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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紫隱) 김봉종(金鳳鍾) 선생 유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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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2-08-13 09:00 조회1,9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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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예와 의를 숭상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람적한 품성에 효우와 목족을 소임으로 삼았다.

세속에 영리를 멀리하고 문자질을 가르치며 눌언민행으로 세업을 일으키고

구추향년을 맑고 허물없이 살다가신 어른이 여기에 계시다.

공의 휘는 봉종이요 자는 원서이며 호는 자은이다.

성은 김씨로 안동이 관향이니 선세는 신라종성이다.



고려조에 출장입상의 훈업으로 알려진 충렬공 휘 방경은 중시조요

조선조에 휘 자첨은 전조명신 후손의 예우로 감목관의 벼슬이 내렸으나 사양하고

안동 회곡에서 가족을 이끌고 의성의 북쪽 사촌에 존거하였다.

아드님 효온은 문과 직장이요

아드님 극해는 문과에 급제하여 주현을 역임하고 북평사에 올랐으며 청백으로 알려졌다.

휘 광수를 낳으시니

호가 송은이며 일찌기 태학에서 공부하였으나

연산의 정란을 예견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며 후진을 기르는데 힘쓰고 장대서원에 제향되어졌다.

증손 휘 사원은 호가 만취당으로 부호군을 역임하고

퇴계문하에 들어가 도산의 월란암에서 수학하였으며 후산사에 제향되었다.

아드님 휘 준은 직장을 지냈으며 다섯아들을 두었다.

셋째 휘 상각은 호가 자여당이요

여러대를 지나 휘 종저는 호가 갈암으로 대산 이상정 선생을 사사하였다.

증조에 휘는 양형이요 호는 삼구당이고

조의 휘는 석유이니 호는 기산이며

정제 유치명 선생에게 수학하여 경학과 문장이 높아 사우의 추앙을 받았으며 유고5권을 남겼다.

고는 통덕랑 수홍이며 비는 공인 밀양박씨이니 사인 태영의 따님이다.



공은 1878년 고종무인 9월12일에 사촌리의 본가에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자질이 슬기롭고 총명하며 효우는 타고난 천성이였다.

일곱 살에 글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집중력이 있고 침착하였다.

여덟살에 재종형 운산 상종공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꾸중이나 독려없이 스스로 해득하니 모두들 장래가 촉망된다고 하였다.

성장하여서는 백가의 서적을 모으고 밤낮으로 심독하며 저술에도 능한지라 문부로의 칭상이 있었다.

이로부터 성문이 날로 더하여 향린의 추앙을 받았으며

사진고리의 들난 선비라고 일컬었다.

어느날 밤 백씨 자산공이 말해 가로되

"연로한 양친을 모시는 것은 나의 소임이니 군은 학문에 전념하여 가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면려하여 경사전서를 일야정독하였다.

선부군 병환에는 시탕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담이의 정성을 다하였고

상을 당하여는 슬픔 가운데 예를 지키고

거처하는 점석에는 눈물의 흔적이 마르지 않았다.



1910년 경술의 가을에 문득 종사가 일제에 강점되자 강개한 심회를 달래지 못하였다.

가로되 "나라잃고 임금없는 백성이 살아서 무엇하랴"하고 슬퍼하였으나

위로는 노모와 백형이 계신지라 마침내 순국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드디어 문을 닫고 세사에 참여없이 생활하던 중에

어머님 상을 당하고 양상의 절차는 가례에 어긋남이 없었다.

돌아 보건데 공이 분가할 당시 가세는 씻은 듯하여

다만 질그릇과 수저뿐 이었으나 원망하거나 탓하지 아니하고 근검을 신조로 주경야독하였다.

세월이 흘러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백씨을 부모처럼 섬기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0년 남북상잔의 전란으로 대소댁의 가산이 병화에 잿더미가 되었으나

안연히 개의치않고 전답을 나누어 대댁부조의 위전으로 공하니

사람들은 공의 처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만년에는

정갈한 사랑방에 사숙을 열고 직경청학의 문자질을 설과개후하면서

종족위당에 목연하고 평거접인의 화순하였다.

평생토록 남의 개예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문친자질의 허물이 있으면 은밀히 불러 의리로 지도하니

향인 모두들 고인에 버금간다 말하였다

평소에는 겸허로 자처하고 담해로 자청하며 지구현사와 시문으로 상주하는 중에

장갈의 묘와 서기잡저의 문호가 적지 아니 있었음에도 경인 병란에 거의가 없어졌다.

다만 왕고 기산공의 유고5책은 온전하게 보전하였으니 어찌 거룩하지 아니한가.



1969년 기유 초겨울의 어느날

우연히 병을 얻어 위중함에 자질을 모아놓고 순순히 말씀하시기를

"일생일사는 인세의 상정이라 인력의 미칠바가 아니다

다만 왕부의 유고간행은 백씨의 경영위술을 물려받았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고 임사의 지경에 이르니 태산같이 무거운 죄 어이하며 돌아가서

왕부의 영을 대할 면목이 없다 너희들은 이일을 도성하라"하고

다시 말해 가로되

"백범사 잠시라도 방심치 말고 근검으로 수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홀연히 선화 하니 그해 12월 초삼일이다



망백의 천수를 누렸음에도 신색이 평온하고 신지근지하였다.

사람들은 산수양근이라 하고 종당에서는 구덕애몰의 문운을 한스러워 했다.

월촌의 뒷산 낭곡서록 양좌에 안장하였다

배는 안동권씨로 동만의 따님이고 묘는 매봉산 유좌이다

계배 안동권씨는 한명의 따님이니 3녀를 길렀고 묘는 낭곡양좌의 공과 동원이다.

무사로 종형 영종의 자 호달로 입승하였으며 따님은 의성 김두대이니 증판서 진의 후요

영천 이춘식은 판서 의발의 후요 진성 이용두는 율원 홍의 후이다.

호달의 자는 윤수 명수요 여는 문화 유재하 진성 이한정 밀양 손현주 은율 송병주이다.

두대의 남은 상길이며 춘식의 남은 병도 병완 병율 병철이고 용두의 남은 회원 회문 회박 회승이다.

윤수의 남은 태대이고 내외손이 많기에 기록을 줄이다.



1963년 계묘에 문하족질 호문공에 위해 추모학계가 수성되고

정사유월에 삼종손 기수공의 행록이 이루어졌으며

갑자에는 문소 김용대공의 갈문을 받고 수계의 여자로 묘비를 세웠다



신사 계회의 발의로 유초를 궤집하여 간행코자 함에 만시의 한인들 어이없으랴

간역의 임원 여러분이 자옹의 기선을 보공하고자 유사를 명촉하는지라

잔식의 임이 아닌줄 알면서도

소자의 동유시절 몽학을 훈해받을 당시 듣고 본 바를 지금에 추상한다.



차홉다 정수 개결한 의표와 희로무형의 근엄과

자량공검의 자성과 박보경사의 남축과 불근화자의 검약이 족히 고인과 다를바 없었다.

이제 공이 서세하신지 책유3년이 지난 오늘 행록을 살펴 약간의 책보로

삼가 유사를 서술한다.



2001년 신사 수월 일 족손 창회 근선





구한말에 태어나셔서 격동의 세월을 살다 가신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의 모습이 그려진 글을

여기에 올림으로

오늘의 분주한 일상에 쫒기는

우리의 모습을 뒤 돌아 보고자 합니다(올린이 註)



(오탈자 발견시 수정 하겠습니다.한자로 나타내야 뜻을 제대로 알수 있는데 아쉽습니다)









▣ 김재원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 솔내 영환 - 근세 선비의 참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 김윤만 - 잘 읽고 새겨보았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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