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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고운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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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2-08-13 07:17 조회1,5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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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me3_pic01.gif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 고운사와 최치원

me3_pic02.gif고운사 가운루.
고운사의 얼굴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누각이 가운루이다.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산과 구름을 접하는 신선의 세계가 펼쳐진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681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현재까지 경북 북부 지방의 중심 가람으로서 전통을 자랑하고, 가람 건축의 짜임새도 뛰어난 곳이다.
의상대사 창건설 말고도 신라말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져서 더욱 이채롭다. 전설인즉, 고운 최치원이 여지, 여사라는 두 스님과 이 곳에 와서 가허루(駕虛樓)와 우화루(羽化樓)라는 두 누각을 건립하였고, 이 때부터 최치원의 호를 좇아 고운사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풍류도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풍류도란 신라 화랑들과 같이 산천을 찾아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자연을 숭상하는 수행법이자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다. 당대의 대 지성이요, 풍운아였던 최치원이 언제 죽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가야산에서 산신이 되었다는 설이 풍미했을 정도로 신선도나 도교의 성인에 가까웠다.
최치원과 밀접한 인연을 간직한 고운사는 도교적 이미지로 가득한 절이다. 뒷산의 명칭도 뭉게구름을 뜻하는 등운산이고, 최치원이 세웠다는 가허루나 우화루 역시 도교의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체들을 뜻한다. 물론 도교 또는 풍류도의 도사가 불교 사찰을 창건했다는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단지, 이 땅의 산세가 신선이 노닐만한 선경이라는 점,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신라말에 최치원과 관계가 되었기에 형성된 창건 연기가 아닐까.
가허루는 현재 가운루(駕雲樓)로 바뀌었고, 우화루는 우화루(雨華樓)로 이름이 바뀌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계곡 위에 지은 집, 아직도 생생합니다.
▣ 郡/김태영 - 동국18현의 한분이시죠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발용 -
▣ 솔내 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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