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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여름캠프 09 (의성 점곡면 사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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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22 02:34 조회1,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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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ㅐㅇ52787.28일부터 7.30일까지 우리 문중의 고향 安東·의성지역 姓地순례 계획으로 있는 제1회 여름캠프 답사자료를 답사일정별로 연재하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연재하면서 여러 회원님들의 의견을 보충하면서 자료를 내실화할 수 있고, 답사자료를 미리 공부해 놓으면 답사일정도 더욱 알차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부득이 이번 답사에 참가하지 못하시는 회원님과 종친님들께서도 간접적인 답사의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가 마무리되는 데로 편집해서 복사·제본하여 답사자료로 제공할까 합니다. 많은 의견과 자료를 제공해 주시면 더욱 알찬 답사자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제1회여름캠프 09 (의성 점곡면 사촌리)





☞ 사진자료

안동김씨 사촌입향 육백년 추원비 (김주회 촬영)







<의성군지, 1998>

● 사촌 3리



가. 마을의 유래와 개황.

---신라시대의 나정승(羅政丞)이 이 마을에 살았다는 전설과 자하산(紫霞山) 중턱에 나정승의 묘라고 전해지는 고총(古 )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가 1,000년이 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후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의 후예 감목공 ★김자첨(監牧公 金子瞻)이 안동 회곡(檜谷)에서 이주하여 1392년에 중국의 사진리(沙眞里)를 본 따서 사촌(沙村)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

1914년 전까지 서변(西邊) 1, 2리를 합해 하나의 마을로 통칭되다가 행정구역 개편때 사촌 3리로 불리우게 됐다. 낙동강 지류 미천(眉川) 붘녁에 사질의 기름진 땅이 동서로 길게 놓였고, 그 뒤를 수려한 봉우리들이 마을을 지키며 감싸듯 홀연히 솟아 있다.

이 마을은 소재지 권에 속하면서 사촌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여기가 원사촌이고 미천 건너 산재 마을이 있다. 합해서 96세대이며 289명이 살고 있다. 일부 공직자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 외에 대부분이 농업을 영위하고 있다. 주곡 외에 고추, 담배, 사과 등이 수입의 대종을 이룬다.

점곡초등학교가 이 마을 서편에 있고 또 그 서편에 길게 가로 놓인 서림(西林)이 방풍겸 경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성씨별 세대수는 안동김씨 75호, 풍산류씨와 기타 등이다.



나. 풍수설에 의한 영남의 명기.

---자하산(紫霞山)과 기령산(奇靈山)이 배산이고 금성산(金城山)이 안산이다. 십리 장벽 건마산은 서쪽에서 역으로 응해 있고 동쪽의 병봉(丙峯) 또한 이 곳에 응해 있다. 사방의 산과 물이 이곳으로 쏠렸는데 산수가 밝고 맑아 장수(長壽)하는 사람이 많다.

동서 수십리가 트인 가운데를 태고연한 서림이 가로 놓여 경관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자하산을 등지고 들어선 대촌의 고가(古家)들을 보면 전통있는 유향(儒鄕)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의성군지, 1998>

● 라.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마을.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용 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과에 13명

소과에 28명이 합격하여 각 시대에 활약하거나 은거 자수했다. 조선조 후기 퇴계

학의 정맥이라 일컬어지는 천사 ★김종덕은 영남의 학통을 이었고, 그 문하에는 많

은 유생들이 원근에서 모여들어 수학한 바 있다.







<의성군지, 1998, 사촌 입향 600년>

●안동김씨 사촌입향 육백년 추원비(安東金氏 沙村入鄕 六百年 追遠碑)

소재지 : 점곡면 사촌리



---태백(太白)은 동쪽을 휘감았고 소백(小白)은 서북을 둘러섰다. 황지에서 발원한 낙수(洛水) 천리의 연변에는 옥야가 전개되고 鴻儒碩德(홍유석덕)이 연달아 배출되니 세인들은 영남을 가리켜 인재의 부고(府庫)라 하였다.

여기 소주(韶州)의 북촌 사진리(沙眞里)는 명산대하의 지맥지류가 알맞게 배분되어 산광수색은 명미하고 기름진 전토가 수리에 연하여 백세전손의 훌륭한 기지로 알려진 곳이다.



---차(嗟)흡다. 우리 감목선조(監牧先祖) 휘(諱) ★자첨(子瞻)께서는 분파조이신 도평의공(都評議公) 휘(諱) ★구정(九鼎)의 아들이시며 고려조의 훈업상신(勳業相臣)인 충렬공(忠烈公) 대조(大祖)의 5세손으로

천성이 호매하고 고지원식의 탁견이 있어 안동회곡(安東檜谷)에서 세거하다가 조선조가 개국됨에 시류에 알맞은 유신의 뜻으로 청전세업을 버리고 사촌(沙村)에 조기하니 곧 조선의 개국년대였다.

조정에서는 전조명신의 후손 예우로 감목관(監牧官)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도광양덕(韜光養德)의 처세와 영세를 내다보는 경륜으로 서림을 조성한 선조는 창업보다 어려운 수성의 요체를 전지자손(傳之子孫)하여 오늘의 우리를 이땅에 살게하니 모두가 석과불식의 업보일 것이다.



---맏아드님 휘(諱) ★효온(孝溫)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사직을 역임하였으나 세조의 찬위를 보고 은거불사하고 문과동방인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과 심교가 깊었다.



---둘째 휘 ★효항(孝恒)은 사정의 벼슬을 하였으나 문헌무징(文獻無徵)으로 상고치 못하고 청송화현(靑松花峴)으로 개기정거하여 청명직절(淸名直節)로 수분하고 현재에 이른다.

효온의 아드님 휘 ★극해(克諧)는 생원과 문과에 등제하여 북평사(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냈으며 청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드님 휘 ★광수(光粹)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던 중 사우간에 중망이 높았으나 연산조의 사화로 시정의 불리함을 보고 낙향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존현양사(尊賢養士)에 힘쓴 일사로서 세칭 송은선생(松隱先生)이라 하였다.



---사후에는 사림의 공의로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그 청고한 인격을 독행군자요 소안백발의 지상선인이라고 외손 서애선생(西厓先生) 류성용(柳成龍)은 기록하였다.



---둘째 휘 ★광복(光復)은 충순위를 역임하고 효우로 처신하여 백씨(伯氏) 송은(松隱)선생과 함께 연방고(聯芳稿)를 남겼다. 그 후 아들 ★언걸(彦傑)과 같이 김해 덕산리에서 전손 세거하며 문물이 상승하고 일향의 문족이 되었다.

송은선생의 아들 휘 ★당( )은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이시고 그 아드님 ★세우(世佑)는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이시다. 인의공께서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휘 ★사원(士元) ★사형(士亨) ★사정(士貞)으로 모두가 일방의 망사가 되었다.



---★사원의 호는 만취당(晩翠堂)으로 퇴도고제(退陶高弟)이며 도산(陶山)의 월란암(月瀾菴)에서 위기의 학문에 전심하여 선생의 심허를 받았으며 임란을 당하여는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하여 정제장(整齊將)이 되고 후덕심인으로 진활류민하니 ★김씨의창(金氏義倉)이라 별칭하였다. 사후에는 후산사에 제향하였으며

★사형은 호를 독수헌(獨秀軒)이라 했고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유일재(惟一齋)선생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동생 ★사정과 함께 화왕산(火旺山)의 곽망우당(郭忘憂堂) 의진(義陣)에서 활약하였고 아들 ★한(澣)과 같이 진보로 전거하였다.

★사정은 호를 후송재(後松齋)라 하였고 사숙계문(私淑溪門)으로 수학하였으며 곽망우당(郭忘憂堂) 의진(義陣)에서 적신성서의 피끊는 시를 남겨 세상에 알려졌다. 사후에는 지평에 추증되었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하였다.

그 후에도 사마문무와 문집학설을 남긴 후손이 번다하나 다 기록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거슬러 생각하면 입향후 이십대 열갑자(十甲子)에 이른 오늘날 세수인경의 범절을 지키며 대과 십삼원 소과 이십팔원이 배출되고 문한도 빈빈하며 유맥(濡脈)이 상승하여 교남벌족으로 원근에 알려지니 이찌 비양( 讓)의 덕을 닦은 현조의 여음이 아니리요?



---바야흐로 세도의 변천은 금석을 달리하여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정신문화는 물질문화로 집성대촌은 이산전거로 옮겨지는 것은 시대의 순리라, 다만 이 시기를 당하여 내세의 후진에게 근원을 찾게하고 숭조(崇祖)의 정신을 함양하여 처심적려의 생각을 기르고자 선조의 체취가 서린 유서깊은 서림에 추원비(追遠碑)를 세워 이 곳을 찾는 후손에게 고향의 상념을 심어주고 우리의 내력을 영세에 전하고자 후손 ★사수(沙秀)씨 등의 주선으로 문원의 성력을 모아 비석을 세우면서 삼가 명하노니



매봉산에 내린 용(龍)이 서림(西林)에와 머무르고

유심(幽深)하다 沂水濫觴(기수람상) 이 강산에 응했도다.

영철(潁哲)할사 선조님이 조기길지(肇基吉地) 하셨으며

비양(卑讓)으로 덕을 삼고 성경(誠敬)으로 수분(守分)했네.

명창정궤(明窓淨 ) 밝은 뜻은 지고렴사(志高廉士) 길렀으며

청화(淸和)로운 몸가짐은 유방백세(遺芳百世) 이아닌가

함양훈도(涵養薰陶) 깊은 훈회(訓誨) 시례가성(詩禮家聲) 아름답고

번연(繁衍)할사 운잉(雲仍)이여 천세상전(千世相傳) 하옵고져



- - - - - - - - - - - - - - - - - - - 西紀 1992年 壬申 梅雨節

- - - - - - - - - - - - - - - - - - - 後 孫 ★昌 會 謹撰

- - - - - - - - - - - - - - - - - - - 義城後人 金九稷 謹書







<의성유적지, 1996, 의성문화원>

● 모선재(慕先齋)

소 재 지 : 의성군 의성읍 업2리



---안동김씨의 입향조 도평의공 ★김구정(都評議公 金九鼎) 감목공 ★김자첨(監牧公 金子瞻) 북평사공 ★김극해(北評事公 金克諧)의 묘재로서 1700년 경에 창건하고, 1982년에 그 후손이 중건하였다.











▣ 김윤만 -

▣ 김정중 -

▣ 김항용 -

▣ 솔내 영환 -

▣ 김재익 - 사촌 입향 년대는 다소 차이가 남

▣ 태영/문 - 대부님, 감사합니다. 남다른 열정과 집념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그 동안 읽지 못한 귀한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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