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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김공 행장(鳳山 金浩斗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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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2-09-12 08:00 조회1,8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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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호두요 초휘는 흥경이시다

자는 문성이고 호는 봉산이며 성은 김씨로서 관은 안동이다

신라경순왕의 손자이신 공부시랑평장사 휘 숙승공께서 안동의 관을 받고 여러대를 지나 휘 방경은 고려 정동도원사 추충정난공신상락군 개국공 시 충렬로서 곧 중시조(中始祖)이시다



五傳해서 휘 구정은 도평의 지인으로 분파조이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자첨은 전조명신의후손 예우로 감목관 벼슬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안동회곡에서 의성사촌으로 입향하여 자손의 세거지가 되었다

아드님 휘 효온은 문과사직이요 아드님 휘 극혜는 문과에 올라 지례현감과 북평사를 지냈다

아드님 휘 광수는 호 송은이며 진사로서

태학에 장유 하다가 연산의 정변을 피해 은거수도하고 장대서원에 제향 되었다



三傳해서 휘 사정은 호가 후송재로서

백중형인 만취당 직장공과 더불어 천륜으로 학문을 강론하고

곽망우당의 의진에서 적신선서의 시구로 전열을 가다듬었으며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도담사에 제향 되었다

아드님 휘 淮(회) 는 화 경암이며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정랑이되고 성절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와서 조천록을 남겼다



휘 상유는 호가 옥계로 장사랑이요 휘 은좌는 호가 소북이다

五傳해서 휘 양문은 공의 고조이시고

증조의 휘는 재선이요 호는 서계이다 단정탁원하고 문망이 있었으며

형 백윤공과 더불어 연방집을 남겼다

조의 휘는 수(?)이고 호 진서암이며 고는 휘 노종(魯鍾)으로 호 사은이니 후송재선생의 예(?)손이다



공은 사은공의 둘째 아들로 1890년 고종 경인 7월23일 사촌리 제(第)에서 태어나시니

형용이 준협하고 거지가 범아와 달라서 자못 기대하는바 있었다



어린시절에 밖에서 놀다가 혹 별미를 얻게 되면 먼저 부모에게 드리는 정성이 있어 사람들은 천출의 효심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놀다가 한 아이가 깊은 우물에 빠졌는데 여러아이들이 놀라서 달아 났으나 공은 침착하게 아이의 어머니에게 사실을 알려서 무사히 구출하니 주위의 어른들은 적적칭선 하였는데 그때는 칠세 유소의 어린이 였다



그해 삼월에 선대인 사은공이 불행조사 하심에 애통하며 집상함이 성인과 같이하고 백씨공과 같이 조석곡존을 드리는데 거르지 않았다



족대부 매산공 문하에 나아가 초학을 익히고 천학역행으로 경사를 탐독하여 문사가 성취 되었으며촌수자질의 훈해를 소임으로 삼앗다



항상 조고(早孤)함을 한스러워 하며 자모를 엄부와 같이 모시면서 공경하고 삼가하는 자세로 진혼정성을 하루같이 행하였다



임천(林泉)에 매적 하면서 백가제서를 일진하고 청빈한 생활이었으나 분수에 알맞는 치산과 동정어묵이 절도를 넘지않아 일방다사들이 경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농상(農桑)에 힘쓰고 고인의 이력을 본받아 평상시에는 안상앞에 단정히 앉아 옛글을 성통하고 생활의 과조를 엄정히 하여 희로에

역색함이 없으니 사람들은 그 기색이 고인 군자와 다름 없다고 하였다



만년에는 향중사우와 더불어 시율과 서찰을 상교하고 후진에게는 효제충신을 권장하며 에양수제를 훈몽하여 수속만회에힘을 기울였으며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상해임시정부이 설립을 차운하여

대한모복열풍상 필후양춘도운장

동토군영래은약 서구다사인선장

장천의기직변급 만복경륜입국망

상해임정선건식 천추전사사유광



조국의 광복을 도모함에 몇해나 지났는고

훌륭한 계략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회복되리니

해동의 영웅들이 모여 은밀히 약속하고

서구의뜻있는 선비들도 그장전을 인준 했네

하늘에 솟은 의기 왜적섬멸하기를 서두르고

가슴속 깊은 경륜 나라세우기에 바쁘구나

상해의 임시정부 깃발을 높이세워 청사에 길이 전하니 죽어도 빛이 있네



위와 같은 시를 남겼다

비록 초야에서 뜻을 펴볼 기회를 갖지 못하였으나 우국의 심회도 이와 같이 높았다 1963년 계유 4월 16일 정침에서 병몰하시니 향년 74세였으며 부음이 나가자 공을 아는 지구들이 고기를 잃었다고 한탄 하였다



그달에 비봉산 토기곡 임좌의 원에 장례했으며

배는 완산이씨로서 사인 명산의 따님이요 부덕이 현숙하였다

공몰후 2년 을사에 졸하고 묘는 동원이다



무사로 족제 후석의 3자인 형수(瀅秀)를 입승하였으며

여는 의성 김시발과 성산 이상구에게 출가했다.

형수의 남은 인국.태흥이며 여는 창녕 조국호 김해 김해관 옥천 김동규 인천 채병희와각각 혼인했다

김시발의 남은 구준이요 이상구의 남은 동걸 승걸 준이고 인국의 아들은 무상과 덕상이다



오호라 공몰후 13년 을묘에 문하제생에 의해 추모학계가 이루어지고



20년이 지난 계해에 외정 류장하 공의 갈문으로 묘비를 세웠다



병자 중양의 어느날 효유 형수씨가 행약의 요초를 가지고 창회에게 보이며

기선의 글을 청하거늘

비재의 소임이 아닌줄 알면서도

회상하여 소자의 성동시절 초학을 훈몽받을때 당시 자제하고 감명 받은 바를 추상하면서

무사를 약술하지만 어제 같이 역력한 광음이 손을 꼽아 반백년

어찌 보사의 은에 만의 보가 되리요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행장을 서술한다



1996년 병자 국추 문 하족질 창회 근장





봉산문집 중에서 김정중 옮김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정중 - 근세의 사촌마을 선조님들의 기록을 찾아 올리는 중입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잘읽었습니다.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金在益 -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지난번 안동 의성지역 성지순례 이후 사촌마을 기록이 속속 올라오고 있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 태영/문 - 창회 대부님께서 지으신 것이로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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