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9) 나의 自敍小傳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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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08-17 17:43 조회2,273회 댓글0건본문
나의 自敍小傳 -5
그후 나는 1947년 8월에 문광국민학교에서 청주사범부속초등학교 교사로 영전하였다. 당시
도내 국민학교 교사들 중에서 전공분야에 대한 연구업적이 뚜렷하고 교수법 등이 출중할 뿐아니라
장래 교사가 될 교생(敎生)을 실습시킬 만한 능력 있는 우수교사만이 사범부속교사가 될 수 있는데,
불과 20세의 약관(弱冠)으로 영전을 한 셈이다.
이 사범부속 재직시에도 불철주야 공부한 결과 대학검정고시 전과목에 합격했다.
나는 사범부속 재적 2년만에 다시 상경(1949)하여 서울재동교로 부임했고,
1950년 6.25동란 이후에는 청주 세광중고등학교 교사로 전전하면서도 晝敎夜讀(주교야독),
그야말로 敎不倦 學不厭 (교불권 학불염)의 지칠줄 모르는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나는 대학검정고시 합격으로써 그 학력을 법적으로 획득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대학과정의
전문지식을 이해 흡수할 만한 확실한 기초실력을 배양했다는 것을 내 스스로 확인한 셈이다.
고등학교 과정의 전 과목을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마스터한 다음에야 나는 본격적인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의학은 자연과학 중에서도 생명과학에 속하기 때문에 의학을 순전한 독학이나 고학으로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초지(初志)를 굽힐 수가 없어 기어코 그 관문에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낮에는 교편을 잡고 밤을 지새우며 우선 의사자격 검정시험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검정에 합격(1949.6)한 직후부터 의사시험을 준비한 것이다.
매일 평균 4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을 수험준비에 안배하려 하였으나 낮에는 직장에서
시간을 빼앗기는 결과가 되어 하루평균 8, 9시간 밖에 짜낼 수가 없었다.
거의 2년 동안이나 강행군을 하니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고 60kg이던 체중이 48kg 정도로
줄어들어 글자 그대로 皮骨相接(피골상접)의 미이라와도 같은 말라깽이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나를 마치 폐결핵인양 오인하여 접근을 극도로 꺼리는 눈치였고, 내가 호감을 가졌던
사람마저 경원(敬遠)하게 되니 그 당시의 심적인 고통을 어떠하였겠는가?
내가 의사고시를 너무 소흘히 보고 덤벼든 것이 과한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빨라야 6,7년, 적어도 10여 년을 해야만 겨우 합격이 된다는 어려운 난관을 불과 2,3년에 해
치우겠다는 생각이었으니 곰처럼 미련한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당시의 의사자격 시험은 제1부, 제2부, 제3부의 과정이 있었는데 제1부를 합격해야만 제2부를,
제2부를 합격해야만 제3부를 응시할 수 있었다.
제1부는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병리학, 약리학, 세균학, 위생학, 외국어(영,독,불어중 택일)등
기초의학의 8과목이었고,
제2부는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안과, 피부과, 비뇨기과, 정형외과, 정신과 등
임상의학의 10과목이었으며,
제3부는 내과, 외과의 실지 임상과 구술시험이었다. 그러니까 총 20개 과목의 방대한 학과목을
마스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방대하고 어려운 시험의 수험준비 기간을 불과 2년 정도로 잡은 나는 준비기간을
4,5년으로 늘여 볼 생각도 했으나, 무슨 시험에고 패기와 자신이 있었던 나는 설마 하는
생각만으로 불철주야 파고만 들었다.
이러한 무리를 하다 보니 어느 때는 코피를 사발로 쏟아 실신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고,
뇌빈혈로 졸도한 일까지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버티어 나갔다. 그야말로 배수의 진을 치고 그 악전고투를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의 내 육신은 오직 정신력에 의해서만 지탱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사회부와 진생회가 공동주최한 전국 신생활개선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여 특선으로 당선이 되었고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사회부장관상 등을 받아 수험준비
생활에 활기를 띠게 되고, 그 상금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큰 보탬이 되었다.
드디어 1952년 3월,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시험장에 임했다.
다행히 천지신명과 운명의 신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1,2,3부를 모조리 일관한 것이다.
이로써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도의 학력과 자격요건을 법적으로 보장받은 셈이다.
나는 합격통지서를 손에 받아 든 순간 처음으로 감격의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나라는 과거 국민의료법의 실시와 더불어 의사의 자격을 규정하기를 1952년부터 정식
의사면허를 받기 위해서는 정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받았거나 아니면 의사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실시하는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을 해야만 비로소 정식
의사면허를 교부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1952년 5월 실시되었던 제1회 의사국가시험에
응시하여 단연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이 되어, 당시 보건부의 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니,
이것이 곧 내가 官界에 첫발을 내어디딘 동기가 된 것이다.
▣ 김태서 - 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포천 광렬 - 대부님 글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 포천 광렬 - 대부님 김 확 할아버지 지석문 번역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포천 광렬 종친님! 간단한 소개 부탁 드립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포천 만나서 광렬님 반갑습니다.
▣ 포천 광렬 - 저를 미약하나마 소개하겠습니다. 문온공파종중 태자돌림입니다.얼마전까지 약 6년에걸쳐 문온공파 종중 감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문온공파 3파중 맏파인 직제학공계의 큰집인 별제공파 종친회 총무를 15년간 맏아 보고 있습니다. 저는 40대 중반의 나이이며 직장은 농협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현재 업무가 바빠서 참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에게 포천 별제공파종중의 창립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소지하고 있으며 문온공종중의 탄생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잠시 쉬고 있으며 시간이 허락하여 참여하게 되면 미약하나마 제의 작은 지식을 올리겠습니다. 아무쪼록 문중의 어르신 내내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언젠가 영환대부님께서 말씀하셨던 별제공파 광렬조카님이신 듯 합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그후 나는 1947년 8월에 문광국민학교에서 청주사범부속초등학교 교사로 영전하였다. 당시
도내 국민학교 교사들 중에서 전공분야에 대한 연구업적이 뚜렷하고 교수법 등이 출중할 뿐아니라
장래 교사가 될 교생(敎生)을 실습시킬 만한 능력 있는 우수교사만이 사범부속교사가 될 수 있는데,
불과 20세의 약관(弱冠)으로 영전을 한 셈이다.
이 사범부속 재직시에도 불철주야 공부한 결과 대학검정고시 전과목에 합격했다.
나는 사범부속 재적 2년만에 다시 상경(1949)하여 서울재동교로 부임했고,
1950년 6.25동란 이후에는 청주 세광중고등학교 교사로 전전하면서도 晝敎夜讀(주교야독),
그야말로 敎不倦 學不厭 (교불권 학불염)의 지칠줄 모르는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나는 대학검정고시 합격으로써 그 학력을 법적으로 획득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대학과정의
전문지식을 이해 흡수할 만한 확실한 기초실력을 배양했다는 것을 내 스스로 확인한 셈이다.
고등학교 과정의 전 과목을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마스터한 다음에야 나는 본격적인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의학은 자연과학 중에서도 생명과학에 속하기 때문에 의학을 순전한 독학이나 고학으로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초지(初志)를 굽힐 수가 없어 기어코 그 관문에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낮에는 교편을 잡고 밤을 지새우며 우선 의사자격 검정시험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검정에 합격(1949.6)한 직후부터 의사시험을 준비한 것이다.
매일 평균 4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을 수험준비에 안배하려 하였으나 낮에는 직장에서
시간을 빼앗기는 결과가 되어 하루평균 8, 9시간 밖에 짜낼 수가 없었다.
거의 2년 동안이나 강행군을 하니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고 60kg이던 체중이 48kg 정도로
줄어들어 글자 그대로 皮骨相接(피골상접)의 미이라와도 같은 말라깽이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나를 마치 폐결핵인양 오인하여 접근을 극도로 꺼리는 눈치였고, 내가 호감을 가졌던
사람마저 경원(敬遠)하게 되니 그 당시의 심적인 고통을 어떠하였겠는가?
내가 의사고시를 너무 소흘히 보고 덤벼든 것이 과한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빨라야 6,7년, 적어도 10여 년을 해야만 겨우 합격이 된다는 어려운 난관을 불과 2,3년에 해
치우겠다는 생각이었으니 곰처럼 미련한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당시의 의사자격 시험은 제1부, 제2부, 제3부의 과정이 있었는데 제1부를 합격해야만 제2부를,
제2부를 합격해야만 제3부를 응시할 수 있었다.
제1부는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병리학, 약리학, 세균학, 위생학, 외국어(영,독,불어중 택일)등
기초의학의 8과목이었고,
제2부는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안과, 피부과, 비뇨기과, 정형외과, 정신과 등
임상의학의 10과목이었으며,
제3부는 내과, 외과의 실지 임상과 구술시험이었다. 그러니까 총 20개 과목의 방대한 학과목을
마스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방대하고 어려운 시험의 수험준비 기간을 불과 2년 정도로 잡은 나는 준비기간을
4,5년으로 늘여 볼 생각도 했으나, 무슨 시험에고 패기와 자신이 있었던 나는 설마 하는
생각만으로 불철주야 파고만 들었다.
이러한 무리를 하다 보니 어느 때는 코피를 사발로 쏟아 실신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고,
뇌빈혈로 졸도한 일까지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버티어 나갔다. 그야말로 배수의 진을 치고 그 악전고투를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의 내 육신은 오직 정신력에 의해서만 지탱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사회부와 진생회가 공동주최한 전국 신생활개선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여 특선으로 당선이 되었고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사회부장관상 등을 받아 수험준비
생활에 활기를 띠게 되고, 그 상금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큰 보탬이 되었다.
드디어 1952년 3월,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시험장에 임했다.
다행히 천지신명과 운명의 신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1,2,3부를 모조리 일관한 것이다.
이로써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도의 학력과 자격요건을 법적으로 보장받은 셈이다.
나는 합격통지서를 손에 받아 든 순간 처음으로 감격의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나라는 과거 국민의료법의 실시와 더불어 의사의 자격을 규정하기를 1952년부터 정식
의사면허를 받기 위해서는 정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받았거나 아니면 의사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실시하는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을 해야만 비로소 정식
의사면허를 교부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1952년 5월 실시되었던 제1회 의사국가시험에
응시하여 단연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이 되어, 당시 보건부의 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니,
이것이 곧 내가 官界에 첫발을 내어디딘 동기가 된 것이다.
▣ 김태서 - 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포천 광렬 - 대부님 글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 포천 광렬 - 대부님 김 확 할아버지 지석문 번역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포천 광렬 종친님! 간단한 소개 부탁 드립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포천 만나서 광렬님 반갑습니다.
▣ 포천 광렬 - 저를 미약하나마 소개하겠습니다. 문온공파종중 태자돌림입니다.얼마전까지 약 6년에걸쳐 문온공파 종중 감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문온공파 3파중 맏파인 직제학공계의 큰집인 별제공파 종친회 총무를 15년간 맏아 보고 있습니다. 저는 40대 중반의 나이이며 직장은 농협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현재 업무가 바빠서 참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에게 포천 별제공파종중의 창립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소지하고 있으며 문온공종중의 탄생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잠시 쉬고 있으며 시간이 허락하여 참여하게 되면 미약하나마 제의 작은 지식을 올리겠습니다. 아무쪼록 문중의 어르신 내내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언젠가 영환대부님께서 말씀하셨던 별제공파 광렬조카님이신 듯 합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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