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관정공파(3) 역대인물-2-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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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08-24 18:39 조회2,007회 댓글0건본문
서운관정공파 인물-2- 김홍도
김홍도 [金弘度]
자 중원(重遠). 호 남봉(南峰). 동고(東皐) . 대사헌을 지낸 희수(希壽)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노(魯)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선비화가로서 1548년(명종3) 문과에 장원급제, 항상 명종의 측근에 있으면서
정치의 폐단을 논하였고, 벼슬은 전한(典翰)에 이르렀다가 그의 외척 윤원형(尹元衡)의 참소로
갑산에 유배되어 죽었다.
문장과 서화에 능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글씨를 잘 썼고, 또 그림에도 능했다고 하지만 유작은 없다.
*******
남봉 김홍도 선조님은 소과(진사시)에도 장원하고, 대과(문과)에도 장원급제를 하신분이십니다.
조선조에서는 重試를 매우 귀하게 여겼는데,이와 관련된 기록이 혀균의 성소부부고등에 있어
옮겨 봅니다.
참고:중시란 1122년(고려 예종17) 왕이 사루(紗樓)에서 문신에게 모란시(牡丹詩)를 짓게 하여 등급을 정한 것이 중시의 시초이다. 1427년(세종 9) 제도화되어 10년에 한번씩 실시하였으며, 증광전시(增廣殿試)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시행하였다. 응시자격도 처음에는 중앙과 지방의 종3품 중직대부(中直大夫) 이하로 되어 있었으나, 《경국대전》에는 당하관 이하의 문무신으로 바뀌었다. 시험과목은 그때마다 품정(稟定)하였으나, 대개 표(表) ·책(策) 중의 하나를 택하여 전정(殿庭)에서 보게 하였다
####조종조에 사대부(士大夫)는 중시(重試)를 가장 중히 여겼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중시 공부를 할 때에 표문(表文)과 대책(對策)을 많이 연습하였는데, 시장(試場)에 들어가니 평소 대책에 능한 대사헌 권홍(權弘)도 응시한 것을 보고 모재(慕齋)가 말하기를,
"내가 장원하려고 하였는데 이분이 응시했으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발표하는 날에 보니 과연 권홍이 장원이고 김은 2등이었다. 그런데 선조(先朝) 이후로는 명관(名官)은 으레 응시하지 않는데,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정(嘉靖) 병진년(명종 11, 1556)에 김홍도(金弘度)가 중시(重試)에 응시하여 대책(對策)은 짓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 것이 두 번인데, 지금 양응정(梁應鼎)이 응시하였으니 내가 이연성(李延城) 꼴이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는 대개 연성군(延城君) 이석형(李石亨)이 한 해에 세 번 장원하였으나 중시에서는 6등을 하였으므로 성근보(成謹甫)의 집에 가서 절을 하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 지 오래이다."
하자, 성근보가 웃으면서,
"남에게 굽히지 않은 무릎을 내가 굽혔다."
하였는데, 김홍도 역시 진사(進士)와 문과(文科)에 연이어 장원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성소부부고(허균저)에서 > 성소부부고 > 성소부부고 제22권 > 설부 1 說部一성옹지소록 상 惺翁識小錄上 에서 인용했슴
참고 *성근보=성삼문. 이연성=이석형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원 -
▣ 김재이 -
▣ 김재익 -
▣ 郡/김태영 -
▣ 김태서 -
▣ 김태헌 -
▣ 김정중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김홍도 [金弘度]
자 중원(重遠). 호 남봉(南峰). 동고(東皐) . 대사헌을 지낸 희수(希壽)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노(魯)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선비화가로서 1548년(명종3) 문과에 장원급제, 항상 명종의 측근에 있으면서
정치의 폐단을 논하였고, 벼슬은 전한(典翰)에 이르렀다가 그의 외척 윤원형(尹元衡)의 참소로
갑산에 유배되어 죽었다.
문장과 서화에 능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글씨를 잘 썼고, 또 그림에도 능했다고 하지만 유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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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봉 김홍도 선조님은 소과(진사시)에도 장원하고, 대과(문과)에도 장원급제를 하신분이십니다.
조선조에서는 重試를 매우 귀하게 여겼는데,이와 관련된 기록이 혀균의 성소부부고등에 있어
옮겨 봅니다.
참고:중시란 1122년(고려 예종17) 왕이 사루(紗樓)에서 문신에게 모란시(牡丹詩)를 짓게 하여 등급을 정한 것이 중시의 시초이다. 1427년(세종 9) 제도화되어 10년에 한번씩 실시하였으며, 증광전시(增廣殿試)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시행하였다. 응시자격도 처음에는 중앙과 지방의 종3품 중직대부(中直大夫) 이하로 되어 있었으나, 《경국대전》에는 당하관 이하의 문무신으로 바뀌었다. 시험과목은 그때마다 품정(稟定)하였으나, 대개 표(表) ·책(策) 중의 하나를 택하여 전정(殿庭)에서 보게 하였다
####조종조에 사대부(士大夫)는 중시(重試)를 가장 중히 여겼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중시 공부를 할 때에 표문(表文)과 대책(對策)을 많이 연습하였는데, 시장(試場)에 들어가니 평소 대책에 능한 대사헌 권홍(權弘)도 응시한 것을 보고 모재(慕齋)가 말하기를,
"내가 장원하려고 하였는데 이분이 응시했으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발표하는 날에 보니 과연 권홍이 장원이고 김은 2등이었다. 그런데 선조(先朝) 이후로는 명관(名官)은 으레 응시하지 않는데,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정(嘉靖) 병진년(명종 11, 1556)에 김홍도(金弘度)가 중시(重試)에 응시하여 대책(對策)은 짓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 것이 두 번인데, 지금 양응정(梁應鼎)이 응시하였으니 내가 이연성(李延城) 꼴이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는 대개 연성군(延城君) 이석형(李石亨)이 한 해에 세 번 장원하였으나 중시에서는 6등을 하였으므로 성근보(成謹甫)의 집에 가서 절을 하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 지 오래이다."
하자, 성근보가 웃으면서,
"남에게 굽히지 않은 무릎을 내가 굽혔다."
하였는데, 김홍도 역시 진사(進士)와 문과(文科)에 연이어 장원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성소부부고(허균저)에서 > 성소부부고 > 성소부부고 제22권 > 설부 1 說部一성옹지소록 상 惺翁識小錄上 에서 인용했슴
참고 *성근보=성삼문. 이연성=이석형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원 -
▣ 김재이 -
▣ 김재익 -
▣ 郡/김태영 -
▣ 김태서 -
▣ 김태헌 -
▣ 김정중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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