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나기 03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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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8-10 05:16 조회1,916회 댓글0건본문
여름휴가 나기 03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
영덕 강구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6시 서둘러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내와 아이 둘을 깨워 길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부산을 떱니다.
나오다 보니 해상공원 전망대에는 해돋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벌써 북적북적 합니다. 지나칠 수 없어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 떠오르는 불덩이를 구경하다가, 해안도로를 타고 영덕---영해---울진---삼척---강릉으로 길을 재촉합니다.
영덕 영해와 관련된 선조님들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김씨의 뿌리 (1998, 범우사)>
영해김씨
시조 김억민(金億敏)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 김은열의 14세손이다.
김억민은 김철(金哲)의 손자다. 김억민은 병조정랑을 거쳐 영해도호부 부사를 역임했다. 연산군때 화를 입어 다시 入北했다. 김억민은 중종7년에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후손들이 김억민이 부사를 지냈던 영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나왔다. 영해(寧海)는 경상북도 영덕의 옛이름이다.
<디지털한국학 홈>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우리 홈 게시판>
14)김성좌(聖佐) (1639~1708)
양좌의 동생이고 호는 송리(松里)이다. 1663년현종 계유(25歲) 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고을을 역임하고 영해부사로 재임중 청백리로 이름이 있었으며 갈암 이현일의 문인이 되었다
만년에는 빙계계곡에 세심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울진을 지나는데 "왕피천 계곡" 표지판이 스쳐갑니다. 경순왕의 큰 아들 마의태자가 거쳐간 곳입니다. 왕피천 계곡을 지나자 마자 바로 그 유명한 울진의 불영계곡 가는 길이 나타납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왕피성지(王避城址) 【소 재 지】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왕피리
신라 말에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자는 부왕에게 그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불가항력으로 부득이 천년사직이 넘어가게 되자 마의(麻衣)를 입고 모후(母后) 송씨와 함께 이 성에 과 있다가 모후는 이곳에서 작고하고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한다.
당시 모후를 따라온 송씨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울진군내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하천 이름도 왕피천으로 신라 망국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삼척 초입부터 길이 막혀 한참을 가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삼척시내에 진입하니 세계동굴엑스포가 열리고 있어 도시 전체가 온통 엑스포 물결입니다.
가야할 길이 멀어 엑스포는 포기하고 죽서루나 보려고 하였으나 죽서루가 엑스포 행사장 내에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아쉽지만 그냥 지나칩니다.
관광지도를 보니 삼척시와 동해시 경계인 미로면에 충렬공 할아버지의 글이 실려있는 동안거사집을 지은 고려시대 이승휴의 유허지 천은사가 표시되어 있고, 태서 종친님께서 우리 게시판에 소개한 집성촌 가운데 이곳의 근덕면 교가리 지명이 보입니다.
<우리 홈 게시판>
죽서루의 가객 심동로 - 은회 종친님
당시에 척약재 김구용(金九容)이 안사가 되어 삼척에 왔을 때 심동로를 찾아와서 그가 거처하는 집을 방문하여 심동로의 호인 "신재"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편액으로 그의 집에 걸어주었습니다. 이처럼 삼척으로 오는 많은 관원들은 반드시 심동로를 찾아와서 나라 일을 함께 논하고 시를 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솔내 영환 - 신재 심동로와 척약재 선조님과는 절친한 사이이셨던 듯 싶습니다. 연령상르로는 10여세이상 차이 나지만 학문적으로 서로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이이셨습니다. 척약재께서 성균관 직강에서 강릉도 안렴사(현재의 도지사)로 나가시었을때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뮨집에도 삼척과 관계되는 시가 여러편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실려 있습니다.
<우리 옛글 백가지, 1997, 한일사>
관동별곡에 대한 소감 (關東別曲序) ---김득신
지난 정축년 (=1637년, 병자호란 다음 해에 청에 항복) 전쟁이 끝난 뒤에 나는 관동을 실직(=삼척의 옛 이름)에서 노닌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그 지방의 젊은 기생 한 사람이 이 관동별곡을 매우 잘 불러 늘 그를 竹樓(=?삼척 죽서루) 에 불러다 놓고 노래를 시켰다.
그러면 나의 감흥이 고조될 뿐만아니라 詩文에 대한 상상도 넓어짐을 느꼈었다. 참으로 훌륭한 노래였다.
오후 4시가 다 되어 강릉에 도착하여, 경포호 뒷 마을 초당마을 내에 있는 식당겸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허균 허난설헌 생가를 찾아 갑니다.
화창하고 작렬하는 한여름 햇빛 속에 주위에 울창한 송림 속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는 생가를 두루 살펴보고 주문진항으로 길을 재촉합니다. 생가 초입에 허균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의 건립인사 명단에 김민회 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누군지 궁금하나 알 수 없습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강릉 이광로 가옥(江陵李光魯家屋) 【관리번호】210-120-360-046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59호 【유적종류】고가(민간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3/2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개인(이광로)
【유적내용】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며,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3칸의 광이 있고, 좌측으로는 행랑방과 마구간이 있는 대문간 채를 지나면 잘 다듬어진 정원과 함께 사랑채가 나타난다.
팔작기와지붕으로 전면에 툇마루가 있고, 대청 2칸을 우측에 두고 있다. 사랑채의 좌측 끝은 상 노인방으로 안채 출입문간에서도 출입이 가능하게 하였고, 협문과 공간을 구분하는 담을 전면에 가지고 있다.
사랑 대청은 창호로 둘러싸여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정으로 하고 상부의 판대공과 대들보는 툇간만큼 전면으로 돌출되면서 노출되어 있어 구조적인 미를 풍기고 있다.
안채는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되어 있다. 부엌, 방, 마루로 되어 있으며 부엌의 출입구는 사각으로 연결되어 미닫이문을 내고 있으나 근래에 수리를 한 듯하다.
안채 방은 두짝 세살문과 용자창호의 2중문으로 구성되고, 마루는 네짝 분합문으로 짜여 있다.
집 주위에 담이 둘러싸여 있으며, 사랑채의 출입은 솟을대문을 통하여 남자들이 주로 하며, 측면의 협문은 여자들이 안채에 출입할 때 사용하였다.
이때의 시선 차단을 위하여 출입 통로를 따라 담을 쌓았으며 이러한 것은 공간의 분할을 가져와 전체적으로 폐쇄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후원과 정면의 마당을 넓게 자리잡아 정원을 아주 잘 꾸미고 있어 차라리 개방감을 주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
【비 고】1985년 6월 2일 문화재자료 제59호 지정
가는 길에 주문진 못미쳐 사천 해수욕장으로 진입하여 사천 해수욕장 뒷산에 교산 허균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허균 허난설헌의 외가로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삶을 살다간 허균이 수차의 귀양과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럴때마다 이곳 외가가 있는 마을에 내려와 몸과 마음을 가다 듬었다 합니다.
마을 뒷산은 뱀의 형상이라 하여 "교산"이라 부르는데, 이에서 허균이 호를 삼았다고 합니다. 이곳 교산에 오르니 광활한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저 위쪽으로는 주문진항이 이태리의 나폴리항처럼 아름답게 한 손에 잡힐 듯 합니다.
주문징항에 도착하여 부두를 걸어서 한바퀴 돌다가 어시장에서 오징어회를 한그릇 시켜 입맛을 돋우다가 소주 한잔을 걸치니 여행하는 맛이 절로 납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길을 재촉하여 민박집이 있는 경포호로 내려와 자전거를 한 대 빌려서 한번은 딸아이를 태우고, 또 한번은 아들놈을 태우고 경포호변을 한바퀴 돌아 봅니다. 경포호가 얼마나 넓은지 다리가 뻐근하고 후들후들합니다.
이틀째 타향에서의 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7시 민박집 식당에서 초당순두부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길을 나섭니다. 식당 앞에 해바라기가 아침해를 기다리고 있어 아이 둘을 세우고 사진을 찍고 초당마을을 빠져 나옵니다.
안동시 교2동에 있다는 익원공파 김몽상의 안동김씨 정려를 찾아 보려고 교동 일대를 한바퀴 돌아 보았으나 찾지는 못했습니다. 강릉시 관광안내센터에 물었으나 모른다는 대답이고, 교2동 사무소는 전화가 불통입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안동 김씨 정려(安東金氏旌閭) 【관리번호】210-102-225-040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정려)
【소 재 지】강원도 강릉시 교2동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
【유적내용】
안동 김씨 김몽상의 효자비와 그의 처 강릉 김씨의 열녀비, 김몽상의 아들 김석진의 효자비와 그의 처 강릉 최씨의 열녀비, 그리고 김석진의 아들 김구의 효자비가 보존되어 있어 소위 "삼세 삼효 이열(三世三孝二烈)"의 효열각이다.
김몽상은 충열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죽으로 연명하면서 3년을 시묘하였다.
두 번째는 김몽상의 처 강릉 김씨의 열녀비로, ---생략---
세 번째는 김석진의 효자비로, ---생략---
네 번째는 김석진의 처 강릉 최씨의 열녀비로, ---생략---
다섯 번째는 김구의 효자비로, ---생략---
이와 같은 3효 2열의 행동이 조정에 알려져 순조 7년(1807) 정려가 내려졌다. 현재 비각의 전면에는 "안동 김씨 삼세(安東金氏三世)", "삼효 이열지려(三孝二烈之閭)"의 현판이 게판되어 있고, 비각 내에는 "효열각 행적기(孝烈閣行蹟記)"와 "안동 김씨 효열각 중수기(安東金氏孝烈閣重修記)"가 게판되어 있다.
【참고문헌】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임영의 맥>>
【비 고】
오늘 아침부터 귀경길이 막힌다고 하여 서둘러 고속도로에 진입합니다. 대관령 터널, 진부 터널을 몇 군데를 지나고 또 지나서 한참을 내려와 평창휴게소에서 아이들은 놀이터를 지나칠 수 없고, 나와 아내는 평창의 특산인 송어를 구경하고 있는데, 폭우성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치는 장대비에 엉금엉금 기어 갑니다. 원주 못미쳐 새말IC 부근부터 정체가 되기 시작합니다. 길은 밀리고 장대비는 쏟아지고 마음은 급해지는데, 운전을 하는 아내는 콧노래를 부릅니다. 여름 장마비는 아무리 쏟아져도 마음도 편안해지고 여행하는 기분이 더 난다나요?
원주IC로 나와서 원주시내를 가로질러 내려가다 원주역 광장에 도착합니다. 문숙공 김제갑 충렬탑이 역 앞 광장 도로 한가운데에 빗물을 머금고 우뚝 솟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구경하고 새겨놓은 글도 한참을 읽다가 사진 몇 컷을 찍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립니다.
시간도 없고 비는 쏟아지고, 김제갑 선조의 임진왜란 격전지 영원산성은 들리지 못하고 충북 충주 가는 길로 내려 갑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김제갑 목사 충렬비(金悌甲牧使忠烈碑) 【관리번호】220-122-239-011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원주시 태장 2동(원주역 광장)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
【유적내용】
김제갑 원주 목사의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자는 순초(順初)이고, 호는 의재(毅齋), 본관은 안동이며, 중종 20년(1525)에 나서 선조 25년(1592) 원주에 왜군 삼길성(森吉成)의 부대가 침입하자 의병과 관군을 이끌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이때 둘째 아들 시백(時伯)과 부인도 함께 순절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 영의정에 추존되었고 원주의 충렬사와 괴산의 화엄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행적을 적은 비가 서울에서 원주로 들어오는 길목, 즉 지금의 원주역 뒤 논 가운데 방치되어 있던 것을 수습하여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후원위원회에서 원주역 광장에 비와 탑을 세웠다.
【참고문헌】강원도·원주시·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7, <<원주의 역사와 문화유적>>
【비 고】
양안치재 고개 오르는 길 시작되는 곳에 있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농사 지으며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는 토지문화관에 들러 신문이나 방송에서 수차례나 보았던 박경리의 김매던 밭을 구경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고개길을 오릅니다.
고개를 넘어서자 오른쪽은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 주포리가 이어지고, 왼쪽은 제천시 백운면입니다. 이곳은 경순왕과 그의 공주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상당한 흔적도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귀한 분이 왔다고 해서 지명도 貴來(귀래)라 한다 합니다.
귀래리 동막, 문막 마을을 지나 유현 마을에서는 미륵사 가는 길이 보입니다. 귀리면 소재지에 도착하니 시골스런 면소재지인데, 귀래초등학교, 귀래중학교, 귀래우체국, 귀래면사무소등 마치 경순왕의 옛 직할지나 관할지에 들어선 듯 합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원주 황산사지(原州黃山寺址) 【소 재 지】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산 25-2
황산사의 초창(初創)은 신라 경애왕대(924-926)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경순왕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부왕의 존상을 산정 석벽에 조각케 하였고,
그후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존상을 보고 환경한 후부터 산명을 대왕산(大王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귀한 분이 왔다 하여 동리 이름을 귀래(貴來)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우리 홈 게시판>
경순대왕의 유적기 ---李成休 (광산이씨 종친회장)
경순대왕은 만년에 명산을 유력할 때 제천에 이르러서 별궁을 짓고 뱃재 (拜峙배치)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龍華山(용화산)이 마치 용이 꼬리를 치는 형상이라 그 정상에 올라 암벽에 미륵불을 새기고 그 앞에 高自庵(고자암)을 세웠으며 산 밑에 鶴樹寺(학수사)를 창건하였는데, 대왕은 매일 고자암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뱃재에서 미륵불을 망배하였다고 하며, 이 유적지를 답사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원주 용화산 (현 원주군 귀래면 미륵산)은
원주시 남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경순대왕이 조성한 거대한 미륵불과 고자암, 황산사지 (전 학수사) 등 유적이 1천여년을 전래하면서 현존하고,
---미륵불상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
미륵산 정상 (해발 689m)의 절벽 (높이 15,6m) 에 동향으로 높이 48척의 초대형 미륵을 새겼는데, 코의 길이만 해도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가까이에서는 그 모양을 알아볼 수가 없고, 멀리서 바라 보아야만 형체를 알 수 있다고 하며, 이후 龍華山을 彌勒山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강원도지에는 신라 제13대 미추대왕이 미륵을 만들게 하여 미륵산이 되었다 하나 미상이다.)
---高自庵
대왕은 미륵불 앞 약 1km 거리의 山腹산복(주포리 산 25의2) 에 高自庵 (별지 고자암기 참조)을 세웠으며, 암장에는 대웅전 산신각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1986년 6월 중건을 위하여 퇴락한 원 건물을 철거하였다는 것이며, 현재는 寺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경내에 고려때 작품으로 보인다는 삼층석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과 입구에 부도(이름난 중의 유골을 안치한 둥근 돌탑) 2기가 현존하며
고자암 터에서는 경순대왕의 것으로 보인다는 朔+土像(?상)의 일부와 銅鏡 등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자암에는 경순대왕의 영정각 (뒤에 경천묘) 이 있었는데, 조선조때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眞影과 함께 경상남도 하동에 이봉되었다.
---黃山寺址 (鶴樹寺)
대왕은 또 산 밑 주포리에 원당인 학수사를 창건하였으며, 현재 사찰 건물은 없어지고 寺址만이 남아 있는데 초석 5기가 현존하며, [절안] 또는 [황나절터] 라고도 한다.
고려 중엽에 [黃山居士]가 입산한 후 학수사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民家가 들어서 있다.
2. 堤川
제천에는 대왕의 離宮(別宮)과 東京邸(동경저)의 옛 터가 있고, 또 서쪽에 拜峙(배치)가 있는데
현 제원군 백운면 放學里 591번지 富壽洞에 東京邸(邸宅)의 옛터가 있는데, 현재 수령 1천년 정도의 은행나무 고목 한 그루와 조각된 돌로 만들어진 옹달샘 하나가 현존하여 榮枯盛衰의 無常을 말하여 주고 있다.
동 방학리 650번지 궁뜰 (宮坪-궁이 宮野) 에는 離宮의 옛터가 있는데 그곳 김중식씨 家에 이궁의 것으로 보이는 옛 장대석 4개가 있다.
동 花塘里 서쪽 원주군 귀래면 경계 (대호지 부락에서 서쪽 1km) 에 拜峙(배치)라는 고개가 있다.
[국립지리원 지명유래] 및 [충청북도 전설지]에 의하면 대왕은 미륵산 정상에 미륵불을 새기고 그 아래 고자암에 종을 달게 하여 매일 조석으로 스님을 종을 치게 하였는데
대왕은 배치에 나가 있다가 종소리가 들리면 미륵불을 향하여 望峙하였다고 하며, 이후 후세 사람들이 이 고개를 拜峙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항의 미륵산은 미륵봉을 주봉으로 좌우 12개의 높은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佳景이 많아 탐방객이 수없이 오르내린다고 하며 貴來面의 지명도 貴人(경순대왕)이 온 곳이라 하여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이 원주와 제천 일대는 비운의 경순대왕의 만년의 유적지이자 성역이 분명하며 사적지 지정과 성역화 작업등 보호조치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강원도 원주와 충북 충주의 경계를 넘어 충주시 목계 가흥으로 접어드니 여행 기분도 가시고, 마치 고향에 온 듯 긴장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역시 여행은 먼 곳으로 가야 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여름휴가 가자고 데리고 나와서 맨 유적지만 다녀서 아내와 아이들한테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아무말 없이 잘 따라 다녀서 나도 안 미안한 척, 태연한 척 하고 다녔습니다.
▣ 김항용 - 온 휴가 여정 가운데에 우리 선조님의 유적지를 빠짐없이 챙기고 살피시는 님의 열정과 용의주도함에 감탄했습니다.
▣ 김영윤 - 존경스럽습니다
▣ 郡/김태영 - 너무 수고많으셨습니다.
▣ 김윤만 - 겨자씨 자라나서 큰 나무 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최근 쓰신 글을 엮으면 자연스레 문중유적 순례기가 되는군요.
▣ 김재원 -
▣ 김발용 - 열정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 솔내 영환 - 늘 감탄합니다.
▣ 김정중 - 일상을 떠나서 화~~ㄱ 풀어 버리고 돌아오면 새힘이 나지요!!
▣ 김태서 - 항상 선조님을 생각하시는 열의에 감탄했습니다.
▣ 김은회 - 고맙습니다.
영덕 강구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6시 서둘러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내와 아이 둘을 깨워 길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부산을 떱니다.
나오다 보니 해상공원 전망대에는 해돋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벌써 북적북적 합니다. 지나칠 수 없어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 떠오르는 불덩이를 구경하다가, 해안도로를 타고 영덕---영해---울진---삼척---강릉으로 길을 재촉합니다.
영덕 영해와 관련된 선조님들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김씨의 뿌리 (1998, 범우사)>
영해김씨
시조 김억민(金億敏)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 김은열의 14세손이다.
김억민은 김철(金哲)의 손자다. 김억민은 병조정랑을 거쳐 영해도호부 부사를 역임했다. 연산군때 화를 입어 다시 入北했다. 김억민은 중종7년에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후손들이 김억민이 부사를 지냈던 영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나왔다. 영해(寧海)는 경상북도 영덕의 옛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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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양(金時讓)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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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김성좌(聖佐) (1639~1708)
양좌의 동생이고 호는 송리(松里)이다. 1663년현종 계유(25歲) 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고을을 역임하고 영해부사로 재임중 청백리로 이름이 있었으며 갈암 이현일의 문인이 되었다
만년에는 빙계계곡에 세심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울진을 지나는데 "왕피천 계곡" 표지판이 스쳐갑니다. 경순왕의 큰 아들 마의태자가 거쳐간 곳입니다. 왕피천 계곡을 지나자 마자 바로 그 유명한 울진의 불영계곡 가는 길이 나타납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왕피성지(王避城址) 【소 재 지】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왕피리
신라 말에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자는 부왕에게 그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불가항력으로 부득이 천년사직이 넘어가게 되자 마의(麻衣)를 입고 모후(母后) 송씨와 함께 이 성에 과 있다가 모후는 이곳에서 작고하고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한다.
당시 모후를 따라온 송씨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울진군내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하천 이름도 왕피천으로 신라 망국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삼척 초입부터 길이 막혀 한참을 가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삼척시내에 진입하니 세계동굴엑스포가 열리고 있어 도시 전체가 온통 엑스포 물결입니다.
가야할 길이 멀어 엑스포는 포기하고 죽서루나 보려고 하였으나 죽서루가 엑스포 행사장 내에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아쉽지만 그냥 지나칩니다.
관광지도를 보니 삼척시와 동해시 경계인 미로면에 충렬공 할아버지의 글이 실려있는 동안거사집을 지은 고려시대 이승휴의 유허지 천은사가 표시되어 있고, 태서 종친님께서 우리 게시판에 소개한 집성촌 가운데 이곳의 근덕면 교가리 지명이 보입니다.
<우리 홈 게시판>
죽서루의 가객 심동로 - 은회 종친님
당시에 척약재 김구용(金九容)이 안사가 되어 삼척에 왔을 때 심동로를 찾아와서 그가 거처하는 집을 방문하여 심동로의 호인 "신재"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편액으로 그의 집에 걸어주었습니다. 이처럼 삼척으로 오는 많은 관원들은 반드시 심동로를 찾아와서 나라 일을 함께 논하고 시를 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솔내 영환 - 신재 심동로와 척약재 선조님과는 절친한 사이이셨던 듯 싶습니다. 연령상르로는 10여세이상 차이 나지만 학문적으로 서로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이이셨습니다. 척약재께서 성균관 직강에서 강릉도 안렴사(현재의 도지사)로 나가시었을때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뮨집에도 삼척과 관계되는 시가 여러편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실려 있습니다.
<우리 옛글 백가지, 1997, 한일사>
관동별곡에 대한 소감 (關東別曲序) ---김득신
지난 정축년 (=1637년, 병자호란 다음 해에 청에 항복) 전쟁이 끝난 뒤에 나는 관동을 실직(=삼척의 옛 이름)에서 노닌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그 지방의 젊은 기생 한 사람이 이 관동별곡을 매우 잘 불러 늘 그를 竹樓(=?삼척 죽서루) 에 불러다 놓고 노래를 시켰다.
그러면 나의 감흥이 고조될 뿐만아니라 詩文에 대한 상상도 넓어짐을 느꼈었다. 참으로 훌륭한 노래였다.
오후 4시가 다 되어 강릉에 도착하여, 경포호 뒷 마을 초당마을 내에 있는 식당겸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허균 허난설헌 생가를 찾아 갑니다.
화창하고 작렬하는 한여름 햇빛 속에 주위에 울창한 송림 속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는 생가를 두루 살펴보고 주문진항으로 길을 재촉합니다. 생가 초입에 허균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의 건립인사 명단에 김민회 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누군지 궁금하나 알 수 없습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강릉 이광로 가옥(江陵李光魯家屋) 【관리번호】210-120-360-046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59호 【유적종류】고가(민간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3/2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개인(이광로)
【유적내용】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며,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3칸의 광이 있고, 좌측으로는 행랑방과 마구간이 있는 대문간 채를 지나면 잘 다듬어진 정원과 함께 사랑채가 나타난다.
팔작기와지붕으로 전면에 툇마루가 있고, 대청 2칸을 우측에 두고 있다. 사랑채의 좌측 끝은 상 노인방으로 안채 출입문간에서도 출입이 가능하게 하였고, 협문과 공간을 구분하는 담을 전면에 가지고 있다.
사랑 대청은 창호로 둘러싸여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정으로 하고 상부의 판대공과 대들보는 툇간만큼 전면으로 돌출되면서 노출되어 있어 구조적인 미를 풍기고 있다.
안채는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되어 있다. 부엌, 방, 마루로 되어 있으며 부엌의 출입구는 사각으로 연결되어 미닫이문을 내고 있으나 근래에 수리를 한 듯하다.
안채 방은 두짝 세살문과 용자창호의 2중문으로 구성되고, 마루는 네짝 분합문으로 짜여 있다.
집 주위에 담이 둘러싸여 있으며, 사랑채의 출입은 솟을대문을 통하여 남자들이 주로 하며, 측면의 협문은 여자들이 안채에 출입할 때 사용하였다.
이때의 시선 차단을 위하여 출입 통로를 따라 담을 쌓았으며 이러한 것은 공간의 분할을 가져와 전체적으로 폐쇄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후원과 정면의 마당을 넓게 자리잡아 정원을 아주 잘 꾸미고 있어 차라리 개방감을 주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
【비 고】1985년 6월 2일 문화재자료 제59호 지정
가는 길에 주문진 못미쳐 사천 해수욕장으로 진입하여 사천 해수욕장 뒷산에 교산 허균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허균 허난설헌의 외가로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삶을 살다간 허균이 수차의 귀양과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럴때마다 이곳 외가가 있는 마을에 내려와 몸과 마음을 가다 듬었다 합니다.
마을 뒷산은 뱀의 형상이라 하여 "교산"이라 부르는데, 이에서 허균이 호를 삼았다고 합니다. 이곳 교산에 오르니 광활한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저 위쪽으로는 주문진항이 이태리의 나폴리항처럼 아름답게 한 손에 잡힐 듯 합니다.
주문징항에 도착하여 부두를 걸어서 한바퀴 돌다가 어시장에서 오징어회를 한그릇 시켜 입맛을 돋우다가 소주 한잔을 걸치니 여행하는 맛이 절로 납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길을 재촉하여 민박집이 있는 경포호로 내려와 자전거를 한 대 빌려서 한번은 딸아이를 태우고, 또 한번은 아들놈을 태우고 경포호변을 한바퀴 돌아 봅니다. 경포호가 얼마나 넓은지 다리가 뻐근하고 후들후들합니다.
이틀째 타향에서의 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7시 민박집 식당에서 초당순두부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길을 나섭니다. 식당 앞에 해바라기가 아침해를 기다리고 있어 아이 둘을 세우고 사진을 찍고 초당마을을 빠져 나옵니다.
안동시 교2동에 있다는 익원공파 김몽상의 안동김씨 정려를 찾아 보려고 교동 일대를 한바퀴 돌아 보았으나 찾지는 못했습니다. 강릉시 관광안내센터에 물었으나 모른다는 대답이고, 교2동 사무소는 전화가 불통입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안동 김씨 정려(安東金氏旌閭) 【관리번호】210-102-225-040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정려)
【소 재 지】강원도 강릉시 교2동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
【유적내용】
안동 김씨 김몽상의 효자비와 그의 처 강릉 김씨의 열녀비, 김몽상의 아들 김석진의 효자비와 그의 처 강릉 최씨의 열녀비, 그리고 김석진의 아들 김구의 효자비가 보존되어 있어 소위 "삼세 삼효 이열(三世三孝二烈)"의 효열각이다.
김몽상은 충열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죽으로 연명하면서 3년을 시묘하였다.
두 번째는 김몽상의 처 강릉 김씨의 열녀비로, ---생략---
세 번째는 김석진의 효자비로, ---생략---
네 번째는 김석진의 처 강릉 최씨의 열녀비로, ---생략---
다섯 번째는 김구의 효자비로, ---생략---
이와 같은 3효 2열의 행동이 조정에 알려져 순조 7년(1807) 정려가 내려졌다. 현재 비각의 전면에는 "안동 김씨 삼세(安東金氏三世)", "삼효 이열지려(三孝二烈之閭)"의 현판이 게판되어 있고, 비각 내에는 "효열각 행적기(孝烈閣行蹟記)"와 "안동 김씨 효열각 중수기(安東金氏孝烈閣重修記)"가 게판되어 있다.
【참고문헌】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임영의 맥>>
【비 고】
오늘 아침부터 귀경길이 막힌다고 하여 서둘러 고속도로에 진입합니다. 대관령 터널, 진부 터널을 몇 군데를 지나고 또 지나서 한참을 내려와 평창휴게소에서 아이들은 놀이터를 지나칠 수 없고, 나와 아내는 평창의 특산인 송어를 구경하고 있는데, 폭우성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치는 장대비에 엉금엉금 기어 갑니다. 원주 못미쳐 새말IC 부근부터 정체가 되기 시작합니다. 길은 밀리고 장대비는 쏟아지고 마음은 급해지는데, 운전을 하는 아내는 콧노래를 부릅니다. 여름 장마비는 아무리 쏟아져도 마음도 편안해지고 여행하는 기분이 더 난다나요?
원주IC로 나와서 원주시내를 가로질러 내려가다 원주역 광장에 도착합니다. 문숙공 김제갑 충렬탑이 역 앞 광장 도로 한가운데에 빗물을 머금고 우뚝 솟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구경하고 새겨놓은 글도 한참을 읽다가 사진 몇 컷을 찍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립니다.
시간도 없고 비는 쏟아지고, 김제갑 선조의 임진왜란 격전지 영원산성은 들리지 못하고 충북 충주 가는 길로 내려 갑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김제갑 목사 충렬비(金悌甲牧使忠烈碑) 【관리번호】220-122-239-011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원주시 태장 2동(원주역 광장)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
【유적내용】
김제갑 원주 목사의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자는 순초(順初)이고, 호는 의재(毅齋), 본관은 안동이며, 중종 20년(1525)에 나서 선조 25년(1592) 원주에 왜군 삼길성(森吉成)의 부대가 침입하자 의병과 관군을 이끌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이때 둘째 아들 시백(時伯)과 부인도 함께 순절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 영의정에 추존되었고 원주의 충렬사와 괴산의 화엄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행적을 적은 비가 서울에서 원주로 들어오는 길목, 즉 지금의 원주역 뒤 논 가운데 방치되어 있던 것을 수습하여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후원위원회에서 원주역 광장에 비와 탑을 세웠다.
【참고문헌】강원도·원주시·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7, <<원주의 역사와 문화유적>>
【비 고】
양안치재 고개 오르는 길 시작되는 곳에 있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농사 지으며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는 토지문화관에 들러 신문이나 방송에서 수차례나 보았던 박경리의 김매던 밭을 구경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고개길을 오릅니다.
고개를 넘어서자 오른쪽은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 주포리가 이어지고, 왼쪽은 제천시 백운면입니다. 이곳은 경순왕과 그의 공주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상당한 흔적도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귀한 분이 왔다고 해서 지명도 貴來(귀래)라 한다 합니다.
귀래리 동막, 문막 마을을 지나 유현 마을에서는 미륵사 가는 길이 보입니다. 귀리면 소재지에 도착하니 시골스런 면소재지인데, 귀래초등학교, 귀래중학교, 귀래우체국, 귀래면사무소등 마치 경순왕의 옛 직할지나 관할지에 들어선 듯 합니다.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원주 황산사지(原州黃山寺址) 【소 재 지】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산 25-2
황산사의 초창(初創)은 신라 경애왕대(924-926)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경순왕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부왕의 존상을 산정 석벽에 조각케 하였고,
그후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존상을 보고 환경한 후부터 산명을 대왕산(大王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귀한 분이 왔다 하여 동리 이름을 귀래(貴來)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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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대왕의 유적기 ---李成休 (광산이씨 종친회장)
경순대왕은 만년에 명산을 유력할 때 제천에 이르러서 별궁을 짓고 뱃재 (拜峙배치)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龍華山(용화산)이 마치 용이 꼬리를 치는 형상이라 그 정상에 올라 암벽에 미륵불을 새기고 그 앞에 高自庵(고자암)을 세웠으며 산 밑에 鶴樹寺(학수사)를 창건하였는데, 대왕은 매일 고자암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뱃재에서 미륵불을 망배하였다고 하며, 이 유적지를 답사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원주 용화산 (현 원주군 귀래면 미륵산)은
원주시 남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경순대왕이 조성한 거대한 미륵불과 고자암, 황산사지 (전 학수사) 등 유적이 1천여년을 전래하면서 현존하고,
---미륵불상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
미륵산 정상 (해발 689m)의 절벽 (높이 15,6m) 에 동향으로 높이 48척의 초대형 미륵을 새겼는데, 코의 길이만 해도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가까이에서는 그 모양을 알아볼 수가 없고, 멀리서 바라 보아야만 형체를 알 수 있다고 하며, 이후 龍華山을 彌勒山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강원도지에는 신라 제13대 미추대왕이 미륵을 만들게 하여 미륵산이 되었다 하나 미상이다.)
---高自庵
대왕은 미륵불 앞 약 1km 거리의 山腹산복(주포리 산 25의2) 에 高自庵 (별지 고자암기 참조)을 세웠으며, 암장에는 대웅전 산신각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1986년 6월 중건을 위하여 퇴락한 원 건물을 철거하였다는 것이며, 현재는 寺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경내에 고려때 작품으로 보인다는 삼층석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과 입구에 부도(이름난 중의 유골을 안치한 둥근 돌탑) 2기가 현존하며
고자암 터에서는 경순대왕의 것으로 보인다는 朔+土像(?상)의 일부와 銅鏡 등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자암에는 경순대왕의 영정각 (뒤에 경천묘) 이 있었는데, 조선조때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眞影과 함께 경상남도 하동에 이봉되었다.
---黃山寺址 (鶴樹寺)
대왕은 또 산 밑 주포리에 원당인 학수사를 창건하였으며, 현재 사찰 건물은 없어지고 寺址만이 남아 있는데 초석 5기가 현존하며, [절안] 또는 [황나절터] 라고도 한다.
고려 중엽에 [黃山居士]가 입산한 후 학수사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民家가 들어서 있다.
2. 堤川
제천에는 대왕의 離宮(別宮)과 東京邸(동경저)의 옛 터가 있고, 또 서쪽에 拜峙(배치)가 있는데
현 제원군 백운면 放學里 591번지 富壽洞에 東京邸(邸宅)의 옛터가 있는데, 현재 수령 1천년 정도의 은행나무 고목 한 그루와 조각된 돌로 만들어진 옹달샘 하나가 현존하여 榮枯盛衰의 無常을 말하여 주고 있다.
동 방학리 650번지 궁뜰 (宮坪-궁이 宮野) 에는 離宮의 옛터가 있는데 그곳 김중식씨 家에 이궁의 것으로 보이는 옛 장대석 4개가 있다.
동 花塘里 서쪽 원주군 귀래면 경계 (대호지 부락에서 서쪽 1km) 에 拜峙(배치)라는 고개가 있다.
[국립지리원 지명유래] 및 [충청북도 전설지]에 의하면 대왕은 미륵산 정상에 미륵불을 새기고 그 아래 고자암에 종을 달게 하여 매일 조석으로 스님을 종을 치게 하였는데
대왕은 배치에 나가 있다가 종소리가 들리면 미륵불을 향하여 望峙하였다고 하며, 이후 후세 사람들이 이 고개를 拜峙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항의 미륵산은 미륵봉을 주봉으로 좌우 12개의 높은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佳景이 많아 탐방객이 수없이 오르내린다고 하며 貴來面의 지명도 貴人(경순대왕)이 온 곳이라 하여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이 원주와 제천 일대는 비운의 경순대왕의 만년의 유적지이자 성역이 분명하며 사적지 지정과 성역화 작업등 보호조치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강원도 원주와 충북 충주의 경계를 넘어 충주시 목계 가흥으로 접어드니 여행 기분도 가시고, 마치 고향에 온 듯 긴장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역시 여행은 먼 곳으로 가야 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여름휴가 가자고 데리고 나와서 맨 유적지만 다녀서 아내와 아이들한테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아무말 없이 잘 따라 다녀서 나도 안 미안한 척, 태연한 척 하고 다녔습니다.
▣ 김항용 - 온 휴가 여정 가운데에 우리 선조님의 유적지를 빠짐없이 챙기고 살피시는 님의 열정과 용의주도함에 감탄했습니다.
▣ 김영윤 - 존경스럽습니다
▣ 郡/김태영 - 너무 수고많으셨습니다.
▣ 김윤만 - 겨자씨 자라나서 큰 나무 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최근 쓰신 글을 엮으면 자연스레 문중유적 순례기가 되는군요.
▣ 김재원 -
▣ 김발용 - 열정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 솔내 영환 - 늘 감탄합니다.
▣ 김정중 - 일상을 떠나서 화~~ㄱ 풀어 버리고 돌아오면 새힘이 나지요!!
▣ 김태서 - 항상 선조님을 생각하시는 열의에 감탄했습니다.
▣ 김은회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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