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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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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1-08-20 00:23 조회2,1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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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1집 (태종 014 07/07/30 신사 )



상락 부원군 김사형의 졸기



상락 부원군 김사형이 졸하였다 김사형의 자는 평보인데, 안동부 사람이다대대로 귀하고 현달하여, 고조



김방경은 첨의 중찬 상락공으로서, 문무 겸전의 재주가 있어 당시의 어진재상이었고 조부김영후는 첨의



상락후 였다 김사형은 젊어서 화요직을 두루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 가



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을 일신하고 대신을 나누어 보내 각지방을 전제하여을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내를 잘다스렸다. 경오년에 지밀직사사로서 대사헌을 겸하였고 조



금뒤에 지문하부사로 승진하였다 대사헌에 있은지 일년이 넘었는데 조정이 숙연하여졌었다 여러번 전직



하여 삼사 좌사가 되었다가 임신년 7월에 여러 장수. 재상들과 더불어 태상왕을 추대하여 문하시랑찬성



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 전서 옹양위 상장군에 승진하고 일등공신에 녹훈되어 분의 좌명 개국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12월에 문하 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에 봉작되어 식읍 1천호에 식실봉 3백호를 받았



다 정축년에 겸 판사헌부사를 제수받았다 무인년의 변란에 김사형이 조준과 함께 대궐에 나가 백관을



거느리고 적장을 세워 사자를 삼을것을 청하였다 상왕이 임 내선을 받으니 녹공이 또 1등이 되어 공신



의 호를 더하기를 "동덕 정난 정사"라 하엿다 건문황제의 등극때에 중국에 들어가 하례하엿다 기묘년12



월에 스스로 성만하다고 진달하여 여러번 직임을 그만두기를 비니 상왕이 오랫만에 허락하였다 김사형



이 조준과 더불어 8년동안 함께 정승 노릇을 하엿는데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을 전



담하고 사형은 관대하여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을 진압하니 물의가 의중하였다 주상



이 즉위하자 신사년 3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었다가 임오년10월에 사임하고 영사평부사가 된지 달포가 지



나서 부원군이 되어 사제로 은퇴하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않고 성색



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때부터 운명할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



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졸한 나이가 67세이다 조회를 3일을 정지하고 좌



부대언 윤수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이라 하였다 두 아들은 김승과 김 육이다.



좌의정을 지낸 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질, 영의정 수동, 이조판서 찬, 근대인물로 김구 선생등

김사형 묘소는 양수리 목왕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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