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30.(진주시 : 충렬공 김시민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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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18 03:48 조회1,690회 댓글0건본문
진주시사(상)/진주시사편찬위원회/1994.에는
▣ 1차 진주성 전투전 진주지방의 제 상황. pp559~564.
▣ 1차 진주성 전투의 전개과정. pp564~577.이 19면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
--나 임진왜란 3대첩중 김시민 장군의 이 진주대첩은 너무나 유명하고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합니다.
진주시사(하)/진주시사편찬위원회/1995.
▣ 진주성(晋州城) pp45~47.
--사적(史蹟) 제118호. 1960.10. 7. 지정 면적 176,804㎡ 둘레 1,700m.
--성곽(城廓)은 읍성과 산성의 형태를 절충한 평산성(平山城)으로 석성이며 촉석성
(矗石城)또는 진양성(晋陽城)이라고도 한다.
--언제부터 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제가 진주에 거열성(居列城)을 쌓았다
는 기록이나 신라가 여기에 강주(康州)를 설치하였다는 기록 등을 참고로 하면 삼국
시대 말 또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성이 축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려말
왜구들이 극성하여 이에 대비코자 우왕 5년(1379)에 강주진장(康州鎭將) 배극렴(裴
克廉)이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 때까지 토성이던 촉석성 (矗
石城)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 조선 선조 24년(1591)에 성곽 전반을 중수하였다.
--조선초의 학자요 관료였던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의하면 그가 소년시절
에는 성벽이 무너져 있었으며 그 자리에 토성을 쌓았으나 얼마못가 무너지고 다시 관
민이 합세하여 석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때 성의 둘레가 4,539척 높이가 15척이며
성문은 예화문(禮化門 ; 남쪽), 의정문(義正門 ; 서쪽), 知濟門(지제문 ; 북쪽)의 셋이
있었으며 모든 문위에는 루(樓)가 서 있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못을 파서 누구든 이
못을 지나야만 성에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곳은 영호남을 잇는 교통의 요로로써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벌어졌던
진주성전투는 당시 군량미의 공급원이었던 호남지방을 보호하기 위해 관민이 함께한
필사적인 전투로서 행주대첩. 한산도대첩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로 평가
되고 있다.
--그 뒤 선조 41년(1608) 창원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
營)을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 외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규모는 성벽 높이 25척, 둘레
10,330척으로 성의 외곽에는 호(濠)를 파 남강에 연결시켰다.
--그리고 내외성에는 내영문(內永門), 외수문(外水門), 암문(暗門), 촉석문(矗石門),
내북문(內北門), 촉석루(矗石樓), 함옥헌(含玉軒), 서장대(西將臺), 화약고(火藥庫),
관덕당, 공진당, 포정사(布政司), 군기고(軍器庫), 중군영(中軍營) 등이 있었다.
--진주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79~1984에 걸친 진주성복원정비사
업에 의해서인데 이 때 성내에 위치하고 있던 민가 750여 채가 철거되고 성내 서쪽
에 국립 진주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동쪽에는 임진왜란시에 이곳 진주성전투에서 순
국한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이 건립되
었다. 현재 성내에는 이 외에도 성의 출입구인 촉석문(矗石門), 홍북문(홍北門)과 촉
석루(矗石樓), 의기사(義妓祠), 쌍충각(雙忠閣),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김시민
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호국의 종,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북장대(北將臺),
서장대(西將臺), 포루(包樓), 호국사(護國寺), 창열사(彰烈祠), 3.1운동기념탑비, 그리
고 경충사(景忠祠), 경덕사(景德祠) 등이 있으며 영남포정사와 경충사 사이에는 진주
시 일원에 산재해 있던 각종 유애비(遺愛碑), 불망비(不忘碑), 선정비(善政碑)등을 모
아둔 비석군이 있다.
※ 다음 면에 ‘위치도’가 있으나 추후 보완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목사김후시민전성극적비(故牧使金候時敏全城郤敵碑) pp69~70.
--본성동 499-7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1972. 2.12. 지정.
--높이 2.7m, 폭 0.99m.
--일명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광해군 11년(1619)에 건립되었으며 이암(泥岩) 계통의 석재로 만들어진 것으로
비의 아래쪽 및 뒷면은 박락이 심하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다.
--김시민(金時敏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면오(勉吾)이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한 뒤 파직과 사직 복직 등을 거쳐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의 직을 대리하여 성내의 민심안정과 군사체제를 강화하고 서부경
남 일원에서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으로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으며
취임하자 염초와 총통을 만드는 등 성 방비태세 강화에 주력하는 한편 진해전투에서
적장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워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가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대군이 진주에 집결해 있음을
알고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진주성전투의 시작으로 7일간에 걸친 전투끝에 전
사하였다. 1604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락부
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 전성극적비명(全城郤敵碑銘) pp70~72.
--아하! 급병(急病)에서 양이(攘夷 : 오랑캐를 물리침)를 한 것은 충성심이 격동했
기 때문이요 죽음으로 지키면서 가지 아니한 것은 의로써 결단했기 때문이며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떨쳤기 때문이니 이 세가지를 능히하여 촉촉
(矗矗)하고 열열(烈烈)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빛낸 이는 고목사 김
후(故牧使 金候)이시다. 만력 임진년(壬辰 : 선조 25년 1592년) 4월에 왜놈들이 경
국(傾國)으로 입구(入寇)하여 바로 삼도(三都)를 찌르고 팔로(八路 : 전국)에 충척
(忠斥 : 꽉매움)하여 난여(임금의 수레)가 상로(霜露)에서 지내게 되어 묘사(廟社 :
종묘와 사직)가 풍진(風塵)을 입게 되었다.
--여기에서 때를 따라 열읍이 바람을 만난 듯이 분궤(奔潰)되어 앞질러 숨고 뒤질
것을 두려워 하였는데도 홀로 김후(金候)께서는 본 주의 통판(通判)으로서 몸을 순국
(殉國)에 허락하고 눈물을 뿌리면서 많은 무리들을 깨우쳐서 사천(泗川)과 고성(固
城)의 적을 추격하고 왜장이 진해에 웅거해 있는 자를 사로잡아 행재(行在 : 임금이
임시로 있는 것)로 보냈으며 군사를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가서 다른 적진을 파하였
다. 이리하여 크게 위성(威聲)을 떨침으로서 개령(開寧)과 금산의 적으로 하여금 모
두 듣고 바람처럼 퇴각케 하였으니 충성의 격렬한 때문이 아니겠느냐?
--관군이 출전하여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날에 왜적들이 빈틈을 타서 바로 범한다는
보고를 듣고서는 길을 배로하여 빨리 달려서 즉시 성중으로 들어와서 전단(田單 : 중
국 전국시대의 장수)과 즉묵(卽墨 : 역시 중국의 충신 이름)의 수완을 휘두르고 장순
(張巡 : 송나라 때 장수)이 회양(淮陽 : 중국의 지명)에서 행한 뜻을 가다듬어 살기
를 구차스럽게 취하지 아니하고 죽음을 기필코 성인(成仁)하였으니 의로서 결단코 때
문이 아니겠느냐?
--월운(月暈 : 달무리)처럼 바야흐로 급한 때에 개미같은 원병도 이르지 않았지만
밤낮으로 성을 순시하며 소와 술로 군사를 먹이고 화한 얼굴로 술잔을 높이 들어 피
리를 불고 거문고를 울리어 군사들의 정세를 스스로 지키고 믿게하여 두려움을 없게
하였으며 기틀을 타고 때에 응하여 갑자기 신괴(神怪)한 계책을 내어 몸소 사졸(士
卒)보다 앞장섰으며 피를 마시고 싸움을 독려하여 적의 세력을 크게 좌절케하고 적의
시체가 삼쓰러지듯 하였으며 외로운 보루에서 치우친 군사가 실제로 천명에도 차지
못했는데 능히 수십만의 적을 물리쳤으니 용맹의 떨침때문이 아니겠느냐?
--충이 이와 같고 의가 이와 같으며 용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큰 뇌우와 회명(晦
冥)에 적도가 놀래어 미혹되고 혼을 뺏기어 밤을 타서 도망하였다.
--하늘이 도왔으랴? 성을 에워싼지 6주야에 민심과 천의가 더불어 함께 하였고 구
인(仇人)마저 사랑한 것이다. 하늘이 도우고 사람이 사랑하였는데 또 괴부(怪夫)가
만물을 명령하고 아이들이 장난도 많고 심했던 것인가? 적이 물러가던 날에 마침 적
의 류포(流砲) 때문에 마친 바가 되어 영(營)에서 별처럼 운명을 고했으니 장성(長
城)이 홀연히 무너지는 듯 하였다.
--오호! 슬프고 오호! 슬프도다. 조정에서 김 후의 공을 가상히 여기어 처음에는 목
사로 승진시키어 관질을 더하였고 이어서 총병을 탁배(擢拜)토록 명령하였으며 마침
내는 대사마로서 추증하였으니 름숭(廩崇)한 은전 또한 지극하였다. 주민들이 추모함
을 알지 못하여 서로 더불어 눈물을 떨어뜨리고 돌의 세워 홍공(鴻功)을 알게 하고자
꾀하더니 때마침 남상국(南相國), 이흥(以興)이 여기에 관으로 와서 이어 고로(古老)
에게 순자(詢諮)하고 이르기를 「김목사가 성을 보전한 공은 실로 우리나라에 변란이
있은 이래로 아직 있지 못했던 일이니 민멸되어 전하는 일이 없게하는 것은 불가하
다. 금석에 새기어 영구토록 도모해야 한다」라 하고 곧 백성에게 기록하기를 명하였
다. 이에 백성들이 삼가히 돈수(頓首)하고 나아와서 이르기를 「아하! 우리 후의 충
과 의와 용은 비록 고인에게서 구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후께
서 만약 계셨더라면 계사(癸巳 : 임진년의 다음해)의 적은 반드시 진양을 원수로 삼
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내 세분의 장수가 원학(遠鶴)이 되고 만졸(萬卒)이 사충(沙
虫)으로 화했으니 때이던가? 운명이던가?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구나!」라 하였
다. 후의 휘는 시민이요 자는 면오(勉吾)며 안동인이니 경성에 세거하여 대를 이어
관면(冠冕 : 높은 벼슬)을 살았다. 선묘(宣廟)에서 선무공신(宣務功臣)으로 기록하고
상락군(上洛君)으로 봉하였다.
--명하여 이르노니 “기상은 날카로우면서 굳세었고 바탕은 의연(毅然)하고도 온화
(溫和)했네 의로써 줄기를 삼고 충으로써 뿌리를 삼았네. 성을 온전히 하고 적을 물
리친 것은 그의 공이요, 왕사에서 죽은 것은 그의 의로다. 진산(晋山)이 아아(峨峨)하
고 진수(晋水)가 양양(洋洋)하네.
--한덩이의 돌은 천추로 갈 것이니 산은 높고 물은 깊었도다. 신묘년(辛卯 : 효종 2
년 1651년) 중춘(仲春)에 목사 김이위(金履褘)가 원의(院議)에 의지하여 처음은 간
행(刊行)하였다.
- - - 만력을미부사성여신찬 생원 한몽인서(萬曆乙未浮査成汝信撰 生員 韓夢寅書)
▣ 촉석정충단비명(矗石旌忠壇碑銘) pp73~78.
--(전략)
--처음 적이 대부대로 침구하여 조령을 넘어 이일(李鎰)을 패주시키고 신립(申立)
을 꺾고 곧바로 서울을 함락하였다. 또 군사를 나누어 호남을 넘보았는데 한산도해전
에서 패하게 되자 군사를 다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략하였다. 이 때 진주판관 김시민
(金時敏)공은 적이 진주에 이르기 전에 미리 관내의 군사를 규합하여 사천과 고성의
적을 쳐서 쫓아버리고 진해와 금산을 점거한 적장을 격파하니 위명(威名)이 크게 떨
치었다. 그리고 서둘러 회군하여 진주성 안으로 달려 들어와서 방어용 장비를 크게
수리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진년(1592) 10월에 적이 과연 무더기로 몰려와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안의
군사는 채 천명도 되지 않았다. 적장이 여러 진영의 군사 10여만명을 합하여 6일동
안 포위하여 공격하엿다. 저들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형세가 마치 새알
을 누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김공은 행동에 여유가 있어 때로 젓대도 불고 거문고
도 타니 군중(軍中)이 믿고서 안정되었다. 여러 장수를 독려하니 의기가 분발하고 군
사들이 다 감격해 울었다. 기회를 타서 민첩하게 기묘한 계책을 내어 싸우니 적의 시
체가 무더기로 쌓였다. 이에 적은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는 군사를 거두어 물러 갔다.
바로 이날 김공은 홀연히 유탄에 맞아 성위에서 전사하니 고을 백성과 장사(壯士)들
이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중략)
--그 뒤 역대 왕의 포증(褒贈)이 매우 구비하였다. 창렬사(彰烈祠)를 짓고 또 성 근
처의 산기슭에 정충단(旌忠壇)을 모아 봄 가을로 제사하였다. 증 영의정 김시민공.
증좌찬성 황진공. 증좌찬성 김천일공. 증우참찬 최경회공의 위패는 북쪽에서 남향해
있고, . . . . . . .
--(후략)
- - - - - - - - - - - -숭정후 59년 병인 8월 일 입(立)
- -정헌대부이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성균관사 이민서찬(撰)
-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동지성균관사- - - - - - - - -신익상서(書)
-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홍문관제학지경연사 - - - - - - 김만중전(篆)
▣ 창렬사(彰烈祠) pp88~89.
--남성동 213-1 경상남도 지정문화재자료 제5호 1983. 7.20. 지정.
--성내 동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선조 28년(1595) 정사호(鄭賜湖)가 초창하
였으며 동 40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사당에는 임진왜란 때 계사년(1593) 전투에
서 순국한 장군들을 모셨는데 고종 때 서원 통.폐합시 성내 충민사(忠愍祠)에 모셔져
있던 진주목사 충렬공 김시민 장군(忠烈公 金時敏 將軍)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목조와가이며 동사, 서사, 내삼문, 외삼문,
비각, 경충단, 관리사 등 8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동배비(東配碑), 서배비(西配
碑), 어제사제문비(御製賜祭文碑) 3기, 어제득인명비(御製得印銘碑), 제장군졸지비(諸
將軍卒之碑), 정충단사우중수비(旌忠壇祀宇重修碑) 등 비석이 있다. 그리고 현판은 성
파(星坡) 하동주(河東州)의 글씨이다.
--정사에는 진주목사 김시민 등 7위가 제향되어 있고 동사(東祀)에는 공조좌랑창의
종사관(工曹佐郞倡義從事官) 양산수(梁山壽) 등 13위를 제향하고 있으며, 서사(西祀)
에는 적기의병장(敵愾義兵將) 이잠(李潛) 등 11위를 제향하고 있어 모두 합하면 31
위이다. 그런데 사제비(賜祭碑)에 새겨진 6위와 주몽룡(朱夢龍), 정대보(鄭大輔) 등
8위를 추가하여 모두 39위를 모시고 있다.
--매년 3월과 9월의 초정일에 고을 유림과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려 왔으며
1963년 부터는 진주시장 주관하에 매년 3월 초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창렬사 사당 동사 서사 위패 배치도>중 충무공 김시민 장군 위패는 사당의 첫 번째임.
▣ 김항용 -
▣ 김태서 -
▣ 솔내 영환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 김윤만 -
▣ 1차 진주성 전투전 진주지방의 제 상황. pp559~564.
▣ 1차 진주성 전투의 전개과정. pp564~577.이 19면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
--나 임진왜란 3대첩중 김시민 장군의 이 진주대첩은 너무나 유명하고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합니다.
진주시사(하)/진주시사편찬위원회/1995.
▣ 진주성(晋州城) pp45~47.
--사적(史蹟) 제118호. 1960.10. 7. 지정 면적 176,804㎡ 둘레 1,700m.
--성곽(城廓)은 읍성과 산성의 형태를 절충한 평산성(平山城)으로 석성이며 촉석성
(矗石城)또는 진양성(晋陽城)이라고도 한다.
--언제부터 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제가 진주에 거열성(居列城)을 쌓았다
는 기록이나 신라가 여기에 강주(康州)를 설치하였다는 기록 등을 참고로 하면 삼국
시대 말 또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성이 축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려말
왜구들이 극성하여 이에 대비코자 우왕 5년(1379)에 강주진장(康州鎭將) 배극렴(裴
克廉)이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 때까지 토성이던 촉석성 (矗
石城)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 조선 선조 24년(1591)에 성곽 전반을 중수하였다.
--조선초의 학자요 관료였던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의하면 그가 소년시절
에는 성벽이 무너져 있었으며 그 자리에 토성을 쌓았으나 얼마못가 무너지고 다시 관
민이 합세하여 석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때 성의 둘레가 4,539척 높이가 15척이며
성문은 예화문(禮化門 ; 남쪽), 의정문(義正門 ; 서쪽), 知濟門(지제문 ; 북쪽)의 셋이
있었으며 모든 문위에는 루(樓)가 서 있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못을 파서 누구든 이
못을 지나야만 성에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곳은 영호남을 잇는 교통의 요로로써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벌어졌던
진주성전투는 당시 군량미의 공급원이었던 호남지방을 보호하기 위해 관민이 함께한
필사적인 전투로서 행주대첩. 한산도대첩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로 평가
되고 있다.
--그 뒤 선조 41년(1608) 창원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
營)을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 외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규모는 성벽 높이 25척, 둘레
10,330척으로 성의 외곽에는 호(濠)를 파 남강에 연결시켰다.
--그리고 내외성에는 내영문(內永門), 외수문(外水門), 암문(暗門), 촉석문(矗石門),
내북문(內北門), 촉석루(矗石樓), 함옥헌(含玉軒), 서장대(西將臺), 화약고(火藥庫),
관덕당, 공진당, 포정사(布政司), 군기고(軍器庫), 중군영(中軍營) 등이 있었다.
--진주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79~1984에 걸친 진주성복원정비사
업에 의해서인데 이 때 성내에 위치하고 있던 민가 750여 채가 철거되고 성내 서쪽
에 국립 진주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동쪽에는 임진왜란시에 이곳 진주성전투에서 순
국한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이 건립되
었다. 현재 성내에는 이 외에도 성의 출입구인 촉석문(矗石門), 홍북문(홍北門)과 촉
석루(矗石樓), 의기사(義妓祠), 쌍충각(雙忠閣),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김시민
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호국의 종,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북장대(北將臺),
서장대(西將臺), 포루(包樓), 호국사(護國寺), 창열사(彰烈祠), 3.1운동기념탑비, 그리
고 경충사(景忠祠), 경덕사(景德祠) 등이 있으며 영남포정사와 경충사 사이에는 진주
시 일원에 산재해 있던 각종 유애비(遺愛碑), 불망비(不忘碑), 선정비(善政碑)등을 모
아둔 비석군이 있다.
※ 다음 면에 ‘위치도’가 있으나 추후 보완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목사김후시민전성극적비(故牧使金候時敏全城郤敵碑) pp69~70.
--본성동 499-7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1972. 2.12. 지정.
--높이 2.7m, 폭 0.99m.
--일명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광해군 11년(1619)에 건립되었으며 이암(泥岩) 계통의 석재로 만들어진 것으로
비의 아래쪽 및 뒷면은 박락이 심하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다.
--김시민(金時敏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면오(勉吾)이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한 뒤 파직과 사직 복직 등을 거쳐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의 직을 대리하여 성내의 민심안정과 군사체제를 강화하고 서부경
남 일원에서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으로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으며
취임하자 염초와 총통을 만드는 등 성 방비태세 강화에 주력하는 한편 진해전투에서
적장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워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가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대군이 진주에 집결해 있음을
알고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진주성전투의 시작으로 7일간에 걸친 전투끝에 전
사하였다. 1604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락부
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 전성극적비명(全城郤敵碑銘) pp70~72.
--아하! 급병(急病)에서 양이(攘夷 : 오랑캐를 물리침)를 한 것은 충성심이 격동했
기 때문이요 죽음으로 지키면서 가지 아니한 것은 의로써 결단했기 때문이며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떨쳤기 때문이니 이 세가지를 능히하여 촉촉
(矗矗)하고 열열(烈烈)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빛낸 이는 고목사 김
후(故牧使 金候)이시다. 만력 임진년(壬辰 : 선조 25년 1592년) 4월에 왜놈들이 경
국(傾國)으로 입구(入寇)하여 바로 삼도(三都)를 찌르고 팔로(八路 : 전국)에 충척
(忠斥 : 꽉매움)하여 난여(임금의 수레)가 상로(霜露)에서 지내게 되어 묘사(廟社 :
종묘와 사직)가 풍진(風塵)을 입게 되었다.
--여기에서 때를 따라 열읍이 바람을 만난 듯이 분궤(奔潰)되어 앞질러 숨고 뒤질
것을 두려워 하였는데도 홀로 김후(金候)께서는 본 주의 통판(通判)으로서 몸을 순국
(殉國)에 허락하고 눈물을 뿌리면서 많은 무리들을 깨우쳐서 사천(泗川)과 고성(固
城)의 적을 추격하고 왜장이 진해에 웅거해 있는 자를 사로잡아 행재(行在 : 임금이
임시로 있는 것)로 보냈으며 군사를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가서 다른 적진을 파하였
다. 이리하여 크게 위성(威聲)을 떨침으로서 개령(開寧)과 금산의 적으로 하여금 모
두 듣고 바람처럼 퇴각케 하였으니 충성의 격렬한 때문이 아니겠느냐?
--관군이 출전하여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날에 왜적들이 빈틈을 타서 바로 범한다는
보고를 듣고서는 길을 배로하여 빨리 달려서 즉시 성중으로 들어와서 전단(田單 : 중
국 전국시대의 장수)과 즉묵(卽墨 : 역시 중국의 충신 이름)의 수완을 휘두르고 장순
(張巡 : 송나라 때 장수)이 회양(淮陽 : 중국의 지명)에서 행한 뜻을 가다듬어 살기
를 구차스럽게 취하지 아니하고 죽음을 기필코 성인(成仁)하였으니 의로서 결단코 때
문이 아니겠느냐?
--월운(月暈 : 달무리)처럼 바야흐로 급한 때에 개미같은 원병도 이르지 않았지만
밤낮으로 성을 순시하며 소와 술로 군사를 먹이고 화한 얼굴로 술잔을 높이 들어 피
리를 불고 거문고를 울리어 군사들의 정세를 스스로 지키고 믿게하여 두려움을 없게
하였으며 기틀을 타고 때에 응하여 갑자기 신괴(神怪)한 계책을 내어 몸소 사졸(士
卒)보다 앞장섰으며 피를 마시고 싸움을 독려하여 적의 세력을 크게 좌절케하고 적의
시체가 삼쓰러지듯 하였으며 외로운 보루에서 치우친 군사가 실제로 천명에도 차지
못했는데 능히 수십만의 적을 물리쳤으니 용맹의 떨침때문이 아니겠느냐?
--충이 이와 같고 의가 이와 같으며 용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큰 뇌우와 회명(晦
冥)에 적도가 놀래어 미혹되고 혼을 뺏기어 밤을 타서 도망하였다.
--하늘이 도왔으랴? 성을 에워싼지 6주야에 민심과 천의가 더불어 함께 하였고 구
인(仇人)마저 사랑한 것이다. 하늘이 도우고 사람이 사랑하였는데 또 괴부(怪夫)가
만물을 명령하고 아이들이 장난도 많고 심했던 것인가? 적이 물러가던 날에 마침 적
의 류포(流砲) 때문에 마친 바가 되어 영(營)에서 별처럼 운명을 고했으니 장성(長
城)이 홀연히 무너지는 듯 하였다.
--오호! 슬프고 오호! 슬프도다. 조정에서 김 후의 공을 가상히 여기어 처음에는 목
사로 승진시키어 관질을 더하였고 이어서 총병을 탁배(擢拜)토록 명령하였으며 마침
내는 대사마로서 추증하였으니 름숭(廩崇)한 은전 또한 지극하였다. 주민들이 추모함
을 알지 못하여 서로 더불어 눈물을 떨어뜨리고 돌의 세워 홍공(鴻功)을 알게 하고자
꾀하더니 때마침 남상국(南相國), 이흥(以興)이 여기에 관으로 와서 이어 고로(古老)
에게 순자(詢諮)하고 이르기를 「김목사가 성을 보전한 공은 실로 우리나라에 변란이
있은 이래로 아직 있지 못했던 일이니 민멸되어 전하는 일이 없게하는 것은 불가하
다. 금석에 새기어 영구토록 도모해야 한다」라 하고 곧 백성에게 기록하기를 명하였
다. 이에 백성들이 삼가히 돈수(頓首)하고 나아와서 이르기를 「아하! 우리 후의 충
과 의와 용은 비록 고인에게서 구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후께
서 만약 계셨더라면 계사(癸巳 : 임진년의 다음해)의 적은 반드시 진양을 원수로 삼
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내 세분의 장수가 원학(遠鶴)이 되고 만졸(萬卒)이 사충(沙
虫)으로 화했으니 때이던가? 운명이던가?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구나!」라 하였
다. 후의 휘는 시민이요 자는 면오(勉吾)며 안동인이니 경성에 세거하여 대를 이어
관면(冠冕 : 높은 벼슬)을 살았다. 선묘(宣廟)에서 선무공신(宣務功臣)으로 기록하고
상락군(上洛君)으로 봉하였다.
--명하여 이르노니 “기상은 날카로우면서 굳세었고 바탕은 의연(毅然)하고도 온화
(溫和)했네 의로써 줄기를 삼고 충으로써 뿌리를 삼았네. 성을 온전히 하고 적을 물
리친 것은 그의 공이요, 왕사에서 죽은 것은 그의 의로다. 진산(晋山)이 아아(峨峨)하
고 진수(晋水)가 양양(洋洋)하네.
--한덩이의 돌은 천추로 갈 것이니 산은 높고 물은 깊었도다. 신묘년(辛卯 : 효종 2
년 1651년) 중춘(仲春)에 목사 김이위(金履褘)가 원의(院議)에 의지하여 처음은 간
행(刊行)하였다.
- - - 만력을미부사성여신찬 생원 한몽인서(萬曆乙未浮査成汝信撰 生員 韓夢寅書)
▣ 촉석정충단비명(矗石旌忠壇碑銘) pp73~78.
--(전략)
--처음 적이 대부대로 침구하여 조령을 넘어 이일(李鎰)을 패주시키고 신립(申立)
을 꺾고 곧바로 서울을 함락하였다. 또 군사를 나누어 호남을 넘보았는데 한산도해전
에서 패하게 되자 군사를 다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략하였다. 이 때 진주판관 김시민
(金時敏)공은 적이 진주에 이르기 전에 미리 관내의 군사를 규합하여 사천과 고성의
적을 쳐서 쫓아버리고 진해와 금산을 점거한 적장을 격파하니 위명(威名)이 크게 떨
치었다. 그리고 서둘러 회군하여 진주성 안으로 달려 들어와서 방어용 장비를 크게
수리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진년(1592) 10월에 적이 과연 무더기로 몰려와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안의
군사는 채 천명도 되지 않았다. 적장이 여러 진영의 군사 10여만명을 합하여 6일동
안 포위하여 공격하엿다. 저들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형세가 마치 새알
을 누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김공은 행동에 여유가 있어 때로 젓대도 불고 거문고
도 타니 군중(軍中)이 믿고서 안정되었다. 여러 장수를 독려하니 의기가 분발하고 군
사들이 다 감격해 울었다. 기회를 타서 민첩하게 기묘한 계책을 내어 싸우니 적의 시
체가 무더기로 쌓였다. 이에 적은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는 군사를 거두어 물러 갔다.
바로 이날 김공은 홀연히 유탄에 맞아 성위에서 전사하니 고을 백성과 장사(壯士)들
이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중략)
--그 뒤 역대 왕의 포증(褒贈)이 매우 구비하였다. 창렬사(彰烈祠)를 짓고 또 성 근
처의 산기슭에 정충단(旌忠壇)을 모아 봄 가을로 제사하였다. 증 영의정 김시민공.
증좌찬성 황진공. 증좌찬성 김천일공. 증우참찬 최경회공의 위패는 북쪽에서 남향해
있고, . . . . . . .
--(후략)
- - - - - - - - - - - -숭정후 59년 병인 8월 일 입(立)
- -정헌대부이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성균관사 이민서찬(撰)
-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동지성균관사- - - - - - - - -신익상서(書)
-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홍문관제학지경연사 - - - - - - 김만중전(篆)
▣ 창렬사(彰烈祠) pp88~89.
--남성동 213-1 경상남도 지정문화재자료 제5호 1983. 7.20. 지정.
--성내 동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선조 28년(1595) 정사호(鄭賜湖)가 초창하
였으며 동 40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사당에는 임진왜란 때 계사년(1593) 전투에
서 순국한 장군들을 모셨는데 고종 때 서원 통.폐합시 성내 충민사(忠愍祠)에 모셔져
있던 진주목사 충렬공 김시민 장군(忠烈公 金時敏 將軍)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목조와가이며 동사, 서사, 내삼문, 외삼문,
비각, 경충단, 관리사 등 8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동배비(東配碑), 서배비(西配
碑), 어제사제문비(御製賜祭文碑) 3기, 어제득인명비(御製得印銘碑), 제장군졸지비(諸
將軍卒之碑), 정충단사우중수비(旌忠壇祀宇重修碑) 등 비석이 있다. 그리고 현판은 성
파(星坡) 하동주(河東州)의 글씨이다.
--정사에는 진주목사 김시민 등 7위가 제향되어 있고 동사(東祀)에는 공조좌랑창의
종사관(工曹佐郞倡義從事官) 양산수(梁山壽) 등 13위를 제향하고 있으며, 서사(西祀)
에는 적기의병장(敵愾義兵將) 이잠(李潛) 등 11위를 제향하고 있어 모두 합하면 31
위이다. 그런데 사제비(賜祭碑)에 새겨진 6위와 주몽룡(朱夢龍), 정대보(鄭大輔) 등
8위를 추가하여 모두 39위를 모시고 있다.
--매년 3월과 9월의 초정일에 고을 유림과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려 왔으며
1963년 부터는 진주시장 주관하에 매년 3월 초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창렬사 사당 동사 서사 위패 배치도>중 충무공 김시민 장군 위패는 사당의 첫 번째임.
▣ 김항용 -
▣ 김태서 -
▣ 솔내 영환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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