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공 김일(金逸 1603-1651) 유물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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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15-01-03 12:31 조회2,170회 댓글0건본문
∎병사공 김일(金逸 1603-1651) 유물소개
順治四年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일(金逸)에게 조총,화약,탄환,활,화살,석류황 등 軍器를 잘 구비한 공으로熟馬 한 필을 하사한 내용의 유서(諭書)와 첨부된 所志 1매,順治六年 발급 장단도호부사 행직 교지1매 등 일괄 자료로 유서 첫머리 부분 손상(복원 보수)외 기타 상태 양호하며,교지는 부분 손상이 있으나 내용에는 영향이 미미하다.
<크기> 유서241×50cm
∎병사공 김일(金逸 1603-1651)
본관은 안동으로 초명은 술(述)이며, 자는 이서(而緖)이다. 익원공 사형(士衡)의 9대손으로 증병조판서 계현(繼賢)의 차남이다.
익원공(사형)–밀직사공(승)–동추공(종숙)–문정공(질)–부사공(지동)-(방)–현감공(언청)–증참판공(신)–목사공(계현)
-통제사공(적)
-병사공(일)
무과 급제 후 인조 5년 정유난(丁酉亂) 때 훈국파총(訓局把摠)으로 강도좌초관(江都左哨官)이 되어 왕실을 호가(扈駕)했다. 인조8년 가용천부사를 제수 받고 인조 임금으로부터 갑주(甲冑)를 튼튼하고 우수하게 제작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자를 받았다.인조 8년 형조 정랑, 부산진결포수군만호, 인조 9년 창성부사, 인조 15년 중화현감, 인조 16년 충청수사, 인조 18년 의금도사, 동년 11월 전라우수사, 인조 21년 전라병사, 인조 23년 정주목사, 인조 24년 황해병사, 인조 25년 안주목사, 평안병사를 제수 받았다. 인조 26년 인조임금으로부터 숙마 1필을 하사 받았다. 인조 26년 6월9일 오위장(五衛將), 인조 27년 경기우방어사와 장단부사를 지내고 효종 즉위년 10월23일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다. 통제사 천망이 되었으나 유정익으로 낙점되고, 공은 그해 7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겸 경성도호부사(북병사) 제수받았다. 북쪽 국경을 지키던 중 효종 2년 임소에서 49세에 병으로 죽었다. 공의 죽음에 대하여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 의하면 “함경감사 이기조 (李基祚)가 관문을 수령했다는 장계가 12월 27일에 도착했는데 그 내용에, ”지금 12월 23일 해시(오후 9-11시)에 행영에서 문서에 관인을 찍었습니다. 북병사의 군관 한산급, 영리 홍계조 등이 올린 고목에, “병사 김일이 이번 달 21일 술시 (오후7-9시)쯤 처음에는 천식증으로 고통스러워했는데 22일 피를 토하더니, 그날 해시 (오후9-11시)에 뜻밖에 죽었습니다”라는 고목이었기에 충실히 보고합니다“ 했다. 이일은 신모년의 옥사(낙흥부원군 자점, 조귀인 등) 심문기록 중 무장 군인의 연루자로 지목받은 당대의 유명한 무장 변사기의 매질과 단근질 이후의 자백 중 ”한패거리의 경우, 김시성, 김일, 심지명입니다. 경기도의 5군영의 군사를 모으라고 명령하여 일시에 거다한다고 했는데, 김자점은 새로 지은 본가에 있으면서 저를 불러다가 말해 주었습니다“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이러한 사실은 변사기 외 다른 연루자들을 혹독하게 고문하고 심문하여 짜깁기에 가까운 결과였다. (12월 23일)
공은 수차에 걸쳐 파격적인 승진을 하거나 왕의 총애를 입은 바 다른 대신이나 대간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여러 번 받은 바 있다. 공의 사후 엄정면 논리동 구장곡(구장골)에 반장을 한 뒤 엄정면 용산리 향림에 묻혔다.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부인은 충주출신으로 임진왜란 시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워 광남군으로 책봉된 광주이씨 광악의 따님이다. 정부인 광주이씨에게서 두명의 딸을 두었다. 정부인 의령남씨 에게서 5남을 두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및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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