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육백년사 (16) 김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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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7-29 06:20 조회1,553회 댓글0건본문
【성 명】 김찬(金瓚)
【생몰년】 1543(중종 38)∼1599(선조 32)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숙진(叔珍), 눌암(訥菴)
【시 호】 효헌(孝獻)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43(중종 38)∼1599(선조 3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으로 형조 참의(刑曹參議) 김언심(金彦沈)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즉위년(1567)에 진사(進士)가 되고 1568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70년에는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대교(待敎) · 전적(典籍) · 형조 정랑(刑曹正郞) · 검상(檢詳) ·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지평(持平) · 집의(執義) ·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사간(司諫) · 수찬(修撰) · 교리(校理) · 응교(應敎) 등 삼사(三司)의 관직을 역임한 다음 1574년에는 평안도 순무사(平安道巡撫使)로 나갔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典翰) · 직제학 · 승지 · 대사간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듬해 체찰부사(體察副使) · 양 호조 도사(兩湖調度使)가 되어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1594년에는 접반사(接伴使)로서 명(溟)의 원군(援軍)을 인도, 강화회담에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부터 예조 판서 ·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 대사헌 · 이조 판서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승진되었다.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에 밝았고 외교적인 수완이 능하여 3국간의 외교적인 절충을 성공시킨 명신이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名世叢攷
【관련항목】 김상용 (金尙容)
▣ 김태서 -
▣ 솔내 영환 -
▣ 김재익 -
▣ 태영/문 -
【생몰년】 1543(중종 38)∼1599(선조 32)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숙진(叔珍), 눌암(訥菴)
【시 호】 효헌(孝獻)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43(중종 38)∼1599(선조 3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으로 형조 참의(刑曹參議) 김언심(金彦沈)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즉위년(1567)에 진사(進士)가 되고 1568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70년에는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대교(待敎) · 전적(典籍) · 형조 정랑(刑曹正郞) · 검상(檢詳) ·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지평(持平) · 집의(執義) ·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사간(司諫) · 수찬(修撰) · 교리(校理) · 응교(應敎) 등 삼사(三司)의 관직을 역임한 다음 1574년에는 평안도 순무사(平安道巡撫使)로 나갔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典翰) · 직제학 · 승지 · 대사간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듬해 체찰부사(體察副使) · 양 호조 도사(兩湖調度使)가 되어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1594년에는 접반사(接伴使)로서 명(溟)의 원군(援軍)을 인도, 강화회담에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부터 예조 판서 ·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 대사헌 · 이조 판서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승진되었다.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에 밝았고 외교적인 수완이 능하여 3국간의 외교적인 절충을 성공시킨 명신이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名世叢攷
【관련항목】 김상용 (金尙容)
▣ 김태서 -
▣ 솔내 영환 -
▣ 김재익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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