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의 가족 ③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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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8-08 18:11 조회2,654회 댓글0건본문
김방경의 가족 ③ (사위)
▣ 안동김씨 족보, 김방경 묘지석, 고려사 등을 종합해 보면 충렬공 김방경의 사위는 모두 6명입니다.
조변 ?-1288(충렬왕14)
경수
권윤명
채홍철 1262-1340(원종3-충혜왕복1)
채의
김원충
▣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표시가 된 사람은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http://www.koreandb.net/)에서 약력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 사위 ★趙 (조변)은 황성인으로 지밀직사사 승지를 지내고 충렬공(김방경)을 따라 진도의 삼별초 토벌과 일본원정에 참가하였다.
아버지는 참지정사 광정공 ★趙季珣(계순)이고 조변은 조계순의 둘째아들이며, 두 아들을 두었는데 ★趙文簡(문간)은 밀직부사를 趙文瑾(문근)은 참지문하부사를 역임하였고, 딸 셋을 두었는데 안렴사 ★庾瑞(유서), 찬성 문온공 吳?文(오?문), 문밀직부사 崔斯立(최사립)에게 출가하였다.
※ 기록 : 족보, 묘지석, 고려사(조충·조변전)
<묘지석> 一女適參知政事 趙季恂之二子 趙 仕至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上將軍典理判
⊙ 사위 慶綬(경수)는 청주인으로 판통례문사균을 지냈다. 아버지는 호부상서 慶審(심?)이고, 아들 ★慶斯萬(사만)은 좌대언을 역임하였다. 딸은 둘을 두었는데 삼사좌사 화숙공 崔玄祐(최현우), 판사 金成用(김성용)에 출가하였다. 경사만의 아들 ★慶復興(경복흥, 사위 경수의 손자)은 재상을 지냈다.
※ 기록 : 족보
⊙ 사위 權允明(권윤명)은 안동인으로 첨의평리를 지냈다. 아버지는 병부상서 權濟(제)이고, 아들 權碩(석)은 상서를 지내고, 딸 셋을 두었는데 정당문학 장령공 金鎭(禾변, 김진), 판서 南有孫(남유손), 소윤 鄭佶(정길)에 출가하였다.
※ 기록 : 족보, 묘지석
<묘지석> 一適通禮門使權允明
⊙ 사위 ★蔡洪哲(채홍철)은 평강인으로 호는 중암이고 문정승 순천군을 지냈다. 아버지는 낭장 蔡誠(성)이고 아둘 둘을 두었는데 첨의 평강부원군 ★蔡河中(하중)과 蔡河老(하노)이다
※ 기록 : 족보, 고려사 (채홍철전, 채하중전)
<고려사> 처음 金方慶이 北界에 鎭할 새 龍岡의 官妓를 좋아하여 한 딸을 낳은지라 洪哲이 이에 장가들어 河中 河老를 낳으니 河中은 따로 傳이 있다.
⊙ 사위 蔡宜(채의)는 묘지석에 의하면 충렬공의 첫째부인 죽주박씨(박익정의 딸)가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자 孫氏을 재취로 맞아 딸 하나를 낳아 통례문지후 蔡宜(채의)에게 출가하였다 라고 되어 있고, 족보에도 부기하여 적어 놓았다..
※ 기록 : 묘지석, 족보
<묘지석> 朴氏 先公薨 又娶孫氏 生一女 適通禮門祗侯蔡宜
⊙ 사위 金元 (김원충)은 묘지석에 의하면 지첨의부사 ★金光遠(김광원)의 큰아들로 조현대부 신호위 보승장군 金元 (김원충)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 기록 : 묘지석
<묘지석> 一適知僉議副使金光遠之一子 朝顯大夫神虎衛保勝將軍金元沖
※ 김방경 묘지석은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history21.co.kr/kookmin/bk21/2고려/고려시대금석문목록.htm)에서 원문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1300년에 충렬공이 돌아가시자 묘지석을 찬한 이진이라는 사람은
1244(고종 31)∼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으로,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 사위 여섯중 조변과 채홍철에 관한 내용은 디지털한국학에서 그대로 퍼서 올려봅니다.
조변(趙#변04){1}
시대 고려
생몰년 ?-1288(충렬왕14)
본관 횡성(橫城)
자
호
시호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1288(충렬왕 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문하시중 충(#충01)의 손자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장인인 김방경(金方慶)의 세력에 힘입어 원종 때 낭장 겸 감찰사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행수(行首)로서 입직(入直)할 때 밤이 늦어 대궐문이 닫혀 못 들어가자 원종이 문틈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이는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하여 그 곧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궐직문제(闕直問題)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1년(원종 12)김방경이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할 때 장군으로 기용되고, 1274년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대장군으로 천호(千戶)가 되어 김방경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281년(충렬왕 7)제2차일본정벌 때 원제(元帝)로부터 소신교위관군총파(昭信校尉管軍摠把)에 임명되고, 1284년 대장군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우부승지를 거쳐 1287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그뒤 병으로 면직이 되자 왕은 그의 사위 유서(庾瑞, ★조변의 사위)를 낭장으로 임명하여 위로하기도 하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전고(典故)에 정통하였으며, 성품이 관후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채홍철(蔡洪哲)
시대 고려
생몰년 1262-1340(원종3-충혜왕복1)
본관 평강(平康)
자 무민(無悶)
호 중암거사(中菴居士)
시호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1262(원종 3)∼1340(충혜왕 복위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무민(無悶), 호는 중암거사(中菴居士).
1283년(충렬왕 9) 과거에 급제하여 응선부녹사(膺善府錄事)에 보임되고, 그뒤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로 장흥부(長興府)에 출보되었다가 물러나 14년을 한거(閑居)하며, 불교와 음악·의약 등을 연구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의부정(司醫副正)으로 부름을 받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5도순방계정사(五道巡訪計定使)에 임명되어 5도의 양전(量田)과 부세(賦稅)의 균정(均定)에 대한 일을 맡아 1년간 재직하면서 민전(民田)을 탈취하는 등 사리를 취하여 일약 거부가 되었다.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고 이어 삼사사(三司事)·찬성사(贊成事)를 차례로 역임하고, 1320년 평강군(平康君)에 피봉(被封)되었다.
그러나 권한공(權漢功) 등과 더불어 당파를 맺고 권력을 휘두른 것이 화근이 되어 1321년 일당과 함께 장류(杖流)되고 집이 적몰당하였는데, 이에 원한을 품고 당시의 미묘한 정세를 틈타 권한공 등과 함께 원나라에 청원서를 올리는 등 심양왕 고(瀋陽王暠)를 왕위에 세우려는 운동을 벌였다.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찬성사로 기용되어 삼중대광(三重大匡) 순천군(順天君)으로 개봉(改封)되고, 순성보익찬화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문장과 각종 기예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의약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일찍이 자기집 북쪽에 전단원(#전29檀園)을 지어 선승(禪僧)을 기거하게 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의약과 의술을 베풀었으며, 집 남쪽에는 중화당(中和堂)을 두어 국로(國老) 8인을 맞아 기영회(耆英會)라 칭하였다.
<자하동신곡 紫霞洞新曲〉이라는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이곡(李穀)·이제현(李齊賢)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동문선》에 〈복주영호루 福州暎湖樓〉 등 시 몇 편이 있고, 저작으로 《중암집 中菴集》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稼亭集, 益齋亂藁, 東文選, 新增東國輿地勝覽. 〈秦星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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