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약재 상소문]북원의 사신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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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01-21 11:46 조회2,466회 댓글0건본문
원의 사신을 맞지 말라는 청원소(請願疏)
신(臣)들이 사사로히 들음에 의하오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이는 반드시 먼저 대계(大計)를 정했사옵니다 대계가 정해지지 못한다면, 인심이 두 마음을 의심하는데, 인심의 의심은 모든 일의 화근인 것이옵니다.
우리 나라를 생각하오면, 바다 밖에 외따로 있사옵니다. 우리의 태조(太祖)께서 당대말(唐代末)에 일어나신 이래, 중국을 예의로써 섬겼사온데, 그 섬김은 천하의 의인된 임금인가를 보아서 였을 따름 이었나이다.
지난번에, 원나라의 임금이 스스로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하자, 명(明)의 황제가 일어나셔서 사해(四海)를 다 차지하였는데, 우리의 돌아가신 선왕(공민왕)께서는 천명을 밝게 아시고, 표문(表)을 올리어 신(臣)이라 칭하였사옵니다.
이에 명의 황제께서는 칭찬하시어, 왕으로 봉하시고, 또 하사품을 내리셔서 두 나라가 서로 가까이 한 지가 이에 6년이 되었사옵니다. 금상 전하께서 임금자리에 오르신 당초에, 반역의 신하 김의(金義)는 명나라의 사신을 예로 따라 보내는 마당에 도중에서 함부로 살해하고는, 조정을 배반하여 북원(北元)으로 들어가 그는 원나라의 황제가 남긴 서자(庶子)와 변방의 왕(심양왕)을 맞아들일 것을 꾀했사옵니다.
중국의 사신을 살해하고, 또 군주를 배반하였으니, 그의 모질고 의리에 벗어난 것은 심한 것이었나이다. 그러하온즉 진실로 마땅히 그의 죄를 올바르게 정하시어, 위로는 중국의 천자(天子)에게 고하시고, 아래로는 방백(方伯)들에게 알리시며, 그를 쳐죽여야만 될 것이옵는데도, 국가는 정의의 죄를 불문에 붙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金崙)로 하여금 공물(貢物)을 받들고 북원(北元)으로 가게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오계남(吳季南)은 중국의 천자한테서 봉(封)을 받은 나라의 신하인데도, 함부로 정료위(定遼衛)의 세 사람을 죽이었고, 장자온(張自溫) 등은 김의(金義)와 같이 간 사람이었는데도 정료위(定遼衛)쉐 도달하지도 못한 채 공공연히 환국을 했었사옵니다. 그런데도, 또한 그대로 두어 그 허물을 묻지 않았사옵니다
이번에, 북윈의 사신이 오자, 대신을 국경의 지점으로 보내어 예의로써 영접할 것을 의결하였는데, 복원이 심히 성냄을 원하지 않고, 군사일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 말하옵니다. 원은 나라를 잃고도 멀리 찾아와 먹을 것을 구하여 한번 배를 불리는, 즉 잠시 연명(延命)할 것을 기대하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우리의 군왕을 용납한다는 명목을 붙이고 있사오나, 실은 자기네의 잇속을 차리는 것이옵니다. 이제, 그들을 끊어 버리신다면 그것은 곧 우리 나라의 강한 것을 보이는 것이 되오나, 그들을 섬긴다면, 오히려 그들의 뜻을 교만히 하올 테니, 그 군사 일을 없게 하자는 것이, 실은 군사일이 빨리 있게 하는 것이옵니다.
사사로이 북원의 조서(認書) 내용을 들으니, 우리를 대역죄(大逆罪)로 몰았다 가도 용서를 한다 했다는데, 우리는 본시 죄가 없사옵거늘, 또한 어찌 용서를 한 다 할 것이오니까? 국가가 만일에 그 사신을 예의로써 대접하고 돌려 보낸다면, 온 나라의 신민(臣民)은 그 사실이 없는데도 우리 스스로가 대역의 죄명을 둘러 써서, 사방에다 전해 알게 할 수가 없는 것이옵거늘, 신하된 자가 참을 수 있는 것이겠사옵니까? 하물며 또 명의 조정(朝廷)이 김의(金義)의 저지른 일을 처음 듣고는 이미 우리 나라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온데, 다시 북원과 서로 통하여 김의(金義)의 죄를 묻지 않았다고 듣는다면, 곧 반드시 사신을 죽이어 적과 한패가 되고 있음이 의심할 것 없다고 말할 것이옵고, 만약에 그 죄를 묻는 군대를 일으키어 해륙(海陸)으로 같이 진군하여 온다면, 국가는 무슨 말을 가지고 대답을 할 것이옵니까? 그것은 작은 적의 군사가 요동치 않게 하려다가, 실로 천하의 대군을 움직이게 하는 짓이옵니다. 이 이치는 심히도 명백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깨닫기 쉬운 것인데도, 우리 조정의 의론에서는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사온데 그 까닭은 알기에 어렵지 않사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전일 여러 작은 변이 있었던 당시 재상이 명나라 조정의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해서, 사실로 김의(金義)와 통모(通謀)를 한 나머지 윗나라인 명과의 인연을 끊으려 한 일이 있었사온데, 안사기(安師埼)가 그 사정이 들어나자 자살을 했사온 바, 그것이 그 이유인 것이옵니다. 안사기가 이미 죽었사온즉, 마땅히 빨리 계책을 정해서 뭇사람들의 분함을 풀어줘야 할 것인데도, 이제까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인심이 흉흥(洵溜)하여 다른 변이 생길까 하고 두려워하고 있사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전하(殷下)께서는 스스로 마음에 결단을 내리시어, 원의 사신을 잡고 원나라의 조서를 몰수하시고 오계남(吳季南) 장자온(張自溫) 등 정의가 데리고 갔던 사람들과 같이 묶어 명나라 서울로 보내시온다면, 애매한 죄는 가리지 않더라도 자연히 명백해질 것이옵니다. 그리고, 정료위와 손을 잡아 양병을 하여 변이 있을 것에 대비하고 북쪽을 향해서 소리를 친다면, 원나라의 남은 무리들은 자취를 나타내지 않고 멀리 도망을 쳐서, 국가의 복은 무궁히도 기약될 것이옵니다.
신; 김구용,정몽주,박상충
우왕원년(1375)에,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등과 연명(連名)으로 올렸으나 왕한테 용납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당하여, 삼우당은 청도(淸道)로, 정몽주는 언양(彦陽)으로 좌천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인 포은집(騷隱集) 7권 4책으로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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