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김사형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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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8-12 19:44 조회1,572회 댓글0건본문
김사형 신도비(金士衡 神道碑)
충혜왕 2년(1333)∼태종 7년(1407).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중찬(中贊) 방경(方慶)의 고손.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순(恂)의 증손.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의 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천의 자.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내다가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3년(1377)에 사헌부집의에서 조준(趙浚)등과 함께 대간직에 이르러 당시 명관의 칭송을 받았다.
그후 개성윤(開城尹)에서 보리공신(補理功臣)에 책록되고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 도관찰 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出陟使)로 나갔고, 공양왕 2년(1390)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付事)로 승진되었다. 1390년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鄭夢周)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뒤에 삼사우사(三司右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1392년에 여러 장상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였다. 이로써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배수되고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 조선개국의 논공(論功)에서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문하시중에 제수되었으며,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태조5년(1396)에는 좌정승으로써 오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러 갔다가 다음해 정월에 환도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난 때는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장자에게 선위(禪位)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종(定宗)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일등에 책봉되었다. 정종1년(1399)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고, 1401년 다시 좌정승이 되었다가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지낸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익원(翊元)이다. 묘소는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49번지에 있으며 사당도 그곳에 있다. 신도비는 묘소 입구도로변에 있는데 비문은 이우면이 지었고 김리화가 글씨를 썼고 김성묵이 전을 썼다. 비의 규모는 높이 264㎝, 폭 67㎝, 두께 35㎝이다.
▣ 김재원 -
▣ 솔내 영환 -
▣ 김발용 - 잘 보았습니다.
▣ 김재익 -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郡/김태영 - 잘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김윤만 -
▣ 김정중 -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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