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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여름캠프 11 (송은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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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25 07:10 조회2,0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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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여름캠프 11 (송은 김광수)



☞ 사진자료

사촌리 향나무 (문화재청 홈)

영귀정 (김주회 촬영)

장대서원 (안동김씨 홈)





1. 의성 사촌리 향나무(義城沙村里香木)



<문화유적총람>

●의성 사촌리 향나무(義城沙村里香木)

【관리번호】769-830-400-040

【지정사항】기념물 제107호

【유적종류】기타유적

【소 재 지】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5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기타(의성 ★김씨 사촌파 문중)

【유적내용】

수령이 수백년된 향나무로 생육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민가의 담장 곁에 있어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참고문헌】

【비 고】1995. 6. 30. 지정.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기념물 107호

●의성사촌리향나무 (義城沙村里향나무)

분 류 식물

수 량 512㎡1주

지정일 1995.06.30

소재지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5

소유자 안동★김씨사촌파문중

관리자 안동★김씨사촌파문중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도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의성 사촌리 향나무의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현재 생육상태나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었던 송은 ★김광수가 심은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청빈하게 지냈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의성 사촌리 향나무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지내온 나무로, 현재는 안동 ★김씨 사촌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명 의성사촌리향나무(義城沙村里향나무)

이 향나무는 송은 ★김광수(松恩 金光粹)가 약 500여년 전에 심은 것으로 전해 온다.







2. 영귀정(詠歸亭)



시군지순례 14-5.(의성군 : 義城遺蹟誌)

(의성유적지/의성문화원/1996년)

●영귀정(詠歸亭) pp278 (사진있음)

소 재 지 :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약 500년전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가 건립한 정자이다. 그는 젊어서 진사에 오르고 후에 관직과 명리를 멀리한 가운데 향리에 은거 수도하며 96세 긴 생애를 유유자적(悠悠自適) 했다.

이 정자는 사촌(沙村) 앞을 굽이쳐 흐르는 미천(眉川) 언저리 높은 언덕 위에 솟아 물과 마을과 연산(連山)을 바라보듯 서 있어 한폭의 그림처럼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유적총람>

●영귀정(詠歸亭)

【관리번호】769-830-261-034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234호

【유적종류】정·각(정자)

【소 재 지】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319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기타(안동 ★김씨문중)

【유적내용】

영귀정은 조선시대의 건물로서 미천강변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1500년경 안동 ★김씨 선조가 연산군때 관직을 버리고 은둔, 강학하기 위하여 이곳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138. ; 의성문화원, 1994, <<의성지집록>>, 795.

【비 고】1991. 3. 25. 지정.







<문화재청 홈>

종 목 문화재자료 234호

●영귀정 (詠歸亭)

분 류 누(정).각

수 량 1동

지정일 1991.03.25

소재지 경북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319

소유자 안동★김씨문중

관리자 안동★김씨문중



영귀정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외할아버지인 송은 ★김광수(1468∼1563) 선생이 연산군 때 관직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년경으로 추정한다.

이 정자는 미천강변의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명 영귀정(詠歸亭)

영귀정은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외조부인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가 학문에 전심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3. 장대서원(藏待書院)



<문화유적총람>

●장대서원(藏待書院)

【관리번호】769-910-240-107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서원(서원 및 부속건물)

【소 재 지】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기타(장대서원)

【유적내용】

★신지제(申之悌)는 명종 17년(1562)에 금뢰면 상리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으로 ★김성일의 문인으로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안현감을 지냈다.

광해군의 혼정으로 공조정랑의 벼슬 제수를 마다하고 낙향하여 이 서원을 열어 오로지 인재양성에만 힘썼는데, 1663년 오봉이 후진을 기르기 위해 세웠던 강당에 그를 경모하기 위하여 경현사(景顯祠)가 창건되다. 후에 장대서원으로 개칭되면서 본향 출신 송은 ★김광수, ★매당 신원록, ★오봉 신지제, ★경정 이민성이 제향되었다.

장대서원은 선조때 의성 현령이던 ★여현 장현광(張顯光)이 주역의 문귀에서 장기어신(藏器於身)하고 대시이동(待時而動)이란 현판을 써서 걸었으며 글귀의 첫자를 따서 부른데서 연유하였고 덕기를 몸에 감추어 때를 기다려 움직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의성문화원, 1996, <<의성의 유훈>>, 345.

【비 고】







시군지순례 14-5.(의성군 : 義城遺蹟誌)

(의성유적지/의성문화원/1996년)

●장대서원(藏待書院) pp162 (사진있음)

○ 위 치 :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 창건년대 : 1672년



---이 서원은 1610년(광해군 2년) 오봉 신지제(梧峰 申之悌)가 후진을 기르기 위해 세워 강서<卜築講書>하던 강당(講堂)이었다.

여기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명명하기를 장대(藏待)란 취장수이 대지의야(取藏修以 待之義也)라 하여 그 첫 자를 붙여 부른데서 연유되었고 동네 이름<장대리(藏待里)>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일설에는 장기어신(藏器於身)하고 대시이동(待時而動)의 문구를 인용하였다고도 전한다.



---1624년 오봉이 타계하고 47년만인 1672년(현종 13년) 10월에 사림에서 그를 경모(敬慕)하고 숭봉(崇奉)하기 위해 건묘(建廟)한 것이 경현사(景賢祠)다.



---방백(方伯) 이관징(李觀徵)은 묘액(廟額)을 보내왔고 부제학 이당규(李堂揆)는 상량문(上樑文)을 엮어 걸었다.



---다음해 <동왕 14년> 12월에 경정 이민성(敬亭 李民宬)이 병향(幷享)되었고,



---1702년(숙종 28년) 4월에 사(祠)가 서원(書院)이 되면서 이산서원(尼山書院)에 제향하려 했던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와 회당 신원록(悔堂 申元祿)을 1709년<동왕 35년>에 합향하여 오다가 대원군 당시 훼철되었다.



---강당이 4간, 서원을 수호하는 주사(廚舍) 1동, 향사를 모시는 상석(床石) 4좌(坐)가 있었으나 1988년 공사비 2천 5백만원으로 중건(重建) 옛 서원의 모습을 갖추는데 송은, 회당, 오봉, 경정 후예 네 문중이 노력, 군비 보조로 묘우(廟宇)를 완성하였다. 매년 2월 하정(下丁)에 행사(行祀)한다.







시군지순례 14-4.(의성군 : 사촌의 자랑거리)

●장대서원 중건기(藏待書院 重建記) pp475∼476



---문묘(文廟)를 세워 선성(先聖)을 향사하고 향교(鄕校)를 세워 유생을 가르침은 수령방백(守令方伯)의 소임이요, 사당(祠堂)을 세워 선현을 받들고 서숙(書塾)을 차려 제자를 양성함은 향중 사림의 일이다.



---우리 고을 소주(韶州)는 명산대하의 자락을 벗어난 영남의 심장이요, 추노(鄒魯)의 원향인 안동과 더불어 안의(安義)로 소칭되는 명향이며 현남(縣南)의 오동산서록(梧棟山西麓)에 향양(向陽)한 명기는 향중 사선생(四先生)을 제향한 장대서원(藏待書院)이 있는 곳이다.



---이 서원은 1610년 광해 무술에 오봉신지제(梧峯申之悌) 선생이 강서하고자 복축(卜築)한 횡사( 舍)로서 오봉공 몰(歿)후 37년인 1662년 현종 임인에 경현사(景賢祠)를 세워 선생을 향사하고 익년(翌年)에 경정이민성(敬亭李民宬) 선생을 병향했다.

1702년 숙종 임오에 사(祠)를 서원(書院)으로 추승하고 일향선현의 불이이사(不二異祠)라는 사림의 취의(聚議)로 교전의 이산서원(尼山書院)에 예향하던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선생과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 선생을 함께 받들면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청일(淸逸)로 후학을 계도한 송은(松隱) 선생, 효제천실(孝悌踐實)로 조가(朝家) 작설(綽楔)의 영을 얻은 회당(悔堂) 선생, 석덕진순(碩德眞純)으로 향사를 교회(敎誨)한 오봉(梧峯) 선생, 청고한 문장이 백세의 사종(師宗)으로 일컬어진 경정(敬亭) 선생, 이는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선생이 상향 축문에서 칭송한 글이다.

이후 향사림에 의해 주생(酒牲)의 예를 올리다가 1868년 고종 무진 8월에 조령(朝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 사현예손(四賢裔孫)의 주선으로 소략(疏 )한 강당과 초옥의 주사(廚舍) 일동(一棟)이 이루어지고 네모진 원장(垣墻)안에 상석(床石)으로 설단(設壇)하여 행사를 실시함에 사림의 개연 추모지정은 금할 길 없었다.

생각하면 수류운공(水流雲空)의 역년이 재갑을 맞이한 무진년의 어느날 당회를 열고 묘우중건의 뜻을 모아 회당공(悔堂公)의 후손 달섭(達燮)씨가 임사를 맡고 오봉공(梧峯公)의 예손 태근(泰根)씨가 현재(縣宰)로 재임시 구재(鳩財)와 보조로 사묘(祠廟)가 신성되었다.



---수년이 지난 병자매하(丙子梅夏)의 모일(某日) 회당공(悔堂公)의 초예(肖裔) 진돌(鎭乭)씨의 간사로 다시 당회를 열어 강당중건을 취의로 돈정(敦定)하여 기자(基資)를 분담하고 여액 3천4백만원은 정해걸(丁海杰) 군수의 도움을 받았다.

아! 감회로워라 잡목과 돌담이 뒤엉킨 옛자리를 말끔히 정리하고 치석을 올려 기초를 다졌으며, 앞 뒤 원주(圓柱)의 사간반퇴(四間反退)의 부연(附椽)을 달아 추녀끝이 하늘을 받치고 날아갈 듯 선명하다.

동서양실(東西兩室)은 온돌이요 가운데는 대청이며, 전면반퇴는 마루로 연했다. 자오(子午)의 향배가 밝으며 동온하정의 이수에 적합하다. 당(堂)의 공준을 앞둔 어느날 문자로서 사실을 기술하라 향부로(鄕父老) 명이 창회(昌會)에게 전해 졌다



---천식(淺識)이라 외람된 줄 알면서도 관계문헌을 상고하여 본말을 밝히고 이풍세변한 뒷날의 자료에 공하고자 삼가 기문을 쓴다.



---------------------------1996년 병자(丙子) 중양절(重陽節)

---------------------후학(後學) 안동(安東) ★김창회(金昌會) 근기(謹記)









4. 이산서원(尼山書院)



시군지순례 14-5.(의성군 : 義城遺蹟誌)

(의성유적지/의성문화원/1996년)

●이산서원(尼山書院) pp160

○ 위 치 :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 창건년대 : 1670년



---의성읍 원흥 뒷산 상수도 배수지 옆에 이산서원(尼山書院)이 서게 되었다. 1669년(현종 10년)에 창건될 때 읍재(邑宰)가 성묘(聖廟)를 개수하고 그 구재(舊材)와 출력(出力)의 도움을 받아 다음해<1670년>에 묘우(廟宇)가 이루어 졌으며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와 회당 신원록(悔堂 申元祿)을 봉향(奉享)하려든 즈음 읍재였던 이당규(李堂揆)가 일향선현(一鄕先賢)을 불의이사(不宜異祠)라 하여 사림의 합의로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오봉 신지제(梧峰 申之悌), 경정 이민성(敬亭 李民宬) 등 4현을 동시에 합향(合享)하므로서 이산서원(尼山書院)은 자연적으로 폐쇄되었던 것이다.









5. 경일재(景逸齋)



시군지순례 14-5.(의성군 : 義城遺蹟誌)

(의성유적지/의성문화원/1996년)

●경일재(景逸齋) pp329 (사진있음)

소 재 지 : 의성군 점곡면 명고2리



---연산조의 일사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의 묘재로서 그 후손들이 1650년 경에 창건하여 여러번 중수하고 1983년에 개축하였으며, 현재는 시향(時享) 때 이용된다.









6. 김광수(金光粹 1468∼1563)



시군지순례 14-1.(의성군 : 사촌3리)

의성군지(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

●★김광수(金光粹 1468∼1563)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중흥공신이며 출장입상의 경륜을 가진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은 그의 9대조이며, 고려말에 도평의(都評議)를 지낸 바 있는 아버님 ★김구정(金九鼎)을 모시고 사촌으로 입향한 감목공 ★김자첨(監牧公 金子瞻)은 그의 증조부이다.

조부 효온(孝溫)은 1412년에 태어나 생원에 합격하고 박팽년 최항 등과 문과 동방으로 친교가 있었으며, 정통(正統) 경신년(庚申年)에 태어나서 기묘년에 생원이 되고, 신묘에 문과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와 지례 현감(知禮 縣監)을 역임하면서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극해(克諧)는 그의 아버님이다.



외손자 서애 류성용은 임난 7년 풍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더욱 유명하다. 일찍이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연산의 정란을 예견하고 대과와 관직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기수 남안에 영귀정(詠歸亭)을 지어 시를 읊으며 은둔 강학하니 당시의 선비들이 송은거사(松隱居士)라 추앙하며 모여 들었다.



거실 서편에 우뚝 서 만년송(萬年松) 아래 청빈을 벗삼아 살다가 소안백발(韶顔白髮)의 지상선인처럼 타계하니 향년 96세였다. 공의 학문과 덕망은 당시 영남일대에 알려졌고, 그 후손에 이름난 선비가 연세 상전하여 대소 등과한 이가 50여명에 이르렀다.



숙종 11년에 공의 학덕을 추모하여 사림의 공의로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했다. 저서로는 경심잠(敬心箴)과 송은집이 있다.







<국조인물고>

송은 ★김광수 묘표(松隱 金光粹 墓表)

--- 공의 외손이신 서애 ★유성룡 선생께서 지으신 공의 묘표명



공(公)의 휘(諱)는 ★광수(光粹)요, 자(字)는 국화(國華)이며, ★김(金氏)는 본래 신라(新羅)

왕실(王室)의 성(姓)이다. 고려 때 휘 ★방경(方慶)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큰 공훈(功勳)을 세상에 세웠는데, 공이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함길도 감목관

(咸吉道監牧官) ★김자첨(金子瞻)이요, 조부(祖父)는 사직(司直) ★金孝溫이며, 고(考)

휘 ★극해(克諧)는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이르렀다.

공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맑았으며 풍채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부귀 영달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친구 사이에 시(詩)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홍치(弘治=明 孝宗의 年號)

신유년(申酉년=1501년, 연산군 7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_)한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의성(義城)의 북촌(北村)에 들어가 살면서 더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집 가에 왜송(矮松)이 한그루 있었는데, 푸르고 울창하여 두어 이랑의 그늘을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를 사랑하였다. 이에 매일같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며 그 아래에서

한가히 지내며 스스로 송은처사(松隱處士)라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을 잇대기

어려웠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게 지냈는데,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현우(賢愚)와 소장(少長)을 막론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즐겨 나아가

본을 뜨려 하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 나서 ★지례공(知禮公)이 일찍이 돌아가자 수십 년

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드는 일을 모두 다 하였으며, 한 아우가 안동(安東)에

살면서 오기로 약조한 날이면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않다가 반드시

더불어 같이 밥을 먹곤 하였다.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데 대한 말은 하지 않았고,

오직 옛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복(婢僕)들도 익히 듣고 능히 전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독행군자(篤行君子)라

할만하다. 비록 옛날의 곤궁(困窮)하면서도 고상(高尙)한 뜻을 기른 선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공의 선취(先取) ★남씨(南氏)는 아들 ★김당(金당)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김순(金珣)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 ★순천장씨(順天長氏)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장홍(長弘)의

후예(後裔)로서 첨정(僉正) ★장일신(長日新)의 딸이다. 딸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신택(申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처선(金處善)에게 출가하였는데 충순위(忠順衛)요,

다음은 ★김온(金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중영(柳仲영)에게 출가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요, 다음은 ★이영(李영)에게 출가하였는데 훈도(訓導)이다. ★김당은 딸 하나를

낳으니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김세우(金世佑)이다. ★김순은 두 아들을 낳으니

★김생하(金生河), ★김생명(金生溟)이요, 사위는 ★강여개(姜汝皆)이다. ★신택은 두 아들을 낳으니,

★신대년(申大年),★신대유(申大有)요,세 사위는 ★김목(金牧),★문희정(文希禎),★조희조(趙希祖)이다.

충순위는 세 아들을 낳으니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이요, ★김온은

한 아들을 낳으니 ★김명견(金命堅)이다. 관찰사는 두 아들을 낳으니 ★류운용(柳雲龍),

★류성룡(柳成龍)인데 관찰사이며 세사위는 ★이윤수(李潤遂), ★김종무(金宗武), ★정호인(鄭好人)이다.

★훈도는 딸 하나를 낳으니 사위는 ★김탄(金坦)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백여 인이다.



★장부인(張夫人)은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공과 더물어 곤궁하게 살면서 거친 음식은

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즐거워하며 고된 생활을 싫어하는 뜻이 없었다.



공은 성화(成化;明 憲宗의 年號) 무자년(戊子년;1468년,世祖14년)에 태어나

가정(嘉正;明 世宗의 年號) 계해년(癸亥年;1563년,明宗18年)에 돌아가니

향년(享年)96세이었다. 임종(臨終)에 목욕하고 궤( )에 기대어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기를 "족(足)하다" 하고는 조금 뒤 홀연히 서거(逝去)하였는데,

피부는 살았을 때와 같았다. 장 부인은 공보다 몇해 앞서 가정(嘉正)

기미년(己未년;1559,明宗14년)에 졸(卒)하니, 88세였다. 대곡산(大谷山)

건좌 손향(乾座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서거한 뒤 그 산기슭에

나아가 같은 묘역(墓域)에 봉분(封墳)을 달리한 제도(制度)로 만들었다.

그 22년 후에 외손(外孫)★류성룡(柳成龍)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관찰사로서

남쪽으로 내려와 공의 묘(墓)에 나아가 제(祭)를 올렸는데 그 묘도(墓道)에

비(碑)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고 데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덕)과 빛[光]이

따라서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고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하여,드디어 짧은 빗돌을

그 앞에 세우고 대략 이상과 같이 그 후면(後面)에 서술(敍述)하니, 아마도 백세(百歲)

뒤에도 이로 인하여 공의 대개(大개)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柳成龍 지음

(國朝人物考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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