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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12) 김사달 박사의 서화 스승 소전 손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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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09-04 19:41 조회2,1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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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추사(秋史)이래 대가(大家)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추사이래의 대가로 추앙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서예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소전 손재형은



우리나라 한자 문화의 정수인 서예를 오늘날에 이어온 서예계의 거목이다. 호는 소전, 이름은 손재형.



아명은 판돌(判乭)이다. 소전은 1903년 4월 28일 아버지 영환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6일만에



진도읍 교동리에서 태어난 유복자다. 다시 3천석군을 자랑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5살 때부터 할아버지인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으니



어릴적부터 서예에 남다른 재질을 가졌다. 흔히 소전을 가르켜 앞으로 1세기 안에 나타나기 힘든



서예가라는 말을 한다. 그것은 그가 독창적인 서체를 개발했다는 한국 서예 사상의 업적에도 있지만,



그의 경력이 화려함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 30전후에 특선을 마치고 곧이어 국내 규모의 심사위원을 맡아 국전이 시작되면서 계속해서



9회나 단 한번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 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 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 회장 두 번



등을 지내 그가 활동하던 40년 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것은



앞으로 그 기록이 좀처럼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다.



일제시대 말기에 이르러서 우리 국어는 말살 당하고 민족문화로서 민족서예는 그 존재성마저 잃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힘에 의한 억압은 얼마가지 못하는 법이니 8·15해방을 맞으면서 소전은 본격적인



그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중국에서는 서법)



서예로 할 것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불쾌한 기억을 씻어 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동양적 서예관에서 서즉화(書卽畵), 화즉서라는 전통적 의미와 함께 현대의 예술성을 띄고 새로운



서예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민족적 의지의 표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새로운 발상에 전 서예인들이



동조하고 나서 오늘날 서예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1945년 조선서화



동연회(同硏會)를 창립 선전이 없어진 문화적 공백기를 메웠으며 그것이 국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소전은 양정중학에 다닐 때에는 서예보다는 서양화에 더 심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서예가와는



달리 글씨를 회화적으로 인식하는데 일가견을 가져 조형화(造形化)에 독창성을 발휘했으며 골동품을



보는 눈도 이론적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구김살



없이 자랐던 탓으로 그 성격이 깔끔하면서도 원만하고 여유가 있어 글씨가 그의 성격과 품성처럼



단아하고 세련미가 넘쳐 보는 이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문기(文氣)넘친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좋아해 그의 당호를 존추사당(尊秋史堂)이라 이름하고 추사를 닮은 그림을



즐겨 그린 때도 있었다.



흔히 소전을 서예가로만 인식하지만 학남(鶴南), 산정(山亭)같은 제자들은 『선생님이 남긴 80여점



중에는 선생의 글씨보다 더 높이 평가할 그림이 있다.』고 화가로서의 소전을 평가한다. 선생이 즐긴



골동품 수집도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예술의 일부였다. 해방 후 선생은 부산에 극장을 계약하러



갔다가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한 경대에 반한 나머지 가지고 갔던 돈을 몽땅 털어 주고 극장 계약을



포기한 채 돌아와 부인 홍여사와 크게 싸울 정도로 골동품 수집에도 거의 광적이었다. 장년기에 들어



소전의 글씨는 더욱 원숙해졌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다. 수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와 중국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냈다. 선생의 글씨에 나타난



완숙이나 세련도는 그만이 도달한 높은 경지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극치를 이룬 것은 1955년 고향인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비인



이충무공 전첩비문이다. 점, 선, 횡획, 종획등의 변화무쌍한 조화다. 전체적인 리듬이 금세의 역작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재질과 노력이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어울려져 결집된 소전예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대표작으로는 진해 해군 충효탑 비문과 서울 사육신 비문 등이 꼽힌다.



그는 제자를 사랑했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항섭(鄭恒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평보(平步) 서희환



(徐희煥)등 한국 서예의 기둥들이 줄비하다. 구철우는 『우리나라 서예가들 두어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의 제자라고』말하는가 하면 31살 때부터 소전의 가르침을 받은 하남호는 『작품을 쓰면



선생은 절대 잘못된 점을 섣불리 지적하지 않아 몇 번이고 써 보게 해 그 스스로 잘못을 발견하게



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해학이 넘쳐흐르고 많은 사람을 웃기면 사귀는데는 천재란 평을 받는 소전은 예술에 대한 고집은



대단해서 종종 적을 사는 때가 있었다. 그는 예술가의 기본적인 인간성과 생활태도를 중시해 『



멋과 풍류도 좋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축첩은 삼가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를



어길 때면 『자네는 가화(家和)를 이루지 못해 화의 통선의 경지를 맛보기 힘든 인물이니 내게 배울



것이 없네』하고 다시는 돌보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다. 그는 술을 한 홉 이상 마시지 않았으며



글씨는 대부분 새벽 4시에 일어나 쓰는 정성을 들였다.



『역시 글씨는 마지막 10%가 신운(神韻)이다』고 곧장 말하면서 기분 내키지 않는 때면 수없이



썼다가 찢어버리고 낙관을 않는 성미였다. 권력이 있거나 돈 있는 사람의 청탁을 받으면 글씨에



신운이 안 내린다고 쓰기를 꺼렸고 친구나 선배가 청탁을 해도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좀처럼 붓을



들지 않는다. 서울 홍제동 125번지 1,250평의 대지위에 세운 그의 집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해



착수했다. 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사랑채를 사들여 옮겨 짓고 옥전장과 문옥루등은



33년전에 지은 효자동의 그의 집을 옮겨왔다. 소전은 이 집을 지으면서 『이것은 내 예술활동의 일부요.



도락이다 .내 자식들이 이 집을 지탱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나의 지식과 재력을 다 바쳐 이 집을



예술의 정수로 완성할 것이다.』고 말했다.



신들린 사람처럼 기둥 하나를 세워놓고는 한 달을 생각한 뒤 다시 뜯도록 하고 장소를 옮기는 등



마치 그가 글씨를 쓰는 듯 했음으로 목수가 견디다 못해 도망친 일까지 있었다. 담장은 궁궐의 담벽을



헐면 그 돌을 사다가 쌓고 벽돌을 자신이 직접 제도하여 구워다가 맞춰갔다. 벽돌은 할아버지의 호인



「옥(玉)」자와 자신의 이름 「형」자와 부인의 이름자 「희」자를 문양화하여 맞추는 등 돌담 하나



문짝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이 때문에 1958년에 착공한 이 집은 16년간이나 계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못한 채 병석에 쓰러지더니 「소전체」를 확립한 추사 이래의 대가 소전은



1981년 6월 15일 오전 7시 30분, 이 민족의 현대사를 종횡무진하던 거목은 끝내 고향을 멀리 둔 채



운명하고 말았다.



   







▣ 김윤만 - 또 새로운 공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 김항용 - 많이 배웁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대부님.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영윤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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