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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7) 나의 自敍小傳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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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영환 작성일02-08-14 17:58 조회1,5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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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自敍小傳 -2





당시 내 선친께서는 비록 가난 때문에 별 도리 없이 서당 훈장노릇을 할지언정 내심 생활이



웬만하다면 나를 신학문을 익히게 하기 위해 학교교육을 시킬 심산이셨던 것 같다.



하루는 면소재지인 청천의 보통학교에 나를 데리고 가서 입학을 시켜 주었다. 막상 학교라는



곳에 입학은 했지만 그 지겨운 가난 탓으로 교과서는커녕, 월사금 (수업료) 도 몇 달씩 거르기가



예사였다.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가지고 다니는 것은 물론, 소위 보릿고개 춘궁기에는 하루에 묽은 죽 한



끼니만으로 지탱하는 형편인지라 미이라처럼 여윈 허약체질로 말미암아 결석 투성이요,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이었다.



친구들로부터 결석대장이란 별명까지 듣게 되니 민망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보통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진급을 하던 때, 교과서와 참고서를 못 사보게 되니 어린 마음의



고통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버님이나 어머님께 아무리 보채고 졸라 보아도 무일푼이라



도리가 없었다.



그때의 어린 나의 생각에도 어째서 우리 부모는 저다지도 주변머리가 없나 싶어 안타깝다기



보다는 오히려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결국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어 학교를 집어치우고 외지로 가출(도망)할 궁리를 골똘히



하고 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는 버럭 언성을 높이며 하신다는 말씀이



"네 이놈! 학교는 무슨 말라 비틀어진 학교냐! 한문만 배워도 뭐고 다 할 수 있다. 학교는 집어치우고



내일부터 한문이나 배워라. 너는 무진(戊辰)생에 천복(天福)생이 띄었고 재질도 출중하게 타고났으니



그놈의 왜놈들이 가르치는 학교를 아니 가도 달통(達通)할 수 있느니라. 그래서 네 이름을 사달(思達)



이라 지은 게 아니냐"



말씀치고는 황당하고 비약적이요, 글자 그대로 牽强附會(견강부회)가 아닌가?



아버님의 그 얄미운 변덕에 나는 머리끝까지 얼마나 화가 곤두섰던지 부엌으로 뛰어들어 아궁이에서



타고 있던 장작불을 들고 나와 헛간 추녀에 불을 지르고야 말았다.



때는 1939년 4월! 춘삼월 봄바람에 번개같이 순식간에 불이 타오르는데 다행히 이웃사람들의



출동으로 불은 껐지만 나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부모님께 불효한 것을 뉘우쳐



어린 가슴이 메어지도록 한없이 흐느끼고 슬퍼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하룻밤 사이에 급기야 이웃 동네인 아차실(武陵里)이라는 곳에 사는 伯父님 댁에



알려져서 그 사건 이후에는 학비 일체를 사촌형이 대어 주기로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고향에 사는촌로( 村老)들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고 그 엄청난 행동에 혀를 내두르며 화제 거리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당시의 내 사촌형 사열(思烈)은 청천 금융조합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매달 학비를 타기 위해 그 조합



문턱으로 들어가기란 죽기보다도 싫었다.



이때부터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미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일종의 미분화된



반항심이랄까. 비뚤어진 콤플렉스가 나의 순진한 가슴을 멍들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도시학교에 다니는 것이 고역이요, 배움에 대한 의욕이나 흥미 따위가 없어졌던 것 같다.



나의 궁색해 빠진 가난한 주제가 친구들 보기에 창피해서도 그렇거니와 설상가상으로 저주스러운



염병 (장티푸스)를 앓았던 것이다. 4학년 1학기말쯤 하여 온 동네에 장티푸스가 만연하였다.



우리집 식구도 한차례 몸져눕기 시작하여, 나도 예외 없이 걸리게 되었는데, 하루는 주재소



(지금의 지서)의 순사부장(지서주임)과 의생(醫生,) 그리고 순사들과 면직원들이 우리 동네에 검진



(檢診)을 나왔다.



가가호호를 두루 돌아다니다 결국 우리차례가 되어 그들은 우리집 앞마당에 들어섰다.



열이 펄펄나서 마루에서 딍굴고 있는 나에게 똘로 나와 서 보라는 것이 아닌가? 어린 나에이 겁에



질린 나는 엉겁결에 허겁지겁 뜰로 내려서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얼굴이 넓쩍하고



검은바탕의 눈이 부리부리한 겁에 질린 모습에 의생이라는 사람이 다짜고짜로 내 입을 벌리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엉겁결에 멍하고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소위 의생씨가 내뱉는 투로



한다는 소리가



"야 이녀석아! 아가리 좀 벌려 봐!" 하고 버럭 호통을 쳤다.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려



보였다. 그랬;더니 다음에는 또, "임마, 혓바닥 좀 빼 보여!" 나는 슬며시 짜증이 나고 울화가



북받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혀룰 멀찌감치 10미터쯤이나 떨러져서 보던 의생씨는 순사부장이란



일본 사람을 돌아 보며 한다는 말투가 " 이것들도 모두가 염병입니다." 하고 일본말로 지껄였다.



그리고는 못 볼 것이나 보았다는 듯이 사립문쪽으로 총총걸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수작에 약이



바싹 오른 나는, "아니 의생인지 개나발인지 뭐 그래! 아가리만 벌려 보고 혀만 보면 염병인지 땜병인지



아나? 생판 바가야스다지다(바보새끼들아)"라고 쏘아 붙였더니 그 일행 중의어느 한 일본 순사가



[바가야쓰다찌]란 욕지거레 귀가 거슬렀던지 나를 노려보며, "이 새끼, 무엇을 건방지게 욕지거리를



씨부리느냐!"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오냐, 이때다 하고 그들 쪽으로 내달으며, "약도 없는 주제에 무엇을 씨부려? 우리집



염병이나 옮아 가거라! 이 개새끼들아"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가래침을 마구 뱉어댔다.



내가 이렇게 발악을 하며 쫓아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내게 잘못 부딪혔다가는 진짜 무서운



염병에 걸리는 줄만 알았던지 일행들은 [아이고, 오금아 날 살려사] 하는 듯 혼비백산하여



줄행낭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욕지거리를 마구 퍼부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당시 세상에 다시 없는 독종이요,



소위 욕지거리대장이라는 악명을 듣게 되었다.



이런일이 있은 이후로 나는 그 의생이라는 작자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 멍텅구리로만



생각이 되었다.



나는 그 방자하기 이를데 없는 의생을 근본적으로 경멸한 나머지 나도 앞으로 의학을 공부해서



그 따위 엉터리 의생이 아니라, 병들어 고생하는 환자들을 진심으로 고쳐주는 훌륭한 의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장티푸스를 두 달이나 앓고 일어나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중대가리가 되었을 뿐더러 병후에 해골만



남은 빌빌거리는 몸으로 학교를 다니기가 더욱 난처하게만 되었다.



그리하여 5학년 2학기에 가서야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럭저럭 6학년의 과정을 마치었다.



그러나 개머루 먹듯한 공부였지만 학과 성적만은 다른 아이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맨발로 뛰어다녔다. 늦가을 찬 서리가 하얗게 산골길을 덮어도



맨발에 짚신을 신고 아침 햇살에 일찍 녹은 길섶 잔디 위를 골라 밟으며 걸어다녀야 했다.



학급에서는 익살과 유머로 급우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했는데, 심지어는 졸업 앨범에까지도



나의 익살떠는 모습을 담을 정도였다.



나는 그렇듯 가난하고 불우하면서도 친구들 앞에서는 내 어두운 그림자를 나타내는 일이 없었고



언제나 쾌활하고 명랑하였다.



그러나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하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이슬처럼 맺혀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외롭고 어두운 그림자가 어린 내 마음을 한없이 우울하게 하였다.



국민학교 6학년만을 마친 나는 불타는 향학의 소망을 여지없이 불살라 버린 채, 집안에 틀어박혀



애만 태우고 있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郡/김태영 - 서봉 김사달 선조님 면면을 알것 같군요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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