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行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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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9-19 05:52 조회1,574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 行狀에 대하여
1350년 ★안진이 跋(끝에 적음)한 충렬공 행장에
---공의 손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영후) 의 집에 공(=방경)의 행장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해가 도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했음이--- 라는 기록으로 볼 때
☞1350년 한참 이전에 만들어져 (찬서자 미상, ? 아마 충렬공이 돌아가신 1300년 바로 후에)
충렬공의 손자 복창부원군 ★김영후(1292-1361)의 집에 보관해 오다,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김영후와 교유가 깊었던 ★안진(?-1360)이 1350년에 跋(끝에 적음)한 것이고
---상락공(上洛公)의 오대손(五代孫) 김군(金君) ★명리(明理=문온공의 아드님)가 이 도(道)를 지나다가 고향(故鄕)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에 와서 내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행장(行狀)이 집에 있으나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해 대유(大儒)에게 물어 간행(刊行)코자 하나 이럭저럭 하다가 미쳐 성취(成就)하지 못했으니 당시(當時)의 큰 공로(功勞)와 뛰어난 업적(業績)을 후세(後世)에서 어떻게 알리요?"하고 하였다.
나는 다행(多幸)이 족질(族姪)이 고향에 있음으로 해서 판관 한군 ★종우(判官 韓君 宗祐)와 더불어 그 말에 감동(感動)되여 그 원고(原稿)를 대유(大儒_)인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를 지내고 퇴임한 교은(郊隱 ) 정공 ★이오(鄭公 以吾)에게 물었더니
그 답서(答書)에 말하기를 "보내온 상락공 행장(上洛公 行狀)은 창연(蒼然)한 노대가(老大家)가 쓴 것이다. 좁은 소견(所見)이나마 병중에 마지못해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었으니 참람(僭濫)하지나 않을까? 또한 끝에 와서 오른쪽 수족(手足)의 병으로 전망후실(前忘後失)이 되니 어찌 감당(勘當)할까?"고 하니
이것이 시정(是正)할 수 있는 증험(證驗)이다. 그래서 다행(多幸)히 ★한군(韓君)은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출간(出刊)하니 광참(狂 )함은 잊은 것이다.
영락(永樂)19년 신축(辛丑=세종3년=1421)년 10월
가선대부 판안동대도호부사(嘉善大夫 判安東大都護府事) 대영 ★최개(大寧 崔開) 말편(末篇)에 기록함 --- 라는 기록으로 볼때
☞★김명리(1361-1438, 문온공파)의 집에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는 못한 채 충렬공의 행장이 보관되어 있었고, 안동에 살던 ★최개와 ★한종우가 ★정이오에게 찾아가 물었고, ★정이오가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어, ★한종우가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1421년에 출간(出刊)하였고,
---또한 책이 있으니 김감사 ★덕룡(金監司 德龍)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것이다. 그 글을 본 즉 이것과 틀린 바 없으니 이제 아울러 쓰게 되면 중첩(重疊)이 됨으로 단지 그 발미(跋尾)만을 아래에 부기(附記)하는 바이다
후손 ★구정(後孫 九鼎)은 삼가 기록함(謹識) --- 라는 기록으로 볼 때
☞★김덕룡(金德龍, 1518-?, 익원공파)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책이 있음을 후손 ★김구정(金九鼎, ?-?, ?파)이 기록(謹識)한 것 같습니다.
☞ 현재 충렬공 행장 원본은 어디에 있나요? 아시는 분은 의견 올려 주세요.
▣ 고려사제38권-세가제38 (공민왕 임진원년 1352)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영천 부원군 이능간(李凌幹),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1300년 김방경 묘지명을 찬한 이진의 아들로, 이제현은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을 찬함
복창 부원군 ★김영후(金永煦), ---문영공 김순의 4자, 김영돈의 막내동생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연안 부원군 인승단(印承旦),
전 첨의 정승 이군해,
정승으로 치사(致仕)한 손기(孫琦),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 충렬공 장손, 즉 김선의 장자이면 김영후와 4촌
안산군 ★안진(安震), ---1348년 김영돈 묘지명 찬, 1350년 김방경 행장 발,
정천군 정을보(鄭乙輔),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정간공 김영후의 4촌
영산군 장항(張沆),
낙 낭군 이천선(李遷善),
밀직부사 ★안목(安牧), ---안렴사공 김사렴의 장인 안원숭의 부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게 하고,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많은 공부 되었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정중 - 멋진 한가위 맞으세요! 주회대부님 사랑합니다!!
▣ 솔내영환 - 예. 이 문제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 입니다.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위에 쓴 영창군 김승택은 문온공과 도평의공의 할어버님이십니다. 김승택-김묘-김구용... 김승택.-김면-김구정..
▣ 김발용 - 많이 배우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1350년 ★안진이 跋(끝에 적음)한 충렬공 행장에
---공의 손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영후) 의 집에 공(=방경)의 행장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해가 도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했음이--- 라는 기록으로 볼 때
☞1350년 한참 이전에 만들어져 (찬서자 미상, ? 아마 충렬공이 돌아가신 1300년 바로 후에)
충렬공의 손자 복창부원군 ★김영후(1292-1361)의 집에 보관해 오다,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김영후와 교유가 깊었던 ★안진(?-1360)이 1350년에 跋(끝에 적음)한 것이고
---상락공(上洛公)의 오대손(五代孫) 김군(金君) ★명리(明理=문온공의 아드님)가 이 도(道)를 지나다가 고향(故鄕)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에 와서 내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행장(行狀)이 집에 있으나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해 대유(大儒)에게 물어 간행(刊行)코자 하나 이럭저럭 하다가 미쳐 성취(成就)하지 못했으니 당시(當時)의 큰 공로(功勞)와 뛰어난 업적(業績)을 후세(後世)에서 어떻게 알리요?"하고 하였다.
나는 다행(多幸)이 족질(族姪)이 고향에 있음으로 해서 판관 한군 ★종우(判官 韓君 宗祐)와 더불어 그 말에 감동(感動)되여 그 원고(原稿)를 대유(大儒_)인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를 지내고 퇴임한 교은(郊隱 ) 정공 ★이오(鄭公 以吾)에게 물었더니
그 답서(答書)에 말하기를 "보내온 상락공 행장(上洛公 行狀)은 창연(蒼然)한 노대가(老大家)가 쓴 것이다. 좁은 소견(所見)이나마 병중에 마지못해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었으니 참람(僭濫)하지나 않을까? 또한 끝에 와서 오른쪽 수족(手足)의 병으로 전망후실(前忘後失)이 되니 어찌 감당(勘當)할까?"고 하니
이것이 시정(是正)할 수 있는 증험(證驗)이다. 그래서 다행(多幸)히 ★한군(韓君)은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출간(出刊)하니 광참(狂 )함은 잊은 것이다.
영락(永樂)19년 신축(辛丑=세종3년=1421)년 10월
가선대부 판안동대도호부사(嘉善大夫 判安東大都護府事) 대영 ★최개(大寧 崔開) 말편(末篇)에 기록함 --- 라는 기록으로 볼때
☞★김명리(1361-1438, 문온공파)의 집에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는 못한 채 충렬공의 행장이 보관되어 있었고, 안동에 살던 ★최개와 ★한종우가 ★정이오에게 찾아가 물었고, ★정이오가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어, ★한종우가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1421년에 출간(出刊)하였고,
---또한 책이 있으니 김감사 ★덕룡(金監司 德龍)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것이다. 그 글을 본 즉 이것과 틀린 바 없으니 이제 아울러 쓰게 되면 중첩(重疊)이 됨으로 단지 그 발미(跋尾)만을 아래에 부기(附記)하는 바이다
후손 ★구정(後孫 九鼎)은 삼가 기록함(謹識) --- 라는 기록으로 볼 때
☞★김덕룡(金德龍, 1518-?, 익원공파)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책이 있음을 후손 ★김구정(金九鼎, ?-?, ?파)이 기록(謹識)한 것 같습니다.
☞ 현재 충렬공 행장 원본은 어디에 있나요? 아시는 분은 의견 올려 주세요.
▣ 고려사제38권-세가제38 (공민왕 임진원년 1352)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영천 부원군 이능간(李凌幹),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1300년 김방경 묘지명을 찬한 이진의 아들로, 이제현은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을 찬함
복창 부원군 ★김영후(金永煦), ---문영공 김순의 4자, 김영돈의 막내동생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연안 부원군 인승단(印承旦),
전 첨의 정승 이군해,
정승으로 치사(致仕)한 손기(孫琦),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 충렬공 장손, 즉 김선의 장자이면 김영후와 4촌
안산군 ★안진(安震), ---1348년 김영돈 묘지명 찬, 1350년 김방경 행장 발,
정천군 정을보(鄭乙輔),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정간공 김영후의 4촌
영산군 장항(張沆),
낙 낭군 이천선(李遷善),
밀직부사 ★안목(安牧), ---안렴사공 김사렴의 장인 안원숭의 부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게 하고,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많은 공부 되었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정중 - 멋진 한가위 맞으세요! 주회대부님 사랑합니다!!
▣ 솔내영환 - 예. 이 문제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 입니다.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위에 쓴 영창군 김승택은 문온공과 도평의공의 할어버님이십니다. 김승택-김묘-김구용... 김승택.-김면-김구정..
▣ 김발용 - 많이 배우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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