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공(文端公) 우암(휘 澍) 친필 서찰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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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2-09-18 01:03 조회1,392회 댓글0건본문
<文端公 寓巖(諱 澍) 친필 서찰 번역문 소개>
* 발견일 : 2002. 8. 13 * 발견인 : 金恒鏞(제) * 출전 : <槿墨(仁)>(성균관대 간. 1995. 87P.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 작성 연대 : 1544년 4월 17일 * 수신인 : 미상
* 원문 해독 및 번역인 : 金益洙(제)
가. 한문 해독 원문
專 以存 副以節 深感厚意 無以爲喩 審 台候萬重 慰豁十分 皆以不輕 論罪爲啓 卽時 未聞結末 如似判金吾上知之遲卽然也 等待亦可苦 奈何奈何 餘萬 非遠書可免不宣 伏惟 台下照 謹拜 上謝狀 甲辰 四月 十七日 弟澍頓
나. 번역문
오로지 살아남게 하랴, 절삽(節 )에 따르랴 하시는 두터운 뜻을 깊이 느끼며, 깨우쳐 주신 것으로 여깁니다. 하물며 대감님의 건강을 살펴야 함에야. 십분 명심하라고 위로하신 것, 모두 가벼이 하지 않겠나이다.
죄를 논하여 계(啓)를 하였다 하나 즉시 그 결말을 미처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판의금부<判金吾>가 상감께 늦게 알려서 곧 그랬을 것 같습니다. 기다리기가 또한 괴로우니 정말 어찌하오리까. 나머지 모든 것이 멀리서 보내는 편지인지라 갖추지 못했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삼가 대감님께서 살펴보소서. 근배.
감사의 글월 올립니다. 갑진(1544) 4월 17일 제 주(澍) 올림.
※주1 - 절삽(節삽) : 미상 주2 - 상감 : 명종 추정
주3 - 김 주(金 澍) 1512(중종7)∼1563(명종18).
조선의 문신. 字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庵),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 1531년(중종26) 진사(進士)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1544년 사가독서 (賜假讀書)를 했고, 내외직을 역임 후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개성 유수·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1563년(명종18)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이인임(李仁任)이 아닌 이자춘(李子春)이라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연경(燕京) 관사(館舍)에서 병으로 죽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등과 우의가 두터웠다. 선조(宣祖) 23년(1590)에 광국공신(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저서로 《우암유집(寓菴遺集)》이 있다
▣ 김영환 - 잘 보았습니다. 번역해주신 김익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귀중한 자료입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오늘은 귀한 자료가 너무 많아서 정말 흥분되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자료 제공해주신 항용 종친님과 어려운 한문 찾아 번역해 주신 익수 종친님께 감사 드립니다.
▣ 郡/김태영 - 귀한글 잘읽었습니다.
▣ 김영윤 -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그 옛날 태조 이성계의 가계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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