방에 숨겨 주었다가 남한으로 탈출, 현재 서울과 동
두천 등지에 살고 있다.
◎ 특수접(特殊接) 조직사건.
--1950년 9월경 6.25동란이 인민군의 열세로 패색이 짙어질 무렵 수안군 일대에서
는 천도교 청우당원 검거선풍이 일었다.
--청우당내에서는 48년도 3.1운동의 재현사건이 있었고, 49년과 50년도에 걸쳐 영
우회사건이 있었다.
--영우회사건은 3.1운동의 재현을 의미하는 통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천도교의
정신조직기관을 정비하여 다음을 대비할 목적으로 영우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드는 과
정에서 조직내에 특수 접 조직이 생겼다.
--전선에서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수안군내 특수 접 조직을 담당한 청우당 간부진
23명이 정치보위부에 피검되었다.
--그 중에 천곡면에서는 청우당 면당을 지도하던 김재호(당시 45세), 이봉운, 유정
엽씨 등이 체포되었으나 조사과정에서 유정엽씨는 노령으로 석방되고 위 두사람은 수
안군내 피검자와 함께 도 정치보위부를 거쳐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동년 10월 16
일 해주가 U.N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탈출 김재호씨는 환가하였다가 불행히도 중공군
개입으로 남하하지 못하고 이봉운(성운)은 다행히 남한으로 피난하여 같이 형무소에
서 탈출한 도소면의 이연상, 이기황, 김병구씨 등과 함께 서울에 살고 있다.
▣ 천곡면민회원 명단(안동김씨 집단부락의 김씨만 열거함). pp793.
◎ 평원리 :
김정순, 김여호, 김재엽, 김재호, 김재명, 김종인, 김재호, 김석하, 김승열, 김영민,
김연도, 김태석, 김재원, 김관순, 김상문, 김재한, 김형구, 김정묵, 김창하, 김만호,
김태식, 김성옥, 김필득, 김승재, 김덕균, 김성균, 김성준, 긴준려.
▣ 시문. pp794.
◎ 無我覺(무아각) : 金正黙(김정묵)
--救貧救國聖君仁(구빈구국성군인)
--早害水災常恤民(조해수재상휼민)
--가난을 없애고 나라도 구제함이 위대한 성군처럼 어진일인데 가뭄피해와 수재시
항상 백성의 고생을 어루만지더라.
--鳳鳴鷄林軍革命(봉명계림군혁명)
--龍飛漢府邦維新(용비한부방유신)
--봉황이 계림(신라 도읍 경주)에서 울어서 군사로 혁명하며 나라를 바로잡고 용이
서울(한성부)에 날라서 나라를 혁신했더라.
--大興經濟冠千世(대흥경제관천세)
--克明政治撫四隣(극명정치무사린)
--크게 경제를 부흥시켰으니 천세에 제일 으뜸될만하고 능히 정치를 밝혀서 사방
백성을 어루만졌더라.
--逝後積功永不盡(서후적공영불진)
--德垂滅共統韓眞(덕수멸공통한진)
--돌아가신 후에도 그 공적은 길이 다하지 아니하여 덕으로 드리운 것이 멸공으로
한국을 통일함이 참된 정신이다.
※ 이 시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1979. 11. 2. 경향신문 게재.
《작자 소개 : 천곡면 평원리에서 월남. 인제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정년 퇴
직. 강남성모병원장 재호(在浩)박사 엄친임》
▣ 세계일보(1991. 3.26. 10면)
◎ <김재호(가톨릭의대 교수)>의 망향(望鄕) 에세이 :“나의 고향 「벌어니」”부제
‘오늘밤 꿈속에서도 쏘가리를 잡아야지’글이 실려 있으며,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 김발용 - 윤만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올려주신글 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덕분에 많은것을 알게되었습니다.
▣ 솔내 영환 - 어휴! 이 많은 글을 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하고 귀한 엄청난 자료입니다. 복사해서 편집해서 자료화해서 두고두고 연구하고 활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③수안김씨(遂安김씨) pp211.
--김씨도 집성촌을 이룬 것으로 되어 있어 근거를 찾아 보았다. 1874, 1903,
1922, 1954년 각각 보책이 간행되었으나 임진병화로 그 전 것이 소실되어 시조조차
가리질 못하고 있는 바 수안군(遂安君)이었던 김선(金愃)을 시조로 삼았을 것으로 짐
작이 간다.
--시조는 김해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27세손으로서 지(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之(元)
忠端力安社保定功臣)이요 봉익대부유화(부지)밀직사 전법판서상장군 봉수안군(奉翊
大夫劉和(副知)密直司 典法判書上將軍 封遂安君). 이로 인해 후손들이 본관으로 삼
었다 한다.
☞ 옮긴이 주 : 위 글중 김해김씨 시조는 수로왕으로 오기이고, 수안김씨 시조 김선
(金愃)은 충렬공 방경(方慶)의 맏아드님으로 김알지의 27세손이라 함도 오기이며( )
안이 바른 기록입니다.
참고로 전법판서 상장군 김선의 묘소는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에 있습니다.
◎ 1850년대의 거주성씨표 pp212.
--성동면 내덕리 (안동김씨) 81세대.
--성동면 제동리 (안동김씨) 72세대. ※재동리의 오기임.
--성동면 좌도리 (안동김씨) 43세대.
--대평면 대평리 (안동김씨) 20세대.
--천곡면 평원리 (안동김씨) 27세대.
※ 수안군에서는 위 기록이외 안동김씨의 거주 기록이 없으며, 1930년대 수안군의
--성씨별 인구 중 김씨는 3,093명으로 가장 많은 대성(大姓)이었음.
▣ 관향으로 본 인물(수안김씨). pp637~643.
○ 김선(金愃, 封遂安君. 典法判書) ※김독(金牘)이라고도 표기되어 있으나 근거없음.
--고려 충선왕 때의 인물임. 그는 신라 김알지의 28세손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
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 김방경(金方慶) 상락군(上洛君)의 큰 아들이
다. 공은 중신으로 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밀직사 전법판서 상장군(元忠
端力安社保定功臣 奉翊大夫 副知密直司 典法判書 上將軍)으로 수안군에 봉해지어 수
안김씨의 시조가 됨.
○ 김자(金資, 都僉議司事)
--직령(直令) 동정전리공신 봉익대부 삼중대광 도첨의사사(同正典理功臣 奉翊大夫
三重大匡 都僉議司事)를 지냄.
○ 김위(金爲, 典理判書)
--諱渭. 고려 전리판서(典理判書)였고, 금자광록대부사(金紫光祿大夫事)였다. 고려
원종때 분이다.
○ 김득남(金得南, 典理判書)
--諱渭德. 보전리판서(補典理判書)에 이름.
○ 김윤(金潤, 縣監)
○ 김이(金履, 正言)
--문과(文科)정언(正言)동국통감헌부(憲府)상소(上疏)계장수(稧長壽) 이무(李茂)
이빈(李彬) 김이(金履) 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교결당부(交結黨附) 욕무도(欲誣
蹈) 충양우란(忠良우亂)으로 국가의수직첩운운(國家宜收職牒云云)하고 경찬진도(竟竄
珍島)했다.
○ 김수(金綏, 吏曹正郞)
○ 김정(金精, 密直副使)
--밀직부사 여김홍식조사공유(與金洪植趙思恭兪) 밀직부사로서 김홍식, 조사공, 유
사의, 김제안, 김구빈, 이원림, 사희종 등과 모반하다 주살당하였으니 서기 1368년
10월의 일이다.
○ 김문범(金文範, 將士郞)
--장사랑(將士郞)행(行) 기자전(箕子殿) 참봉을 지냄.
○ 김세광(金世光, 副司直)
※ 수안김씨대동보에 의거 김이. 김수. 김정은 김득남의 자(子) 입니다.
▣ 대성면세일람(大城面勢一覽)
◎ 연혁(대성면)
--1938년 7월 1일에 성동면과 수안군 대평면의 일부(대촌리 미산리 철령리)가 통
폐합되어 이후로 대성면이라 일컬으게 되었다.
◎ 대성면 12개리 자연부락과 가구수.
(☞ pp212. 1850년대의 거주성씨표 중 안동김씨 부락 소개)
--좌도리(佐桃里) 2개구(個區) : 좌동 아랫말 낭말 새장거리 여자울 샛동네 120호
--재동리(齎洞里) 2개구 : 서재골 벌말 세거리골 논거리 당재 사당골 한심마을 새터
곰배 112호
--내덕리(內德里) 2개구 : 드렁골 안골 양촌 청덕골 고사리편 바리봉골 배태울 바랑
골 108호
◎ 산하
--산세 : 산지가 많고 평지가 비교적 적다. 본 면의 서북쪽으로 감박산(甘朴山,
629m)의 줄기가 뻗어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본 면 중앙부를 검산(劍山, 509m)줄기
가 남북으로 뻗어 있어 반상(伴上) 좌도리와 재동리, 내덕리, 월연리로 갈라놓고 있다.
--현령(峴嶺) : 동고개 - 동고개는 내덕리에서 도하리로 통하는 고갯길로 평소 교
통량이 많으나 고산준령이어서 내덕리 일대를 사회적. 문화적으로 낙후시키고 있다.
--수세 : 내덕천 - 서흥군 구포면 구정리에서 시류(始流)하여 내덕. 월연. 광수리를
거쳐 예성강에 흘러들어감.
▣ 주민성씨. pp759.
--본 면은 대체로 내덕리, 좌도리, 재동 3개리는 안동김씨의 집단부락이었고, 광수
리, 대촌리, 미산 3개리는 수안이씨의 집단 부락인 관계로 김씨, 이씨가 많았다. 그
외의 리(里) 성씨 분포는 다음과 같다.(후략)
▣ 산업. pp760~761
--본 면은 수안군 전역이 그렇듯이 산지가 많고 평지가 협소할 뿐 아니라 토지가
척박하여 농산물의 생산량도 많지 않다. 밭이 많고 논이 적어 잡곡의 생산량이 많다.
◎ 사기점(沙器店)
☞ 사기점에 대한 증언자 김동욱이 내덕리에서 월남한 분으로 내덕리가 안동김씨의
집단부락임을 감안하면 본 사기점에 대한 기록 또한 안동김씨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본 면에서 공산품으로 기록에 남길만 한 것은 미산리와 대촌리에서 산출된 도자
기를 들 수 있다. 미산리와 대촌리에 사기점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문헌자료가 충분
치 못하고 증언해 줄만한 인물도 거의 없어 확실치 않으나 여러가지 정황과 구전되어
오는 것을 종합하여 특히 내덕리에서 월남하여 현재 구로구 독산동에 거주하는 김동
욱(金東旭, 당년 90세)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사기점의 시초는 조선조 말기라고 생각되며 약 130년이나 140년 전의 일로 짐작
된다.
--상기한 김동욱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동욱씨의 4대 선조인 재위공(在瑋公, 신묘년
생 신미년졸)이 유달리 근검역행하여 재산을 다소 증식시켜 당대에 지방 호족으로 행
세하다가 좀더 재산을 늘리고 생활의 편의를 도모코자 궁리하던 차에 재위공의 선영
이 있는 미산리를 자주 왕래하다가 미산리에 사기의 원석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고 연
료도 마련하기 용이하여 거기에 사기점을 설치했다 한다.
--그 후 사업이 번창하여 사기점이 확장됨에 따라 대촌리에 거주하던 이모씨가 대
촌리에 사기점을 개설하여 이후로 미산리와 대촌리에 각각 사기점이 한개씩 생기게
되었다.
--그 후 세태의 변천에 따라 일흥일쇠(一興一衰쇄)하며 명맥을 유지하였고 사기점
주인도 형편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다가 일제말기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각종 군수
물자의 핍박을 감당치 못하여 끝내 한국인이 조상 대대로 보물처럼 아끼는 유기그릇
까지 강제로 공출 회수하게 됨에 따라 식기가 크게 부족하게 되어 사기점은 한층 더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품의 종류도 다양해져서 사발 대접 항아리 단지 등을 생산하게 되었
는데 생산량도 많이 증가되었다. 초기에는 제품의 판로가 수안군의 일부밖에 미치지
못했으나 일제말기에는 황해도 봉산군의 탄전일대에 까지 제품을 판매 공급하였다.
--당시 태평양전쟁 말기라 모든 물자 공급이 여의치 못한 때였으나 사기점은 생산
공장이라는 특혜를 받아 자가 발전기까지 갖추고 생산을 독려하는 형편이었다. 말기
의 사기점 경영자는 미산리 공장은 안시택(安始澤)이었고 대촌리 공장은 장우영(張禹
永)이 운영했다고 하며 김동욱씨 자신의 집에도 선대에 사기점을 경영했던 관계로 유
달리 사기 항아리 단지 등이 많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교육 pp762.
--본 면은 수안군의 변방벽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교육열이 높아 일찍부터 학교
가 개설되어 초등교육이 시작되었다.
◎ 성동공립보통학교 : 본 보통학교는 1923. 4~1929. 3 어간 도하리에 있었던 숭
의학원(崇義學院 : 설립자 박보현)이 해방후 인민학교, 성동초급중학교로 robus 개교
소재 : 덕문리)
◎ 문동(文東)학원 :(내덕리 소재, 1932년 10월 1일 개교, 설립자 김학준(金學俊),
1936년 4월 1일 재동간이학교 개교로 폐교)
◎ 대평공립보통학교(1935년 4월 1일 개교, 해방후 대평인민학교로 됨. 소재지 대촌
리) 재동간이학교(1936년 4월 1일 개교, 해방후 재덕인민학교로 됨) 소재지 재동리.
▣ 인물(항일독립투사) pp762.
◎ 김두섭
☞ 김두섭은 내덕리 출신으로 내덕리가 안동김씨의 집단부락임을 감안하면 김두섭 또
한 안동김씨로 추정할 수 있어 소개합니다.
--본 면에서 항일 독립 투사로서 기록에 남길만한 사람은 김두섭(金斗燮)씨를 들
수 있다. 그는 내덕리 출신으로 어려서 천성이 명민하고 활달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국운이 쇠진하고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에 태어나서 그 큰 포부와 도량을
펼쳐 보지 못하고 요절한데 대하여 후세의 마을 사람들이 두고 두고 아쉬워 했다.
--청소년 시절에 해주에서 시행하는 백일장에 나가 일천(一天 : 과거에 맨 먼저 바
치는 글장)으로 장원을 하니 백일장에 모였던 많은 문사들이 수안 산골에도 글 잘하
는 사람이 있구나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개화의 물결이 세차게 밀려들자 단신 상경
하여 서울의 쟁쟁한 문사들과 교유하며 민족의 진로와 국가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조
국의 앞날능 개척하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1915년 서울의 협성학교에
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던 중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홀연히 고향으
로 돌아와 그때까지 문중에서 부리던 노비들을 불러 놓고 노비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
문서를 다 태워버리고 노자를 마련해 주면서 자유롭게 나가 살라고 했다 한다. 그리
고 도지를 받던 토지를 모두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길로 상경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기미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후 고향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한다. 그 뒤 풍문에 들여오는 바에 의하면 중국땅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어
30세도 못되는 아까운 나이에 이역만리 땅에서 옥사하였다 한다. 상기 내용은 내덕리
출신으로서 현재 60~70대라면 누구나 부모님이나 웃 어른께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기록으로 남기려고 하니 거증할 만한 문헌이 없는 것이 정말 유감스럽기
그지 없다.
▣ 명승 고적지. pp763.
◎ 선돌바위.
--내덕리 앞을 흐르는 조그만 시냇물이 가로막은 듯이 보인다해서 가르지기산이라
불리우는 산이 있다. 이 산의 정상에 마치 매어달린 것 같이 간들간들 서 있는 이상
하고 신기하게 생긴 바위가 있으니 이름하여 선돌바위이다.
--그 생김새가 아주 기이해서 십자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거로 획이 약간 위로 치우
쳐져 있고 세로 획이 중간쯤에 점같이 혹이 붙어서 흡사 한자의 변(卞)의 기묘한 형
상을 하였으니 여기에 그럴 듯한 전설이 없을 수 없다.
--이 선돌바위는 내덕리에서 월연리 광수리로 통하는 가르지기산의 절벽에 간들간
들 매달려 있다. 어릴 때 그 바위 아래를 지나가려면 당장이라도 바위가 굴러 떨러져
내려오지 않나 하여 겁이 덜컥 나서 자기도 모르게 뛰어 지나가곤 했었다.
--이 선돌바위에서 남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곳에 곰치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 밑에 20평은 족히 될만한 샘물의 근원지가 있다. 이 샘물의 용출구가 지름이 1m
가량의 구멍이 수직으로 뚫려 있어서 거기에서 1년 내내 거의 같은 수량의 물이 샘솟
아 내덕리 재동리 일대의 젖줄기 구실을 하는 희한하고 고마운 수원지가 있다. 이 선
돌바위에 얽힌 전설은 곰치산 밑의 수원지와 맞물려서 전개 된다.
(중략)
--그래서 욕심쟁이 노인의 착한 며느리는 여인의 본분인 길쌈질을 잠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무명을 짤 때에 쓰는 도투마리를 이고 쌀함지를 옆에 낀 여인의 모습의
선돌바위가 되었고 욕심쟁이 노인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집자리는 내덕리 재
동리 일대의 벼농사의 물줄기를 제공하는 수원지가 되었다 한다.
▣ 광복에서 실향시까지. pp770.
--일제의 질곡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은 연합군의 승전으로 해방을 맞았다. 해방과
함께 삼팔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어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본 면의
내덕, 재동, 좌도 3개리는 안동김씨의 집단부락이었고, 광수, 미산, 대촌 3개리는 수
안이씨의 집단부락인 관계로 해방된 시초에는 대촌리를 제외하고는 선 듯 공산당에
입당하는 사람이 적어 공산당이 그다지 창궐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차츰 시일이 흐
름에 따라 안동김씨의 하속(下屬)으로 있던 사람들이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토지개혁
으로 약간의 토지를 분배받은 철부지 얼치기들이 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 자격으로
행세하려 들었다. 그러던 것이 공산당의 6.25 남침으로 전국민을 인민군이나 의무 노
동에 동원함에 따라 온갖 학정과 수탈이 시작되자 모든 국민이 일시에 공산정권에 심
정적으로 반기를 들고 국군이 진격해 오지만을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10월
중순에 국군이 진격함에 따라 공산당의 참혹한 학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대성면민회원 명단(안동김씨 집단부락의 김씨만 열거함). pp772.
◎ 내덕리 :
김동근(金東根), 김동남(金東南), 김동협(金東協), 김동환(金東煥), 김병일(金秉一),
김상회(金祥會), 김성일(金成一), 김손길(金孫吉), 김승회(金承會), 김안영(金晏永),
김재경(金在璟), 김영구(金榮九), 김창섭(金昌燮), 김영대(金領大), 김영환(金榮煥),
김웅회(金雄會), 김원식(金元植), 김응섭(金應燮), 김의복(金義福), 김태관(金泰觀),
김태규(金泰奎), 김태복(金泰福), 김태삼(金泰三), 김태연(金泰淵), 김태욱(金泰旭),
김필진(金弼鎭), 김덕홍(金德洪), 김태은(金泰殷), 김현식(金玄植), 김형섭(金亨燮),
김혁섭(金革燮), 김봉조(金鳳祚), 김인섭(金仁燮).
◎ 재동리 :
김운섭(金雲燮), 김범수(金範壽), 김산기(金山起), 김은묵(金殷黙), 김희숙(金熙淑),
김래섭(金來燮),
◎ 좌도리 :
김상선(金相善), 김상록(金相祿), 김상현(金相賢), 김재호(金在鎬), 김진걸(金鎭杰),
김태남(金泰男), 김태원(金泰元), 김노열(金爐烈), 김기회(金琦會),
▣ 천곡면세일람(泉谷面勢一覽) pp785.
◎ 연혁(천곡면)
--천곡면은 본 군의 역사와 더불어 자연군락으로 주민자치제인 향약에 의해 고려와
조선조까지 내려 오다가 근대 이조시대를 거치면서 면의 행정구역이 확정되어 일제
초기에는 9개리로 되었다가 일제 말에는 면이 개편되면서 12개리로 확장되어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평원(坪院)은 천곡면 면소재지이다)
◎ 산하
--북쪽으로 언진산이 있어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언진천이 있으며 중앙에는 단목산
이 있어 내금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과 산중계곡에서 흘러 합수되는 곳에 평원천
(坪院川)이 있으며 위의 두 하천이 달촌리에서 합류하여 에성강의 상류를 이룬다.
--면 전체가 언진산맥이 흘러 내려 이루어진 산지인 관계로 고개와 언덕이 수없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벌어니(평원)와 박새울 사이를 넘나드는 단목산정인 「박
새울고개」가 있고, (중략)평원에서 상구리로 가는 길목에 「구라우고재」가 있다.
◎ 행정구역과 동리명. pp 786.
--평원리(坪院里) : 웃장거리, 아래장거리, 안동네, 늦다리, 금수골, 말미께, 덕상.
◎ 호구수. pp 787.
--평원리(坪院里) : 300여호 1,500여명.(중략)
--이상 2,000여호 1만여명의 주민이 각 부락에 살고 있으며, 성씨로는 수안이씨와
안동김씨가 주종을 이루나 총막리 막실에는 유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각 성씨가 전 면
에 골고루 퍼져 살고 있다.
▣ 산업. pp787.
--천곡면은 언진산의 산자락으로서 산맥에서 흘러 내린 산악과 고원지대로 이루어
져 있음으로 산지가 대부분이며, 농경지로는 밭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관계로 밭
농사 위주의 농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천곡면은 언진산맥이 흘러서 펼쳐진 고장이므로 광업 수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금. 은. 동이 전 면(面)에 걸쳐 채취되고 있다. 내금리와 평원리 작수동(作水洞) 광산
에서는 금. 은. 동이 채굴되고 있고 그 밖에 달촌리와 주암리 등지에서는 사금(砂金)
이 많아 일제시대에는 일본광업이 사금채취에 진출하기도 했다.
◎ 교통.
--교통편은 평원에서 대오면 사창까지가 차도로 개발되어 있어. . . . .그밖의 교통은
각 부락마다 내왕하는 보도가 리(里)를 중심으로 뻗어 있으나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 시장.
--본 면은 산간지방이므로 교통이 불편하여 5일마다 장터를 개설하여 주민들의 경
제생활에 많은 편리를 가져 왔으며 생필품의 매매교환은 물론 친지들의 교우상봉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시장은 면내에 벌어니장터(평원)와 용현리에 연자개장터가 개설
되었다.
▣ 교육 pp788.
--(전략) 공립으로는 평원국민학교가 있었고, 중학은 8.15 이후에 평원리에 천곡중
학교가 설립되었었다.
▣ 반공의거. pp791~792.
◎ 서북청년회사건.
1947년 말경부터 48년 초에 걸쳐 평원리, 옥연리, 유촌리, 상구리 등지에서는 공산정
권에 대한 일대 검거 선풍이 있었다. 이 사건은 남한의 서북청년 세력이 이웃 곡산으
로 들어와 물자교류를 가장한 고무신 속에 권총을 반입. 무장 봉기를 도모하다 탄로
된 사건으로서, 곡산지방에서부터 탄로되기 시작하여 면내의 많은 조직원들이 체포되
었고, 일부는 탈출하였다.체포된 인사로는 옥련리에서 김상호, 김상빈, 김상현 외 다
수였고, 유촌리에서 김경구, 평원리에서 김재호, 김관순씨 등이 연루되었으나 이웃에
살던 김성옥씨가 반년간이나 다락방에 숨겨 주었다가 남한으로 탈출, 현재 서울과 동
두천 등지에 살고 있다.
◎ 특수접(特殊接) 조직사건.
--1950년 9월경 6.25동란이 인민군의 열세로 패색이 짙어질 무렵 수안군 일대에서
는 천도교 청우당원 검거선풍이 일었다.
--청우당내에서는 48년도 3.1운동의 재현사건이 있었고, 49년과 50년도에 걸쳐 영
우회사건이 있었다.
--영우회사건은 3.1운동의 재현을 의미하는 통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천도교의
정신조직기관을 정비하여 다음을 대비할 목적으로 영우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드는 과
정에서 조직내에 특수 접 조직이 생겼다.
--전선에서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수안군내 특수 접 조직을 담당한 청우당 간부진
23명이 정치보위부에 피검되었다.
--그 중에 천곡면에서는 청우당 면당을 지도하던 김재호(당시 45세), 이봉운, 유정
엽씨 등이 체포되었으나 조사과정에서 유정엽씨는 노령으로 석방되고 위 두사람은 수
안군내 피검자와 함께 도 정치보위부를 거쳐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동년 10월 16
일 해주가 U.N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탈출 김재호씨는 환가하였다가 불행히도 중공군
개입으로 남하하지 못하고 이봉운(성운)은 다행히 남한으로 피난하여 같이 형무소에
서 탈출한 도소면의 이연상, 이기황, 김병구씨 등과 함께 서울에 살고 있다.
▣ 천곡면민회원 명단(안동김씨 집단부락의 김씨만 열거함). pp793.
◎ 평원리 :
김정순, 김여호, 김재엽, 김재호, 김재명, 김종인, 김재호, 김석하, 김승열, 김영민,
김연도, 김태석, 김재원, 김관순, 김상문, 김재한, 김형구, 김정묵, 김창하, 김만호,
김태식, 김성옥, 김필득, 김승재, 김덕균, 김성균, 김성준, 긴준려.
▣ 시문. pp794.
◎ 無我覺(무아각) : 金正黙(김정묵)
--救貧救國聖君仁(구빈구국성군인)
--早害水災常恤民(조해수재상휼민)
--가난을 없애고 나라도 구제함이 위대한 성군처럼 어진일인데 가뭄피해와 수재시
항상 백성의 고생을 어루만지더라.
--鳳鳴鷄林軍革命(봉명계림군혁명)
--龍飛漢府邦維新(용비한부방유신)
--봉황이 계림(신라 도읍 경주)에서 울어서 군사로 혁명하며 나라를 바로잡고 용이
서울(한성부)에 날라서 나라를 혁신했더라.
--大興經濟冠千世(대흥경제관천세)
--克明政治撫四隣(극명정치무사린)
--크게 경제를 부흥시켰으니 천세에 제일 으뜸될만하고 능히 정치를 밝혀서 사방
백성을 어루만졌더라.
--逝後積功永不盡(서후적공영불진)
--德垂滅共統韓眞(덕수멸공통한진)
--돌아가신 후에도 그 공적은 길이 다하지 아니하여 덕으로 드리운 것이 멸공으로
한국을 통일함이 참된 정신이다.
※ 이 시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1979. 11. 2. 경향신문 게재.
《작자 소개 : 천곡면 평원리에서 월남. 인제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정년 퇴
직. 강남성모병원장 재호(在浩)박사 엄친임》
▣ 세계일보(1991. 3.26. 10면)
◎ <김재호(가톨릭의대 교수)>의 망향(望鄕) 에세이 :“나의 고향 「벌어니」”부제
‘오늘밤 꿈속에서도 쏘가리를 잡아야지’글이 실려 있으며,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 김발용 - 윤만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올려주신글 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덕분에 많은것을 알게되었습니다.
▣ 솔내 영환 - 어휴! 이 많은 글을 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하고 귀한 엄청난 자료입니다. 복사해서 편집해서 자료화해서 두고두고 연구하고 활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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