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하 장군 친필 서찰 해독 및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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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2-09-07 01:36 조회1,736회 댓글0건본문
김응하 장군의 친필서찰을 金益洙(제, 보명-泰益)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이 해독문 및 번역문을 소개합니다.
1. 친필 서찰 사진 원본
*1)발견일 : 2002. 4. 11 2)발견자 : 김태서(익) 3)소장처 : 국사편찬위원회 4)작성연대 : 미상
2. 한문 원본(김익수 해독)
尙之疏讒已回啓恐鏃. 上裁也未知如何. 曰更之鈒 百官同之. 雖水無官 烏得免雪. 唯在夜中相敍. 尙之必犯我. 非細奈何.
卽 應河 頓
3. 번역문
상(尙)의 상소에서 참소하니 이미 회계(回啓)에서 화살처럼 찌를까 염려됩니다.
상감께서 재가하셨는지 어떤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말에 의하면 다시 찌르려한다고 하며 모든 관료들이 그에 동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수군에 관원이 없다한들 어찌 설욕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밤중에 있으면서 서로 얘기해 보았더니 상(尙)이 꼭 나를 범하고자하니 조금이나마 한탄하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즉시 응하(應河)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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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수신자 : 미상임.
*주2) 서찰속의 상(尙) : 김상헌으로 추정.
*주3) 지은 연대 : 1610-1615년으로 추정. 김상헌은 공보다 10세 위로 1608(광해 즉위)에 문과한 후 정언. 직제학의 관직에 있다가 1615(광해 7)에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의 문제로 파직되었고, 그 후 1624(인조 2년)에 등용됨. 따라서 김상헌의 재직기간인 1610년에서 파직시인 1615년 사이로 추정됨.
*주4) 회계(回啓) : 임금의 下問에 대해 심의하여 상주(上奏)하는 것.
*김응하(金應河) 1580(선조13)∼1619(광해군1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의(景義), 철원군 어운면 갈원동 하갈리에서 안동김씨인 아버지 김지사(金地四)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나, 14세에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동생 응해(鷹海)와 함께 자라면서 사냥을 즐겨 맨손과 단검으로 범과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키가 8척에 힘이 세어 장사로 알려졌다. 1604년(선조37) 25세에 무과(武科)에 급제, 말직에서 전전하다가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의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가 1608년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자 그의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다. 31세 때 선천 군수를 하면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1610년 다시 선전관, 이어 경원판관(慶源判官)·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삼수군수(三水郡守)·북우후(北虞候)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10년(1618)에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금국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에서는 건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하였다. 김응하는 이 때 명나라의 원군으로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 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鴨綠江)을 건넜다. 3월 명나라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명군 3만을 거느리고 부차령(富 車嶺)에서 패전하여 자결하자 조선군(朝鮮軍)은 6만의 적군과 대전케 되었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우영장 이일원(李一元)은 달아났고, 그는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군 분투 끝에 전사하고 휘하 군사는 괴멸했다. 1620년(광해군12) 명나라 신종(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追封)됨과 동시에 처자에게는 은(銀)이 하사되었고 조선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후손들이 안동김씨에서 갈리어 철원김씨의 시조로 삼았다고도 한다.
1570(선조 3)∼1652(효종 3). 조선 인조·효종 때의 상신(相臣).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출생.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중에 보인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부수찬·좌랑·부교리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복명,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협01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하여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숙특(淑慝:善惡)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으며, 이정구(李廷龜)·김유(金#유34)·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사34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교39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솔내영환 -
▣ 김태서 - 해석 감사드립니다.
▣ 김주회 - 김응하 장군의 필적 번역 감사합니다. 내용이 어려워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김응하 장군께서 어떠한 상황에서 누구에게 쓴 것인지 궁금합니다.
▣ 김영윤 -
▣ 김윤만 - 배경을 모르는지라 내용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주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김항용 - 김응하, 김상헌에 대한 <조선 왕조실록>내용을 살펴 봤으나 참소와 관련한 글을 찾지 못해 서찰 당시의 상황과 자세한 서찰 내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지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없는지요.
▣ 태영/문 - !!! 태서 아저씨 귀한 보물을 발견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 金在益 -
▣ 김재이 - 새로운 내용을 접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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