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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동김씨 분관성씨 ④ (사천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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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8-07 17:05 조회2,7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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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동김씨 분관성씨 ④ (사천김씨)





▣ 족보 김씨분관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천김씨 시조 阜(부) 충렬공 方慶의 현손 齊顔의 子







▣ 영환 종친께서 소개하신 "소천서원과 청원정 (蘇川書院과 淸遠亭)" 내용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에는 이곳 龍宮全氏(용궁전씨)의 시조이신 菊波 全元發(국파 전원발) 선생은 모신 서원이 있다. 전원발 선생과 척약재 김구용 선조와는 각별한 사이었으며,



더욱이 우리 안동김문의 장손은 方慶(방경)-  (선)- 資(자)- 爲(위)- 得男(득남)- 精(정)으로 이어오다 金精공(★방경의 6세손)은 척약재의 아우인 金齊顔공(★방경의 현손<5세손>)과 더불어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김정공의 후손은 수안김씨로 , 김제안공의 후손은 사천김씨로 분적하였다. 바로 안동김문의 장손인 김정공의 배위가 국파 전원발선생의 따님이었다









▣ 김씨의 뿌리 (1998, 범우사)



시조 김부(金阜)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김은열의 13세손이다. 김부의 자는 유돈(惟敦), 시호는 정의(貞義)다



김부는 안동김씨의 중시조인 김방경의 6세손이기도 하다. 고려말 김방경의 현손(★5세손)으로 판도판서의 관직에 있던 김제안(金濟顔)은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 아들 김부도 사성(泗城)으로 귀양갔으나 정사왜구의 난때 전공을 세워 공양왕으로부터 사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뒤 후손들이 사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나왔다. 사성은 경남 泗川의 옛이름이다.



김부의 아들 김사이(金思 )는 고려말 평장사를 지내고 조선개국 후에는 태종때 집현전 태학사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김부의 손자 김만서(金晩緖)는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황보인의 사위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균공법을 상주했다. 또 용비어천가를 지을 때에는 왕 앞에서 강론하는 경연(經筵) 자리에 성삼문과 나란히 참여하기도 했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새로운 진법을 창안했다.



계유정란때 경상감사로 있다가 장이 황보인이 화를 입게 되자 그는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후 단종복위사건으로 박팽년, 성삼문 등이 참화당하는 것을 보고 진안의 골짜기에 은거했는데, 단종이 죽음을 당한 후에는 3년동안 죽으로만 연명했다고 한다.



김만서의 아들 김기(金機)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보고 벼슬에 대한 관심을 버렸다. 그래서 성종의 부름을 여러차례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밭갈이로 일생을 보냈다.



김만서의 둘째아들 김추(金樞)는 외할아버지 황보인과 김천서 등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상소문을 올렸으나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장사로 유배당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천김씨에은 이밖에도 부사직을 역임한 김성구(金成九), 장릉참봉을 지낸 김희정(金希鉦), 부위공 김득선(金得善), 군복공 김호인(金好仁) 등이 있다.



사천김씨는 鎭安派와 詩山派로 크게 나뉜다.



최근의 인물로는 금호산업 대표이사 김경선이 있다.







사천김씨가 생겨나기까지의 계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경순왕 김부 (金傅) ?-978

② (4남)김은열 (金殷說)

③ (2남)김숙승 (金叔承) ★구안동김씨 시조

④ 김일긍 (金日兢)

⑤ 김이청 (金利請)

⑥ 김의화 (金義和)

⑦ 김민성 (金敏成)

⑧ (2남)김효인 (金孝印) 1192 ?-1253

⑨ 김방경 (金方慶) ★구안동김씨 중시조 1212-1300

⑩ 김 선 (金 )

⑪ (3남)김승택 (金承澤) ?-1358(공민왕7)

⑫ 김 묘 (金昴)

⑬ (2남)김제안 (金濟顔) ?-1368(공민왕17)

⑭ 김 부 (金阜) ★사천김씨 시조









▣ 인터넷 검색자료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구안동김씨(舊安東金氏)에서 분적한 사천김씨(泗川金氏)는 시조 김부(金阜)가 김방경의 6세손이며 고려 공양왕때 나라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으로 사성(사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사천으로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천 김씨(泗川金氏)는 남한에 총 1,157가구, 4,9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전북 진안군 상전면 일원

전북 정읍군 감곡면 대신리, 태인면 오유리

전북 김제군 봉남면 도장리

전북 익산군 성당면 내란리









▣ 디지털한국학에 게재된 사천김씨의 인물은 1명(김관식)입니다.



사천(泗川) 김씨의 인물들

김관식(金冠植){2}







▣ 사천김씨의 시조 金阜(김부)의 아버지인 金齊顔(김제안, ?-1368(공민왕17), 척약재 김구용의 弟)에 대한 내용이 디지털한국학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김제안(金齊顔)



시대 고려

생몰년 ?-1368(공민왕17)

본관 안동(安東)

자 중현(仲顯)



시호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1368(공민왕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현(仲顯).

방경(方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묘(昴)이며,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이존오(李存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1364년(공민왕 13)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한휘(韓暉)와 이구수(李龜壽)가 변공(邊功)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발탁되어 기밀을 마음대로 하고 총행이 지나치므로 고신(告身:辭令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이 참소하여 하옥되려다가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 등이 간관을 하옥하면 훗날 모든 허물이 왕에게 돌아갈 것이며, 고신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될 것이 없다고 만류하여 모면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강제로 고신에 서명하게 한 뒤 파면하였다.



공민왕이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를 하고자 하여, 1366년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녹생(田祿生)을 사신으로 보낼 때 군부좌랑(軍簿佐郎)으로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였다. 연경에 이르렀을 때 하남왕과의 수교를 싫어한 원나라의 태자가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전녹생을 되돌려보낸 후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고 있다가 틈을 보아 홀로 하남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 공으로 하남왕의 상주에 의하여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中書兵部郎中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가 되었다. 이어 하남왕의 보빙사(報聘使) 곽영석(郭永錫)과 함께 돌아오자 공민왕은 그 노고를 치하하여 대언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신돈(辛旽)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반대한 까닭에 내서사인이 되었고, 이어서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증조부 김방경의 6세손, 조부 김선의 5세손)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고발로 인하여 기밀이 누설되어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어 국문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신돈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林英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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