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할아버님 본댁(백목동 영계리)위치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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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영환 작성일02-07-25 23:16 조회1,607회 댓글0건본문
그간 많이 궁금해 하던 할아버님으 본댁의 위치를 찾느라 오랫동안 자료를 모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빙이 없어서 고심하여 왔는데, 몇일전 태영(문)께서 정보를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이를 근거로 추적한 결과 영계리의 위치가 밝혀 졌습니다.
우선 급한 마음에 이를 알려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동 답사시에 보고드리겠습니다.
다음 글은 얼마전 주회씨가 쓰신 글입니다.
충렬공 본댁 "백목동 영계리"는 ?
1300년 이진 撰 충렬공 묘지문에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라는 기록과
1350년 안진 跋 충렬공 행장에
---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 라는 기록,
그리고 1602년 이시발 撰, 조우인 書 충렬공 묘갈에
---묘는 예안 치서 지례촌에 있으며--- 라는 기록으로 볼 때
충렬공께서 89세에 돌아가신 본댁은 "백목동 영계리" 인데, 현재의 어디인가요?
충렬공 장사를 지낸 "예안현 서쪽 산록 (예안 치서 지례촌)"은 현재의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이겠지요.
아무튼 안동과 그 주변의 옛날 지도나 옛 지명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충렬공 묘지문 (1300, 이진 찬)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영구가 떠날때는 삼관녹사 80여명이 모두 소복으로써 제사를 드리고 울음으로써 보내는데 그때 공을 미원하는 간신들 무리의 모사로 예장을 치르지 못하여서
왕이 이를 후회하고 1307년 (충렬왕33) 6월 14일에 왕이 영지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은 공이 많은지라 대려와 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기 어렵다" 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여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 충렬공 묘갈 (1602, 대구도호부사 이시발 찬, 조우인 서)
묘는 예안 치서 지례촌에 있으며
▣ 김윤만 - 이 문제는 우리 안사연 식구들의 "화두"이겠지요?
▣ 郡/김태영 - 이번 행사때 문제의 궁금증이 풀렸으면 좋겠네요
▣ 김항용 - 위의 구지명 내용(백목동 영계리, 예안현 서쪽 산록과 현 죽송동과의 일치 여부) 을 문화원장님 질의 사항에 포함시키겠습니다.
▣ 김정중 - 안동시 홈페이지 풍천.풍산.녹전.예안.일직.서후.북후.세칭.속칭에도 없네요
▣ 김영환 - 백목동 영계리가 개성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개성 고지도를 몇번 찾아봤으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본댁이 개성에 있;었;을 개연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장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솔내 영환 -
▣ 김정중 - 기대됩니다. 안동에서 좋은 말씀 듣겠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이 모두가 안사연의 홍복인 것 같습니다. 28일이 기대됩니다.
▣ 郡/김태영 -
그러나 확실한 증빙이 없어서 고심하여 왔는데, 몇일전 태영(문)께서 정보를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이를 근거로 추적한 결과 영계리의 위치가 밝혀 졌습니다.
우선 급한 마음에 이를 알려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동 답사시에 보고드리겠습니다.
다음 글은 얼마전 주회씨가 쓰신 글입니다.
충렬공 본댁 "백목동 영계리"는 ?
1300년 이진 撰 충렬공 묘지문에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라는 기록과
1350년 안진 跋 충렬공 행장에
---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 라는 기록,
그리고 1602년 이시발 撰, 조우인 書 충렬공 묘갈에
---묘는 예안 치서 지례촌에 있으며--- 라는 기록으로 볼 때
충렬공께서 89세에 돌아가신 본댁은 "백목동 영계리" 인데, 현재의 어디인가요?
충렬공 장사를 지낸 "예안현 서쪽 산록 (예안 치서 지례촌)"은 현재의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이겠지요.
아무튼 안동과 그 주변의 옛날 지도나 옛 지명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충렬공 묘지문 (1300, 이진 찬)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영구가 떠날때는 삼관녹사 80여명이 모두 소복으로써 제사를 드리고 울음으로써 보내는데 그때 공을 미원하는 간신들 무리의 모사로 예장을 치르지 못하여서
왕이 이를 후회하고 1307년 (충렬왕33) 6월 14일에 왕이 영지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은 공이 많은지라 대려와 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기 어렵다" 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여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 충렬공 묘갈 (1602, 대구도호부사 이시발 찬, 조우인 서)
묘는 예안 치서 지례촌에 있으며
▣ 김윤만 - 이 문제는 우리 안사연 식구들의 "화두"이겠지요?
▣ 郡/김태영 - 이번 행사때 문제의 궁금증이 풀렸으면 좋겠네요
▣ 김항용 - 위의 구지명 내용(백목동 영계리, 예안현 서쪽 산록과 현 죽송동과의 일치 여부) 을 문화원장님 질의 사항에 포함시키겠습니다.
▣ 김정중 - 안동시 홈페이지 풍천.풍산.녹전.예안.일직.서후.북후.세칭.속칭에도 없네요
▣ 김영환 - 백목동 영계리가 개성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개성 고지도를 몇번 찾아봤으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본댁이 개성에 있;었;을 개연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장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솔내 영환 -
▣ 김정중 - 기대됩니다. 안동에서 좋은 말씀 듣겠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이 모두가 안사연의 홍복인 것 같습니다. 28일이 기대됩니다.
▣ 郡/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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