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육백년사(11) 김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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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7-28 20:32 조회1,507회 댓글0건본문
【성 명】 김수동(金壽童)
【생몰년】 1457(세조 3)∼1512(중종 7)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미수(眉馬), 만보당(晩保堂)
【시 호】 문경(文敬)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457(세조 3)∼1512(중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미수(眉馬),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적(金캟)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성종 5년(1474) 생원(生員)이 되고, 1477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 · 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역임,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연산군 즉위 후 홍문관 전한(典翰)에서 시작하여 직제학 · 부제학에 올랐고 연산군 3년(1497) 승정원 부승지, 다음해 좌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全羅) · 경상(慶尙) · 경기도(京畿道)의 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5년(1499)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이조 참판 · 형조 판서 등을 거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겸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고 1504년 이조 판서, 다음해에 우찬성(右贊成)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다음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그는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았으며 재치가 넘쳐 연산군의 폭정하에서도 총애를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때를 따라 신축성 있게 대처하여 임금에 대해서는 죄를 입지 않고 아래로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했으며 청렴을 지켰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으로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중종 5년(1510)에 영의정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양천구 신월동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었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 김태서 -
▣ 솔내 영환 -
▣ 태영/문 -
【생몰년】 1457(세조 3)∼1512(중종 7)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미수(眉馬), 만보당(晩保堂)
【시 호】 문경(文敬)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457(세조 3)∼1512(중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미수(眉馬),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적(金캟)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성종 5년(1474) 생원(生員)이 되고, 1477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 · 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역임,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연산군 즉위 후 홍문관 전한(典翰)에서 시작하여 직제학 · 부제학에 올랐고 연산군 3년(1497) 승정원 부승지, 다음해 좌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全羅) · 경상(慶尙) · 경기도(京畿道)의 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5년(1499)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이조 참판 · 형조 판서 등을 거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겸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고 1504년 이조 판서, 다음해에 우찬성(右贊成)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다음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그는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았으며 재치가 넘쳐 연산군의 폭정하에서도 총애를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때를 따라 신축성 있게 대처하여 임금에 대해서는 죄를 입지 않고 아래로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했으며 청렴을 지켰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으로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중종 5년(1510)에 영의정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양천구 신월동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었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 김태서 -
▣ 솔내 영환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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