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공 김제갑 선조님 친필> 소개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2-08-23 06:19 조회1,669회 댓글0건본문
<의재공 김제갑 선조님 친필(공문서찰)>
1. 출전 : <槿墨(仁)>.성균관대 간. 1995. 87P.
2. 크기 : 세로-33.5cm, 가로-11.5cm
3. 원본 소장처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4. 조사일 : 2002. 8. 13.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문신. 의사(義士). 字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진사(進士) 석(錫)의 아들. 이황 (李滉)의 문인으로서 1553년(명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3년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가 되고, 3년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73년(선조6) 정언 (正言),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1589년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왜장(倭將)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領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요새만을 믿고 따로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 괴산의 충민사 경내,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괴산 능촌리에 제향(祭享) 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 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1711년(숙종 37)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김주회 - 여름휴가때 들린 원주역 광장의 김제갑충렬비의 문숙공 선조님 필적이군요.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김태서 -
▣ 김윤만 -
▣ 郡/김태영 -
▣ 김영윤 -
▣ 태영/문 -
▣ 김정중 -
▣ 솔내영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