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08(김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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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9-01 22:29 조회1,495회 댓글0건본문
[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08(김수동)
8.문경공 晩保堂 金壽童1457(세조 3)∼1512(중종 7)
디지털한국학 홈
김수동(金壽童)
1457(세조 3)∼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미수(眉#수04),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사형(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 ★적(#적21)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주서·홍문관정자·의정부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는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그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聖學心法》 4권을 구하여 왔다.
그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경기관찰사·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홍문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04년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해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이때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품성이 단정하였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海東名臣傳,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崔完基〉
대동금석서
대동금석속목
p47 ★한계순비(한계순묘비), 재양주, ★김뉴 문, 이조참판 ★김수동 서
윤비(★윤여림지선묘비) 비음, 예조좌랑 ★김수동 서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金壽童(김수동)
자는 眉 (미수), 본관은 안동, 좌의정 金 石+質(★김질)의 조카, 세조2년정묘 (1457)생, 성종8년정유 (1477)에 문과하고 벼슬은 영의정
★신용개가 지은 비명에 이르기를 "공은 예서를 잘 쓰고 事大表奏(사대표주)를 쓰는데 뛰어나서 한 때의 모든 신료들이 모두 제일로 추대하였다." (국조인물고) ---事大表奏(사대표주) : 중국에 올리는 表奏文---
글씨에 능했으니 예서를 특히 잘 썼다. (해동명신록) (연려실기술)
양주의 청평 韓繼純의 묘비를 썼다. (해동금석총목)
한계순 비의 해서는 속되다. (동국금석평)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제5절 金壽童의 隸法, 박증영의 조설송체
金壽童의 第1隸法
김수동(1457-1512)은 본관이 안동, 상락부원군 ★金士衡의 후손, 첨지중추부사 ★金 (김적)의 아들로서 자가 眉 (미수), 호가 晩保堂(만보당)이다.
< 경력 생략 >
서예에 능하였는데 특히 隸書는 당대 제1인자의 칭을 받았다.
[국조인물고]에는 "신용개찬명왈 공선어예법 능서사대표주 일시제료 함추위제1"이라 하였다.
[해동명신록] 및 [연려실기술]에는 "공서 선어예법"이라 하였다.
[동국금석평]에 그가 쓴 양주의 한청평계순 묘비의 楷書(해서)를 "俗體"라고 평하였다. 역시 그의 隸書 솜씨만은 못하였었던 모양이다.
▣ 金在益 -
▣ 김영환 - 주회씨 감사합니다. 오늘 행사 잘 끝내
▣ 김영환 - 끝냈습니다. 비상사태는 잘 지냈는지요? 모두 궁금했습니다.
▣ 김영윤 -
▣ 김항용 - 조금 늦게 참여하여 같이 일정을 보냈습니다. 국가 중태사태에 공무 수행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 김태서 - 자리를 같이 못해 아쉽습니다.
▣ 김은회 - 주회 아우님 뵙지못해 아쉽습니다.
▣ 김은회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함께 못한 아쉬움이 큰 하루였습니다....그리움이 크면 다음 만남에 기쁨도 크겠지요.
▣ 태영/문 - 감사합니다.
8.문경공 晩保堂 金壽童1457(세조 3)∼1512(중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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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동(金壽童)
1457(세조 3)∼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미수(眉#수04),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사형(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 ★적(#적21)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주서·홍문관정자·의정부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는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그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聖學心法》 4권을 구하여 왔다.
그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경기관찰사·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홍문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04년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해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이때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품성이 단정하였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海東名臣傳,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崔完基〉
대동금석서
대동금석속목
p47 ★한계순비(한계순묘비), 재양주, ★김뉴 문, 이조참판 ★김수동 서
윤비(★윤여림지선묘비) 비음, 예조좌랑 ★김수동 서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金壽童(김수동)
자는 眉 (미수), 본관은 안동, 좌의정 金 石+質(★김질)의 조카, 세조2년정묘 (1457)생, 성종8년정유 (1477)에 문과하고 벼슬은 영의정
★신용개가 지은 비명에 이르기를 "공은 예서를 잘 쓰고 事大表奏(사대표주)를 쓰는데 뛰어나서 한 때의 모든 신료들이 모두 제일로 추대하였다." (국조인물고) ---事大表奏(사대표주) : 중국에 올리는 表奏文---
글씨에 능했으니 예서를 특히 잘 썼다. (해동명신록) (연려실기술)
양주의 청평 韓繼純의 묘비를 썼다. (해동금석총목)
한계순 비의 해서는 속되다. (동국금석평)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제5절 金壽童의 隸法, 박증영의 조설송체
金壽童의 第1隸法
김수동(1457-1512)은 본관이 안동, 상락부원군 ★金士衡의 후손, 첨지중추부사 ★金 (김적)의 아들로서 자가 眉 (미수), 호가 晩保堂(만보당)이다.
< 경력 생략 >
서예에 능하였는데 특히 隸書는 당대 제1인자의 칭을 받았다.
[국조인물고]에는 "신용개찬명왈 공선어예법 능서사대표주 일시제료 함추위제1"이라 하였다.
[해동명신록] 및 [연려실기술]에는 "공서 선어예법"이라 하였다.
[동국금석평]에 그가 쓴 양주의 한청평계순 묘비의 楷書(해서)를 "俗體"라고 평하였다. 역시 그의 隸書 솜씨만은 못하였었던 모양이다.
▣ 金在益 -
▣ 김영환 - 주회씨 감사합니다. 오늘 행사 잘 끝내
▣ 김영환 - 끝냈습니다. 비상사태는 잘 지냈는지요? 모두 궁금했습니다.
▣ 김영윤 -
▣ 김항용 - 조금 늦게 참여하여 같이 일정을 보냈습니다. 국가 중태사태에 공무 수행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 김태서 - 자리를 같이 못해 아쉽습니다.
▣ 김은회 - 주회 아우님 뵙지못해 아쉽습니다.
▣ 김은회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함께 못한 아쉬움이 큰 하루였습니다....그리움이 크면 다음 만남에 기쁨도 크겠지요.
▣ 태영/문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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