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발간사 09 (1902임인보 序)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7-17 01:20 조회1,455회 댓글0건본문
족보 발간사 09 (1902임인보 序)
우리 문중의 최초의 最古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422년전인 임진왜란 12년전, 선조13년, 1580년에 간행한 경진보입니다.
160년이 지난 영조15년, 1739년에 기미보 발간,
40년후인 정조2년 1778년에 무술보 발간,
48년후인 순조25년 1825년에 乙酉譜 발간,
43년후인 1867년에 정묘보 발간.
36년후인 1902년에 임인보를 발간하게 됩니다.
1580년 경진보 간행에는
(제)김익과 손자 김방, 아들 윤선
(제)김곽과 아들 김제현
(분파?)김오
(익)김억령, 김찬, 김환 등이 참여하였고,
1739 기미보 간행에는
(분파?)김성유와 족질 김권
(제)김남정
(제)김한장
(안)김집
(익)김우태
(부)김중우와 아들 김유,김식
(부)김흡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1778년 무술보 발간에는
분파?) 南門+困(남곤)
분파?) 永綏(영수)
군사) 光國
(안렴) 得顯
분파?) 樂豊 등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1825년 을유보 발간에는
분파?) 禹元 선조님께서 발간을 주관하시고 또한 序文을 지었고
1867년 정묘보 발간에는
분파?) 用栢, 道健이 참여하였었습니다.
그리고 1902년 임인보 발간에는
善弼이 보사를 시작하였고, 圭默이 교정하고 서문을 지었습니다.
▣ 족보 발간사
---임인보 (광무6년 1902)
10. ●임인보 서
歲 임인 중추 하한 (仲秋下澣) ---충렬공 22세손 ★圭默 근서
무릇 족보라는 것은 그 先世를 계승하고 그 族屬을 敍記하는 것이다. 우리 김씨는 ★태보공을 시조로 하고, ★충렬공을 중시조로 해서 멀리 신라와 고려를 지나 이조에 이르기까지 세대가 멀고 氏族이 더욱 번성하여 名公碩學과 勳烈文章이 찬란하고 쟁쟁하여 국사에 밝게 실려있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후에 자손들이 별과 같이 8도에 흩어져 살고 있어 각각 자기의 조상을 그 顯祖로 하고 각각 그 족보를 따로 해서 올바른 계통이 있을 수 없더니 이것이 선조 庚辰(=1580)년과 영조 己未(=1739)년 정조 戊戌(=1778)년과 순조 乙酉(=1825)년에 대보를 만든 것이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역대 年條가 대개 사실과 틀리는 것이 많았다
정조 甲辰(=1784) 년에 ★대안군(=은열) 誌文을 그 실전했던 묘소에서 발견하여 이에 대한군 휘은열이 ★경순왕의 넷째아들임을 알게 되었고, 그 밑으로 3세사 ★시랑공(=숙승) ★태사공(=일긍) ★상락군(=이청)으로 면면히 서로 이어 왔음을 가히 상고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고
또 그 년기를 상고하고 그 세대를 계산하여 본즉 ★태보공 생년 乙丑년(=?65)으로부터 지금의 壬寅년(=1902)에 이르기까지 1,838년이 되고 ★圭默은 ★태보공에서 58세가 되니 1세를 30년으로 계산하면 대략 서로 부합되며, ★得顯씨의 戊戌보(=1778) 辨證과 ★用栢씨의 丁卯보(=1867)의 發明이 각각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로 본다면 겨레가 비록 번성해도 오히려 그 計寸을 알 수 있고 세대가 비록 멀어도 계대를 알 수 있으니 어찌 우리 김씨의 다행한 일이 아닌가.
옛사람이 이른바 "조심스럽게 그 아는 바를 존중하고 그 고증을 상세히 해서 고증하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만들지 말라"고 말함이 거의 근사한 것이다.
지난 甲戌년(=?)에 지삼군부사 ★善弼씨가 이 보사를 시작하였을 때, 나(=규묵)는 젊은 나이로 교정역에 참열하였더니 재력이 부족하여 완성치 못하고 오랫동안 한탄하여 왔었다.
己亥년(=?) 가을에 서울의 제종들과 더불어 시작했으나 준공하지 못하고 드디어 철수하고 목주(현 목천)로 돌아가서 모 모 제공들과 그 役事를 주간하고 가 사본을 보충해서 2년이 지난 후에 완공을 보게 되니 무릇 31권이 되었다.
이에 선조의 昭穆(소목)의 차례가 있게 되고 자손의 항렬이 歸一하게 되니 비로소 같은 계통의 의의를 얻게 되었다.
족보가 殷盛하게 이루어 졌으니 서문이 없어서는 아니됨으로 삼가 그 사실을 위와 같이 서술하노라
歲 壬寅 仲秋 下澣
충렬공 22세손 ★圭默 謹序
★부사)善弼
★분파?)圭默
<디지털한국학>
★김선필(金善弼)
1807(순조 7)∼1883(고종 20).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필(仲弼).
아버지는 ★학기(學基)이다.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정기(鼎基)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 이는 생부에게서 양부 앞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1829년(순조 29)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충청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고종 때에 들어와서는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친 선봉장 ★이용희(李容熙)의 우익(右翼)으로 부평(富平)에 주둔하면서 수도방위를 담당했다.
경기중군(京畿中軍)을 거쳐,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수로(江華水路)의 중요한 근거지인 광성진(廣城津)을 방어하다 미국군의 공격을 받아 장렬하게 전사한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의 후임으로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중군(中軍)을 지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복설(復設)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1882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登壇錄, 韓國史―最近世篇―(李瑄根, 乙酉文化社, 1961). 〈李相燦>
<서울600년사>
한글(한자)이름 ★김선필 (金善弼)
기원기준 A.D
호
자 중필(仲弼)
출생년 1807(순조 7)
사망년 1883(고종 20)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무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登壇錄
관련항목
이력사항
1807(순조 7)∼1883(고종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필(仲弼)로서 ★김학기(金學基)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김정기(金鼎基)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는 것으로 보아 양부에게로 입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순조 29년(1829)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 충청도 병마절도사사를 역임하였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에는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친 선봉장 ★이용희(李容熙)의 우익(右翼)으로 부평(富平)에 주둔하면서 수도 방위를 담당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전사한 진무 중군 ★어재연(魚在淵)의 후임으로 진무사가 되어 중군을 지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설치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렀다. 1882년 잠시 강화부 유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 김윤만 - 족보 연재자료로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 김재익 -
▣ 솔내 영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